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 년 전이었다. 엄마와 손을 잡고 온 초등학교 사학년짜리 여자아이가 있었다. 나의 책상 앞에 선 아이는 키가 작아 머리통만 보였다. 그 아이가 까만 눈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변호사 아저씨 우리 아빠 말이죠. 아주 나쁜 놈이에요. 혼내 줄 수 없어요?”

어린 꼬마 아이의 가슴에 한이 맺힌 것 같았다. 대충의 사연은 이랬다. 아이의 엄마는 배우였다. 그녀가 배우로 이름이 날 무렵 한 남자가 나타났다. 잘 생긴 부자집 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임신이 되고 여배우는 몰래 딸을 낳았다. 언론에 처녀 스타가 사생아를 출산한 사실이 보도되면서 배우의 생명은 끝이났다. 주연급에서 조연으로 떨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역 자체가 들어오지 않았다. 유부남이었던 남자는 모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여배우는 새벽시장에서 점원 생활을 하고 젓갈 장사를 하면서 아이를 키웠다. 어느 날 아이는 학교에서 받은 급식비 청구서를 엄마에게 내놓았다. 그 뒷면에는 아이가 연필로 이렇게 쓴 게 적혀 있었다.

‘엄마 장사가 안 되는데 속상하지? 힘들면 나를 돈 안드는 학교로 전학시켜. 그래도 힘들면 어디 다른 데 맡기든지. 내가 그저 짐이야 쇠덩어리같이 무거운 짐’

아이의 존재를 안 부자집은 재산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꼬마 여자아이는 그 얼마 후 남성용 화장품 한 병을 사서 흰 종이로 싸서 내게 선물로 보냈다. 그 흰 종이에는 이런 아이의 글이 적혀 있었다.

‘변호사 아저씨 우리 엄마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없어요?’

험한 세상에서 모녀가 살기가 만만치 않은 것 같았다. 다시 십 년이 흘렀다. 꼬마 여자아이는 어느새 처녀가 되어 찾아왔다. 아직도 늙어가는 엄마와 둘이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니?”
내가 물었다. 아이의 삶이 궁금했다.

“엄마는 힘이 빠지고 내가 알바를 해서 먹고 살아요. 레스토랑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하루종일 냅킨을 접기도 하구요.”

아이의 삶도 힘이 드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 비슷한 경우가 또 있었다. 대한민국의 최고재벌의 맏아들이라는 사람이 여배우와 일 년간 동거하면서 아들을 낳았던 것 같다. 그 아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어 나의 법률사무소를 찾아왔다. 그는 아버지의 호적에 아들로 오르게 해 달라는 소송을 부탁했다.

“어떤 점이 힘들었어요?”
내가 물었다.

“제가 혼자 작은 개인사업을 하다가 아버지의 그룹 일을 하청 맡아 하게 됐어요. 그 직원이 어떻게 나를 못살게 굴고 모멸감을 주는지 몰라요. 나는 속으로 그 그룹이 할아버지가 창업한 걸 알고 있었죠.”

나는 그에게 먼저 아버지를 찾아가게 했다. 그가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해변가의 호텔에 아버지가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죠. 방안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더라구요. 내가 인사를 했더니 눈길도 돌리지 않고 모르는 체 하더라구요. 머쓱한 상태로 옆에 삼십 분을 있었는데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조용히 그 방을 빠져 나왔어요. 그래도 그 방에 가기 전에는 아버지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조차 접기로 했어요.”

또다른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 있다. 한 지방 도시에서 작은 의원을 하는 총각 의사가 있었다. 그는 저녁이면 자주 찾아가던 다방의 마담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의사는 서울로 올라와 결혼을 하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큰 병원 원장인 그에게 이십대의 청년이 찾아왔다. 자신이 아들이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만나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병원 뒷문으로 도망을 가고 아들은 아버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과학적인 검사 결과 부자 관계가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우겼다. 나는 그 아버지와 아들을 따로 만나본 적이 있었다.

“아들이 아니라고 우기시는데 나중에 묘 앞에 그 아들이 와서 절을 하면 귀신이 돼서라도 후회하시지 않겠습니까?”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완강했다. 다음에 그 아들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 보았다.
“내가 잘 됐으면 아버지가 나를 모른다고 할 리가 있습니까? 내가 못나서 그렇죠.”

아들은 한이 서려 있었다. 바람을 많이 핀다는 한 친구의 이런 솔직한 고백을 들었다.

“리비도가 강한지 난 어려서부터 유난히 섹스를 좋아했어. 세상에는 본능을 이기지 못하는 나 같은 남자가 있고 현실 제도에 굴복해서 살아가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난 바람을 피고 살았어.”

사람이 살다 보면 일시적으로 바람을 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쇼펜하우어는 이성으로 욕망을 절제한다는 것은 사실 거짓이라고 했다. 비유하자면 미쳐 날뛰는 욕망이라는 말 잔등에 탄 이성은 욕망에 끌려다니면서 그걸 합리화해주기 바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랑의 무책임한 부산물로 태어난 자식은 누구의 책임일까.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