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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의 질문,너희는 소통 무기를 버렸나
  • 무학산
  • 2026.10.21  10:54 (조회 :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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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3일, 나는《국립국어원이란 명칭, 위압적으로 보임》이란 제목의 졸문을 올렸었다 글을 올린 후 오늘 아침까지도 가슴 한구석의 섭섭하고 서운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심지어 홀로 잔을 기울이며 비 오는 창밖을 내다볼 때도 그 아쉬움은 지워지지 않았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만 커질 뿐, 이유를 알 수 없어 생활의 활기마저 떨어졌었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잠이 깨어 자리에 잠시 누워 있을 때 머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는 게 있었다 “아하 그것이었구나”하는 탄성으로 기뻐했고 벌떡 일어나 이 글을 쓴다 지난 글에서 핵심이 되었어야 할 중요한 논거 두어 개를 통째로 빠뜨렸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바로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과 2022년 10월 8일자 한겨레신문 최우리 기자의 기사였다 이를 근거로 국립국어원의 외국어 표기법의 모순점을 지적하려 했었는데 정작 가장 강력한 무기를 빠뜨렸으니 스스로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타인이 보기엔 사소한 일이겠으나, 완벽을 기하려는 성격과 나이 든 건망증 탓이기도 했다

 

덩달아 ‘삼상(三上)’의 가치를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삼상이란 시문 지을 때에 영감이 잘 떠오르는 세 가지 장소, 곧 말 위(馬上), 베개 위(枕上), 뒷간 위(廁上)이다 송나라의 문장가 구양수가 《귀전록(歸田錄)》에서 “내가 평생에 지은 문장 중에는 삼상에서 지은 것이 많은데, 말 위, 베개 위, 뒷간 위이다. 대개 이곳이 생각을 얽어내기에 더욱 좋기 때문이다.(余平生所作文章 多在三上 乃馬上枕上廁上也 蓋惟此尤可以屬思)”라 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옛말 그르지 않은 것이다

 

내가 이토록 붙잡고 싶은 논거의 핵심은, 국립국어원의 모순된 어문정책에 있다 국립국어원은 1986년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면서 외국 인명과 지명은 원지음(原地音)주의를 원칙으로 삼아 국민에게 요구해 왔다 그러나 이 원칙은 오랜 시간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내에서 작동해 온 유기적 소통 체계를 단절하는 치명적 오류를 낳았다

 

더욱이 규정의 일관성마저 결여돼 있다 국립국어원은 중국 인명을 표기할 때 신해혁명(1911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 인물은 우리식 한자음으로, 현대 인물은 중국어 발음으로 쓰도록 제한한다 그리하여 ‘공자(孔子)’를 공자로 적으면서도 ‘모택동(毛澤東)’은 마오쩌둥으로 적어야 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똑같은 한자 문화권의 인물들을 인위적인 역사적 잣대로 갈라놓아 언어의 직관성을 깨뜨린 것이다

 

또한 현지 발음을 존중한다는 명목 아래 ‘풍신수길’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북경’을 ‘베이징’으로 적도록 강제한 결과, 한자 세대가 아닌 젊은 세대는 정작 그 인물이나 지명의 한자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인을 마주했을 때 문자로도 소통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앞서 떠올린 조선의 관리 최부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1488년(성종 19년) 제주도에서 공무를 수행하던 중 부친상을 당한 최부는 고향으로 돌아가다 폭풍우를 만나 14일간 바다를 표류했다 그 끝에 중국 남부 절강성 임해현에 도달했으나 왜구로 오인받아 명나라 관리들에게 혹독한 취조를 받게 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위기에 빠졌던 그를 구한 것은 바로 ‘팔담(筆談)이었다 한자로 조선의 관리임을 증명한 그는 신변을 보장받아 명나라 황제를 알현하고 대운하를 거쳐 66일 만에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후 왕명에 따라 이 극적인 여정을 기록한 책이 바로《표해록》이다 공공도서관에도 비치돼 있으니 일독하시면 필담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실 것이다

 

최부는 이 책을 통해 중국 연안의 해로, 기후. 산천. 도로. 풍속 등을 생생히 소개했을 뿐 아니라, 현지의 수다(水車) 제작법을 배워와 충청도 지방의 가뭄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요동 땅에 펼쳐진 광막한 들판의 이름이 ‘학야(鶴野)’라는 사실도 조정에 알렸다 이 학야가 바로 훗날 연암 박지원이《열하일기》에서 “한바탕 울어보기에 좋은 곳이로다(好哭場 可以哭矣)”라며 감탄했던 그 벌판이었을까? 역사적 상상이 꼬리를 문다

 

만약 우리가 ‘풍신수길(豊臣秀吉)’을 한자로 배우면, 우리는 우리식으로 읽고 중국이나 일본인은 자기식으로 읽을지언정 ‘한문’이라는 공통의 매개체를 통 해 최부처럼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오직 소리 나는 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만 외우면 한자라는 뼈대를 잃어버리게 된다 과거 우리 국군이 월남전 전장에서 한자를 써서 현지 주민들과 소통하며 위기를 극복했던 것처럼, 문자를 통한 소통에는 때로 목숨이 걸려 있다 결국 국립국어원 은 동아시아에서 천년 넘게 작동해 온 가장 강력한 소통 무기를 우리 손으로 내던지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지나친 규제는 외래어 표기법에만 머물지 않는다 표준어 규정 역시 본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한겨레신문의 최우리 기자는 그의 칼럼《“국가가 정한 말 아니면 틀렸다니” 표준어 없애는 거 어때요?》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어문규범을 ‘성문화된 규정’으로 정한 나라는 전세계에서 한국과 북한, 중국 정도에 불과하다 특히 표준어의 세부적인 기준과 사례까지 규정으로 제시하는 곳은 한국뿐이다.”

 

참으로 공감한다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 대다수의 선진국은 정부가 법으로 “이것만 표준어이고 나머지는 틀렸다”라며 언어를 규제하지 않는다 사전 편찬 기관이나 학술단체, 혹은 오랜 사회적 관습에 따라 자연스럽게 공용어를 형성해 나갈 뿐이다

 

오늘날 세계적 풍도(風濤)는 토속어와 방언을 살려 언어 다양성을 확보하려 애쓴다 바로셀로나 올림픽이 변방에 불과한 그 지역 언어를 공식용어로 삼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국립국어원은 세계적 조류에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국가가 공인한 어문 기준 외의 표현을 쓴 학술 서적들이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당하는 일마저 왕왕 일어난다 국립국어원의 관존민비적 태도가 일반화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언어가 가진 본질적 기능, ‘소통의 확장성’을 외면하지 않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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