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게 들은 기억 서랍을 골라야>

시청 앞의 한 일본 음식점에서 언론계에 있던 대학 후배를 만났다. 일간신문 사회부장을 하던 그는 청와대 대통령 비서관을 마치고 지금은 열 평 정도 하는 사무실을 얻어 작은 인터넷 언론사를 하고 있다. 그 일본 음식점은 가늘게 뽑은 흰 면을 간장에 찍어먹도록 하는 음식이 주메뉴인 집이었다. 사케와 오징어 튀김과 고로케를 안주로 주문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가 이런 말을 했다.

“한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어요.”

우울증으로 목숨을 잃은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대학시절 한 친구는 고시 일차시험에 떨어진 후 비오는 날 하숙방에서 자살을 했다. 고시 공부를 같이 하던 또 다른 친구는 판사생활을 마치고 얼마 후에 우울증을 앓다가 아파트에서 목을 매달고 죽기도 했다.

“우울증에 걸렸을 때 어땠어?”
내가 물었다.

“세상이 완전히 회색이야. 모든 게 부정적으로 보이더라구. 저녁에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술집에서 즐겁게 대화하고 있는 걸 봐도 도대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세상에는 절망밖에 없는데 뭐가 그렇게 즐거울까 하고 말이죠. 하루종일 마음이 무겁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신경정신과에 가서 약을 처방받아 먹었죠. 그래도 낫지를 않는 거야. 인간의 기억의 서랍이 여러 가지가 있다면 그중 나쁜 것들이 있는 서랍을 열어 머리를 온통 그 허접쓰레기 같은 상념으로 채운 게 우울증인 것 같아요. 고생 끝에 나는 그래도 마음공부를 하고 회복이 된 셈이에요.”

“그 마음공부라는 게 뭔데?”
내가 물었다.

“인간의 기억서랍 중에서 나쁜 것만 들어있는 서랍을 열어서 그것들을 머릿속에 꽉 채우고 사는 게 우울증이라면 좋은 것들이 가득 담긴 서랍을 열어 그것들로 바꾸어 영혼을 채우는 게 우울증에서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나는 보는 거죠. 이제는 알겠어요. 그러니까 영화를 봐도 피나 폭력 악마가 있는 걸 자꾸만 보면 그것들이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와서 밑바닥에 깔리는 거야. 그러니까 아름답고 감동적인 영화를 봐야지 어둡고 침울한 영화를 보면 안되는 거야.”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낮없이 음란한 동영상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은 어느날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곤 했다. 또 살인과 피가 튀는 영화 매니아들은 영화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강력 범죄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내가 걸린 우울증을 스스로 치료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내면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을 봤는데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는 누르면 누를수록 어딘가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가게 되어 있어요. 몇 년 전에 제주도에서 검사장이 밤에 바바리맨 같이 물건을 내놓고 음란한 행동을 하다가 걸린 적이 있잖아요? 내가 법조기자 출신이라 아는데 그 사람은 룸쌀롱에 가서도 다른 사람들이 별 짓을 다해도 혼자 근엄하게 앉아서 도덕군자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어. 그렇게 욕구를 평소에 누르니까 엉뚱하게 튀어져 나온 거지. 얼마 전 공중파 방송의 유명한 미남 앵커맨이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앞에 가는 여자 치마 속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다가 걸리니까 급하게 도망을 하다가 망신을 당하고 처벌받게 됐잖아요? 그 사람도 얼굴이 알려진 공인으로 철저히 자기 욕구를 눌렀던 사람이죠. 따지고 보면 비서에게 음란한 문자를 보냈다고 고소를 당해 자살한 서울시장도 마찬가지 케이스라니까요. 인간의 욕구는 누르면 엉뚱하게 꼭 튀어나가게 되어 있다니까.”

“그러면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뭘까?”
내가 그를 보면서 물었다. 사실상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오래된 근본적인 문제였다.

부처가 살던 시절 한 수행승이 정욕을 이기려고 자기의 남근(男根)을 자른 일이 있었다. 부처는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정작 잘라야 할 마음을 자르지 않고 엉뚱한 걸 잘랐다고 말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십 년간 수도 생활을 하던 지족 선사도 찾아간 황진이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는 소리가 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몸에 적용되는 죄의 법을 벗어날 수 없다고 고백을 하기도 했다. 정욕에 지배되는 인간의 한계상황을 말한 것이다. 성경은 인간에게 성령이 들어오면 그 영이 몸까지 지배해서 인간의 본능을 억제시키고 착한 마음으로 만든다고 한다. 그 외는 죄의 법을 벗어날 수 없나 보다.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