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浩然의生覺
- 2026.10.31 10:54 (조회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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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깊어가고
날씨가 참 눈부시게 좋은 가을날이다.
딱히 불러주는 이도, 마땅히 발걸음할 곳도 없는 처지이지만, 베란다 너머 쏟아지는 통햇살에 까닭 없이 마음부터 먼저 바깥으로 다가선다.
특별할 것 없이 무덤덤하게 흘러간 한 주였다. 그날이 그날 같은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그래도 주말이라는 이름표가 붙으면 혹시나 잊고 있던 약속이라도 있었나 싶어 주머니 속 빛바랜 수첩을 다정히 뒤적여본다. 손에 잡히는 특별한 일과표는 없어도, 주말이 주는 특유의 너그러움이 마음을 살며시 부풀려놓는다.
TV에서는 가을 야구니 포스트시즌이니 하는 왁자지껄한 소식이 들려온다.
그 북적임에 문득 이 한 해도 다 저물어가는구나 싶어 쓸쓸한 눈길로 벽을 바라본다. 예전엔 월력(月曆)이라 부르던 달력을 마주한다. 오늘이 10월의 마지막 날이라 살포시 한 장을 떼어냈다. 연말에 묵직하게 받아와 벽을 든든하게 채워주던 녀석이었는데, 어느새 달랑 두 장 남은 종이가 작은 바람에도 바스락거리며 펄럭인다. 그 소리가 어쩐지 세월의 뒤안길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아 가엽게 느껴진다.
달력 소리에 끌려 아득한 옛 기억 하나가 꼬리를 잇는다. 옛날 한의원이나 특별한 곳에서 만들어 나눠주던 박엽지(薄葉紙) 일력(日曆) 생각이다. 매일 아침 한 장씩 넘겨 찢는 재미가 있던 그 가벼운 종이. 화장지가 귀하던 시절이라, 매일 아침 찢어낸 일력 한 장은 화장실로 들어가는 아침길의 요긴한 준비물이 되곤 했다. 얇은 종이를 손으로 몇 번이고 주물러 부드럽게 만들어 쓰던 그 시절의 풍경이 거친 손끝에 다정하게 떠오른다.
어디 그뿐인가. 볕이 맑고 바짝 잘 마르는 가을날이면 아버지는 문고리를 풀고 툇마루 문짝을 마당에 떼어 놓으셨다. 어머니는 밥풀을 풀어 풀죽을 쑤고 새하얀 창호지를 다듬으셨다. 입에 물을 한가득 물고 푸푸 소리를 내며 분무질을 하면, 물방울이 은가루처럼 흩어져 창호지 위로 내려앉았다. 햇볕 아래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던 창호지처럼, 부모님의 그 손길 속에서 우리 집 가을도 단단하고 따스하게 익어가곤 했다. 가을 햇살이 가득 쏟아지던 그 마당이 떠올라 괜스레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지고 그리움이 왈칵 밀려온다.
요즘 세상이야 휴가니 반차니 쉬는 날이 흔해졌다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 토요일 반공일(半空日)과 일요일 공일(空日)은 얼마나 간절하고 애타게 기다려지던 날이었던가. 토요일 오전 일과가 끝나기 무섭게 마음은 이미 집으로 달렸고, 일요일 아침이면 아이들 손을 잡아 이발소로, 목욕탕으로 향했다. 따뜻한 탕 안에서 한 주의 고단함을 씻어내고 나오며 사주던 따뜻한 음료 한 병에 아이처럼 행복해하던 시절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얇은 달력 위로 가을 빛깔이 한 겹 더 깊게 드리운다. 떼어낸 달력 장수만큼 나이도 익어가고 세상도 변했지만, 가슴속에 들어앉은 그 시절의 온기는 여전히 식지 않았다. 비록 오늘 손에 쥔 특별한 약속은 없어도, 아련한 추억과 부모님의 따스했던 손길이 가슴 가득 채워지니 내 눈엔 눈물이 고이지만 풍성했던 그 시절의 반공일처럼 정겹고 넉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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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햇살에 까닭 없이 마음부터 먼저 바깥으로 다가선다."......멋진 문장. 박수.
그리운 시절의 '반공일'을 들어서 또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