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씨의 자술서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두 번째 시화상회에 들렀을 때 두 여인이 20만원을 빌려간 사람이 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하더란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두 여인은 20만원 사기 운운하는 이야기를 오 씨에게 함으로써 오 씨에게도 살해가 강도에 의해 이뤄진 것임을 위장하려고 했다는 의심을 살 만하다. 오 씨의 변호인은 나중에 “남편과 아이를 죽인 여자와 누가 같이 살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두 여인은 오 씨마저도 속이려 한 것이다”고 주장했었다. 검찰에서 두 여인은 20만원 사기 운운하는 이야기는 오 씨가 시키는 대로 퍼뜨린 것이라고 진술했었는데 이 진술은 다른 사람들의 증언으로 판단하여 볼 때 명백한 거짓말이다.
이 자술서를 쓴 3일 뒤(1월24일) 오 씨는 안길수 검사로부터 두 번째 신문을 받았다.
오 씨는 두이분 여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경찰에서 말한 대로 대충 시인했다. 오 씨는 1974년 11월 중순에 이미 두 여인과 결혼할 마음을 먹었다고 진술했다. 이 시기는 두 여인과 육체관계를 맺기 전이다.
오 씨는 또 두 여인에게 “뒤를 깨끗이 정리하라”고 한 것은 이혼 수속을 밟으란 말이었다고 했다. “아들이 크면 후환이 두렵다”고 한 것도, 죽이라는 뜻이 아니고 자식이 커서 찾아오면 좋지 않으니 정식으로 이혼을 하라는 뜻이었다고 했다. 사건 하루 전에 두 여인에게, 아티반 7, 8알을 사이다에 타서 남편에게 먹여 주라고 한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했으나, 죽이려는 뜻으로 그런 게 아니고, 두 여인이 교회에 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것을 남편이 눈치 채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 그렇게 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 씨는 이날 신문에서 사건 날의 행적을 시간별로 설명했다. 3일 전 자술서에서 쓴 것과 거의 같은데 중요한 대목에서 차이가 있다. 자술서에서 오 씨는 “집에 돌아오니 좌담회를 하고 있었고, 오후 9시경 전후하였는데, 좌담회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습니다”고 말한 것으로 적혀 있다.
귀가시간에 대한 진술이 3일 사이에 30분이나 틀려진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자술서와 피의자 진술조서를 비교해 볼 때 자술서의 진술이 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씌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더구나 오후 8시30분이 오후 9시로 바뀐 데 대해서 오 씨 측의 설명이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오 씨가 말한 행적으로 봐서도 ‘9시 귀가’를 설명하려면 8시30분~9시 사이의 공백이 생겨 잘 맞춰지지 않는다. 검찰은 ‘오후 9시 귀가’에 매우 집착하고 있었던 듯하다. ‘오후 9시 귀가’로 해야 오 씨의 알리바이를 깰 수 있다고 판단, 그쪽을 고수하려고 한 흔적이 있다. 그런 집착으로 해서 ‘8시30분 귀가’가 ‘9시 귀가’로 억지로 변경이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시간 변경에 수사관의 의지가 개재됐다는 인상을 씻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술서의 배경을 살펴야
오 씨는 사건 날 밤 두 여인 집에 두 번이나 간 이유에 대해서, “첫 번째는 두 여인이 교회에 오지 않아서이고, 두 번째는 고구마를 사다 주기 위해서였다”고 진술했다.
오 씨는 현장검증 때의 범행 재연이나 경찰에서 쓴 자술서가 경찰관이 강제로 시켜서 된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서 “그렇지 않습니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읽어 보면 오 씨가 답답하게 느껴진다. 경찰의 嚴問(엄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을 했다면서, 범행재연이나 자술서는 경찰관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닌 상태에서 썼다고 하니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피의자 신문조서에는 피의자가 진술한 내용이 전부 기록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경찰이나 검찰이 필요한 부분, 듣고 싶은 부분, 또는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이 주로 기록된다는 점이다. 진술자가 하는 말 중에서 수사관 위주의 취사선택이 있게 마련이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사실의 왜곡, 또는 부분 전달을 결과한다.
“경찰관이 강제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내가 아무리 못하겠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범행을 재연한 것입니다”고 진술했을 때 뒷부분은 싹둑 잘라버리고 앞의 내용만 “강제를 당하지는 않았습니다”고 적을 수도 있다.
학생 데모에 대해 “과격한 폭력 데모는 나쁩니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학생 데모를 무조건 容共(용공)으로 몰아붙이는 정부 측입니다”고 어느 야당 정치인이 말한 것을 뒤 구절은 생략하고 “과격데모는 나쁘다”고 보도한 공영방송도 있었으니, 의도적 생략에 의한 왜곡은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활발하다. 수사 기록만 보고 진실을 판단해선 안 되고 그 기록이 되어지는 과정과 분위기를 반드시 알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양심의 가책으로 다시 시인”
1월24일의 2회 피의자 신문 직후 오 씨의 신변에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이상한 일이란 같은 날에 쓰인 오 씨의 자술서다. 이 자술서는 피의자 신문이 있은 뒤, 아마도 1월24일 오후나 밤늦게 작성된 것이 분명하다. 자술서의 全文(전문)을 맞춤법 교정 없이 그냥 소개한다.
나는 지금 인천 검찰청 5호실에서 사실상의 뉘우침을 갖고 자술합니다. 나는 일련정종불교회 신자로서 합장기도를 함에 있어서 죄장소멸을 하기 위해서인데 그간까지 사람은 죽을 때 살인자에 죄명을 차마 쓸 수 없기에 정시화 등 살해 사건에 대해서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인간 대 인간에 오고 가는 정을 충분히 주어 나는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는 정시화 살해사건에 경찰에서 자백을 하고 진술서를 썼습니다. 물론 한 여자를 남자로서 사랑했기에 모든 것을 맹종하게 되어 이런 짓을 하였습니다. 모든 것은 경찰에서 진술서를 쓴 그 사실과 틀림이 없습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왔다가 자식으로서 가정인 한 사람으로 사회에 한 사람으로서 너무도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기에 정신으로서 검사님께 사실을 부인하였으나 모든 것은 당해 보지 않고서는 부인하는 심정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붙어 있는 시간은 짧건 길건 간에 얼마나 뉘우침이 있느냐가 문제이고 잘못을 저질려는 계획보다는 순간적인 일이기에 그 다음 그것을 끝맺기가 무엇보다도 어렵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형태도 없는 양심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부인한 것을 뉘우칩니다. 자세한 말은 추후에 진술하옵고 양심껏 이 글로 그간에 잘못을 너그럽게 보아 주십시오.
1975. 1.24
자술인 오휘웅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