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의 금언에 이런 것이 있다.
--당선된 후에는 공약을 싹 잊어 버리시오.

 어떤 자연인이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는 순간, 정치 체제와 관계없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신이 오래 전부터 점지하고 선택한 초인으로 우러러보기 쉽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더욱 더 그러하다. 선거에 의해 당선된 국가 원수라고 예외일 리 없다. 인구에 무관하게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는 한 사람인데, 그 이유는 국가도 한 인격체와 같아서 좋든 나쁘든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민주 국가라 해서 훌륭한 지도자, 곧 국가의 미래가 달려 있는 선택을 제 때에 올바르게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지도자가 뽑히라는 법은 없다. 현실적으로 이런 지도자는 대개 한 세대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다. 그 이유는 여론 형성에는 무수한 요소들이 있는데, 대체로 그것은 장기적인 것보다 단기적인 것, 이성보다는 감정, 신문보다는 TV, 직관보다는 눈치, 국가 이익보다는 집단 이익, 실상보다는 허상, 원칙보다는 편법, 정직보다는 위선, 능력과 인품보다는 조직과 돈에 좌우되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여론 주도층의 수준을 넘기 어렵거니와, 여론 주도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크라테스보다 소피스트들일 가능성이 열에 아홉이기 때문이다. 양심에 찔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올바른 것도 아니다. 사교에 빠진 사람이나 이념에 물든 사람은 기존의 도덕과 법률을 어기는 것이 바로 시대적 사명이요 사회적 정의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후에 시간이 흘러 누가 보기에도 미친 짓밖에 안 되는 파렴치한 행위도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태연하게 또는 자랑스럽게 자행하기 때문이다. 그런 행위로 때로는 수백만 수천만이 학살되기도 한다. 

 2007년 한국의 대선은 친북좌파 종식에 대한 국민의 광범위한 여론이 집약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짧게는 지난 10년간의 노골적인 친북좌파 노선에 대한 반감이요, 길게는 전두환 정권 이래 대학과 재야에서 움트기 시작하여 김영삼 정부부터 민주와 개혁과 민족의 위장막을 쓰고 여론 주도층으로 올라선 친북좌파에 대한 심판이다. 보수층이 둘로 갈라진 상황에서도 1등이 2등과 월등한 차이를 내며 월계관을 쓴 것이 똑똑한 여론 주도층에 의해 휘둘리던 덜 똑똑하지만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일반 유권자의 본심이 어디 있는지를 잘 보여 주었다. 1980년부터 따지면 약 한 세대 만에 국가 운명의 새 조타수를 뽑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친북좌파를 종식할 지도자가 제대로 뽑혔느냐 하면, 그건 상당히 의심스럽다.

 무엇보다 친북의 핵심인 햇볕정책과 대통령 당선자의 비핵개방3000이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기가 몹시 어렵다. 대통령 취임식에 북한 고위층 초대, 북한의 체제 보장 등 이미 취임도 전에 고등정치수학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좌파 종식은 어느 정도 감이 잡히는 것 같지만, 이것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머리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기 시작한다. 규제의 전봇대를 뽑는다, 작은 정부를 만든다, 공기업을 민영화하겠다, 원칙적으로 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대통령 당선자의 대표적 정치공약은 신성불가침이다. 여론을 수렴하는 게 아니라 여론을 조성하겠다는 식이다. 세금이 걱정되면 100% 민간 자본으로 하겠다고 하여 경제의 가장 기본 개념인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을 무시하고 마치 공짜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또한 대통령 당선자가 툭툭 던진 한 마디가 곧바로 정책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대학입시에서 정부가 손을 떼는 것은 대표적인 좌파종식 정책이다. 열린 우파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이 있다! 본고사는 안 된다, 수능 과목은 줄인다, 일반과목도 영어로 가르친다, 등등 도무지 앞뒤가 안 맞고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이미 거의 확정해서 인수위 이름으로 발표했다.

 작은 정부를 만든다며 과학기술부를 과학과 기술로 쪼개어 각기 곁방살이하라며 두 개의 약도를 쥐어 주고, 한국을 IT 강국으로 도약시켜 박정희 시대 이후 최대의 경제 치적을 이룬 정보통신부도 우파정권 탄생으로 희망에 부풀어 오랜만에 단잠을 푹 자고 일어나니, 당장 보따리 싸라며 문을 가리킨다.
 "예? 누구 말입니까? 뭐! 저희라고요?"
이게 무슨 좌파종식인가. 이게 무슨 정책의 밀실 탈출인가.

 규제도 규제지만, 지난 15년 동안 대통령의 말씀이 곧 두 김심(金心)과 한 노심(盧心)이 민주와 통일과 평화와 평등의 이름으로 밀어붙인 정책이 얼마나 큰 상처를 내었던가.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고 있지 않은가. 역사 바로 세우기, 군사 문화 척결, 재벌 개혁, 햇볕정책, 제2의 건국, 과거사 정리, 행정수도 건설, 혁신도시 건설, 지역 균형개발, 노동자와 농민과 서민 보호 등등에 얼마나 많은 공무원과 얼마나 많은 국민이 동원되고 줄 세우기 당했던가. 

 국가 최고 권력자의 오만과 편견에 전 국민이 갈가리 찢어져서 한 쪽은 환호하고 한 쪽은  분노하고 또 다른 쪽은 냉소하고 또 다른 쪽은 저주하며 너나 없이 TV 채널 싹싹 돌리느라 손가락이 얼얼했다.

 큰 기대를 안고 탄생했지만, 이명박호는 진수(進水)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순리를 따르지 않는 항로 예고로 미루어 보아, 정치공약에 집착하고 선민의식에 사로잡힘으로써 과연 어디로 갈지 심히 걱정된다.           
              (2008.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