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비가 메말랐던 보도를 축축하게 적시는 봄날 저녁 어스름이 내릴 때였다. 나는 서초동 뒷골목의 주점 구석에 고등학교 일 년 후배와 함께 앉아있었다. 그 후배를 보면 벨벳이 깔린 최고급 보석상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인생에서 실패를 모르는 승리자였다. 최고의 명문 학교들을 거쳐 고시에 합격하고 판사 생활을 했다.

모범생인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나 행동은 규범 그 자체였다. 그는 변호사를 하면서 재산 축적에도 남에게 뒤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사람들이 선망하는 최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저녁 대신 술안주로 감자튀김과 해물 떡볶이를 생맥주와 곁들여 주문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좋아하던 여학생은 없었어?”

창 밖으로 내리는 듯 마는 듯한 봄비를 보면서 마음이 촉촉해지기 위해 그렇게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건 얘기를 하거나 세상이 왜 이러냐고 메마른 자기 이론을 그가 얘기할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논리를 추구하다가 논리 자체가 된 것 같아 보이는 그였다.

“전혀 그런 기억이 없어요. 그냥 학교 다니고 열심히 공부하고 곁눈질을 한 적이 없어요. 우리 어머니가 남들한테 그냥 놔둬도 잘되는 아들이라고 자랑하고 다니셨으니까. 나는 서른 살 넘어 결혼할 때까지 숫총각이었어요.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면 한 번도 끈적끈적한 욕정에 고통받거나 유혹받은 적이 없단 말이야?”
“한번 친구들한테 반강제로 끌려가 여자가 있는 집으로 갔었지. 여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는데 나는 하지 않았어. 섹스를 하면 그 여자의 인격을 훼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 그래서 안 했지. 판사가 되어서도 조직에 누가 될 행동은 조금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어쩌다 접대 골프가 있어 필드에 나가도 내 골프장 피는 몰래 냈으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아내한테 충실했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의 말은 사실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주변엔 그런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이 흔했다.

“인생 칠십까지 그렇게 세상에서 바닥에 깔아놓은 모범생의 선(線)을 밟고 정확하게 살아왔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생각해? 보람 있고 만족스러운 거야?”
내가 말했다.

“우선 가족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나를 보면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답답했다는 거야. 아버지는 아버지 식대로 살지 우리보고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지 말라는 거야. 내가 평생 일탈한 적이 없이 반듯하게 살았는데도 집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나는 그의 아들과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나도 그런 면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늙어버린 지금까지 일생 뭘 추구했던 거야?”
내가 나를 의식하면서 그에게 물었다. 그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어려서는 어머니나 주변 사람이 공부 잘한다고 칭찬해 주고 추켜세우는 바람에 공부했고 학교 다닐 때는 모범생이 되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판사가 되고 법대 교수를 할 때는 최고의 판결이나 논문을 쓰려고 애를 썼는데 지나고 나니까 모두가 물거품이야. 뭔가에 속은 것 같은 인생이었어.”

그가 느끼는 공허가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이번에 오스카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의 남편 조영남은 네 번이나 결혼을 한 바람둥이야. 그리고 내가 아는 콧수염 기르는 성악가는 보는 여자들마다 연애를 했던 걸 알았어. 심지어 선배 부인하고까지 그랬다고 하더라구. 판사로 있으면서 그 사람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질책하고 엄하게 꾸짖었지. 나는 사회생활에도 모범생으로 반듯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아니야. 내가 바보였던 것 같아.”

로봇인형 같던 그가 칠십 고개를 앞두고 처음으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봄날 저녁 우리들은 어쩌면 정신적 전족을 하고 살아온 불쌍한 인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