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한 군주는 정치에 관해 언급을 아니 하며, 전쟁에서 패한 장수는 전쟁을 논하지 않는다” -범려- 그러나 패자가 도리어 큰소리치고 정의를 독점하는 데가 있다. 우리의 역사적 대일(對日)관계에서이다. 여기에서는, 불분명하거나 증명되지 않은 일도 일본 책임으로 돌리면 도리어 박수받을 뿐만 아니라 애국자가 된다. 한때 우리는 우리의 호적 제도를 세계에 자랑했다. 물론 이 제도를 연구하러 오는 서양 학자도 많았다. 그러다 호적제도를 폐지하자는 세력이 힘을 얻으면서 일본이 만든 제도라고 몰아세웠다. 일본 탓으로 돌리면 차마 그것이 거짓이더라도 진실이 돼버리는 것이다.

오늘 중앙일보에 유홍준 씨의 칼럼 “[문화의 창] 옛 관아는 이렇게 생겼답니다”가 있다. 그는 글을 잘 쓰고 맛깔나게 쓴다 그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 책에 소개된 대로 답사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 문화유산에 대해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국민적 수준을 끌어올린 점으로 말하자면 그는 문화훈장을 백 번 받아 마땅한 애국자다. 아무튼 그의 글재주가 그를 문화재청장(?)으로 출세시켰을 수도 있다.

그는 위의 칼럼에서 조선시대 관아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음을 아쉬워했다. 우리 같은 무명소졸(無名小卒)마저 아쉬워하는데 그 방면의 전문가가 왜 아니 아쉽겠는가. 그런데 관아가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했다.《이는 전통 사회에서 근대 도시로 이행하는 과정에 목조건물이 겪은 숙명이었고, 원흉은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하면서 모두 파괴하여 버린 것이다.》일제가 우리나라 관아를 모두 파괴했다고 말했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가 있는가? 그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었는지는 모르나 그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저 주장만 했다. 한편 오늘날의 석굴암은 일제 시대에 일본인이 탐사하여 발견했고 힘들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조선인은 그 존재조차 잊고 있던 것을 말이다.

대략 20년 전쯤에 전라도 나주에 사는 사람의 초대를 받아 친구들과 놀러 간 적이 있다. 그 집에 들어가니 오래된 집이었고 뜰도 넓었으며 나무들도 이상하게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 집 자체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가 이야기도 안 하고 자꾸 집만 쳐다보고 있으니 그 집 주인이 “집이 이상하게 느껴집니까?”라 했다. “내가 무식한 탓인지 무어라 말은 못하겠고, 다만 이상한 뭔가가 있기는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주인이 “이것이 조선시대 나주 목사의 관아였습니다”라 했다. 그 이후 그 집도 양옥으로 변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일본이 와서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