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氏는 태연했었다”

일련정종 신도회 간부인 이 씨는 좌담회 도중 자기가 신도들에게 답변을 하고 있을 때 오 씨가 중간에 들어와 답변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귀가시간을 더욱 잘 기억한다는 취지의 이야기이고, 재판장은 답변이 막히면 시계를 볼 여유가 없었을 것 아니냐는 뜻으로 묻고 있다.

한 가지 사물을 놓고도 해석하는 방향이 정반대이다. 이 씨의 증언 가운데 신흥파출소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는 얘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경찰이 검찰로 넘긴 기록에는 이 씨에 대한 신문 조서가 보이지 않는다. 이 씨가 경찰신문에서도 오 씨의 귀가시간을 8시30분이라고 말했으며, 경찰은 이 증언이 오 씨의 알리바이를 성립시켜 준다고 생각하여 묵살해 버렸지 않나 하는 의문이 당연히 생긴다.

검찰이나 경찰도 언론과 마찬가지로 자료의 취사선택을 불공평하게 하면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 1982년의 이철희·장영자 부부 어음사기사건 때 거액의 뇌물을 받고 어느 은행장이 구속됐었다. 검찰은 은행장의 수뢰 사실만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실제로는 은행장은 그 뇌물을 받아서 며칠 갖고 있다가 돌려주었다. 이 돌려준 사실이 뒤늦게 보도된 뒤 어느 검찰 관계자는 “뇌물을 받은 사실만으로도 수뢰죄가 성립되므로” 돌려준 사실은 생략했다고 밝혔었다. 뇌물을 받은 사실만으로도 죄가 성립되므로 뇌물을 받은 사실만 필요하고, 그래서 그것은 알렸다고 하는 것은 ‘검찰 측 진실’일 뿐이지 온전한 진실은 아니다. 언론의 사실 왜곡은 誤報(오보)나 과장보도로 나타나고 수사기관의 왜곡은 생사람을 교수대로 보낼 수도 있다.

이석홍 씨의 증인 신문에서도 변호사의 집념이 아쉽다. 이 씨가 신흥동파출소에서 조사받은 내용을 캐물어서 경찰의 수사상황을 노출시킬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다. 공판기록에는 그런 노력의 흔적이 없다.
이날 세 번째 증인은 여창근 씨(당시 38세)였다. 일련정종 숭의동회관의 사무장인 그는 사건 당일 오 피고인이 오후 7시30~40분 사이에 회관에 도착했다가 오후 8시10~20분 사이에 좌담회에 간다고 회관을 나갔다고 증언했다.

이날의 증인들은 사건 직전과 직후에 오휘웅 씨를 본 사람들이었다. 한결같이 오 씨는 보통상태였다고 했다. 사건 직후에도 설교를 태연히 하고, 사진을 나눠서 보며, 신원보증서를 써달라고 부탁도 하곤 했다는 것이다. 핏자국이 몸이나 옷에 묻어 있었다는 증언은 일체 없었고 몸을 씻었다는 얘기도 나오지 않았다. 사건 직후 두 씨의 손엔 핏자국이 묻어 있었고, 얼굴이 창백했으며 말은 다급했고, 무를 썰 때 손이 떨리더라는 여러 목격자의 증언과는 대조적이다. 더구나 기소장대로라면 3명을 죽이고, 칼질을 한 것은 오휘웅 혼자인데도 말이다.

피를 말리는 고통

세 인간의 생명을 빼앗은 사람이 순식간에 평온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것도 사전 계획이 없는 우발적 즉흥적 범죄를 저지른 인간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로봇이 아닌 다음에야, 심장을 가진 인간이 그 집단 살인의 무게를 지고도, 잡담과 설교를 하고 신원보증 부탁을 할 수 있을까. 금당사건 주범 박철웅 씨는 체력이나 지력 면에서 오 씨와는 비교가 안 되는 범죄의 천재였다. 그런 박 씨도 3명을 살해한 직후의 고통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을 감추고, 흔적을 없애고 하는 동안에는 온 정신이 거기에만 크게 쏠려서 정신없이 돌아갔는데 대강 정리를 끝내고 한숨 돌리고 나니 나의 내면에서 무섭고 두려운 공포가 비로소 체험으로 느껴져 오기 시작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그리고 그것을 만지고, 매장하고 하였을 때 느껴 보지 못했던 극심한 공포가 나의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여 나의 모든 일체의 신경과 피를 바짝바짝 말려 들어갔다.

내 손으로 죽였고, 내 손으로 만지고, 내 손으로 매장했던 내가, 이제는 그 장면을 상상에 떠올리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것이었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만지고, 매장할 때 느끼던 그 무서움과 공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공포가 나를 꼼짝 못하게 묶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암매장한 곳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되었고, 내 집 정원에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걸 생각만 하여도 진정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 속에서 신경은 신문과 텔레비전의 뉴스 보도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수사의 진전 과정이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다소 안심을 했다. 그러나 날짜가 지나자 나는 신문은 보아도 텔레비전은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텔레비전을 보면 화면에 피해자의 사진이라든가, 특히 그 가족들의 애절해 하는 모습들을 볼 때에는, 눈앞에 권총이 있으면 심장을 쏘고 당장에라도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괴로웠기 때문이다.

불을 질러 놓은 것처럼 매일 매스컴은 금당사건을 대서특필하였으나, 단서 하나 잡지 못하고 허공을 치고 있었다. 나는 하루 24시간을 공포와 긴장 속에서 보내는 날이 계속되었다. 집 대문 앞으로 지나가는 찻소리만 나도 나는 깜짝깜짝 놀라 살며시 커튼 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누가 대문의 벨만 눌러도 후다닥 일어서곤 하였다. 밤에는 한잠도 잘 수 없었다.
몸은 나날이 눈에 띄게 말라 가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술을 퍼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여전히 극심한 불안과 공포는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제는 밖에서 조그만 무슨 소리만 나도 나는 질겁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별의별 수단과 방법을 써도, 내 속에 도사린 말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와 긴장을 조금이라도 가시게 할 수가 없었다.

최후의 방법으로 나는 불안과 공포와 긴장을 잊어버리려고 섹스에 몰두하였다. 섹스 필름을 수십 개 방에 깔아 놓고 세 대의 비디오에 필름을 넣고 보면서 거의 밤을 꼬박 새다시피 섹스를 하였다. 이것은 거의 매일 밤 계속 되었다. 억수로 술을 퍼마시고, 그리고는 날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두 사람은 섹스로써 밤을 보냈다. 그러지 않고서는 밤이 가져다주는 공포를 견딜 수가 없었다. 분위기를 새롭게 하기 위해 침실의 모든 걸 전부 새것으로 바꿔 치웠다.

잠시 깜박 잠이 들었다가도, 바스락 무슨 소리만 나도 후다닥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곤 하였다. 그래서 안방에서 함께 자던 애완용 개를 응접실 밖으로 끌어 내버렸다. 그랬더니 밤에는 방에 들어오겠다고 어떻게 짖어대는지, 지하실에 묶어두라고 일렀다. 그러니까 이 개가 밤에는 어떻게 짖어 대는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쇠로 만든 기다란 구두 주걱을 가지고 가서 사정없이 패버렸다. 다음날 아침 회사로 나가면서 들여다보니까 나를 보고는 겁을 내고 슬슬 피하는 것이었다.

아아, 내가 어쩌다가 말 못하는 짐승에게까지 이토록 포악하게 되었는가?(박철웅 자서전 <내 목에 밧줄이 놓이기 전에>)

변호인의 이상한 결정: 조서의 임의성 인정

이석흥 씨의 증언이 끝나자 재판장은 오 피고인에게 증인들의 증언에 이의가 없느냐고 물었다. 오 피고인은 이의가 없다고 했다. 이어서 재판장은 전회 공판에서 제출된 검찰 측 증거에 대한 동의 여부를 물었다.

피고인 및 변호인은 ①검사가 작성한 피고인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는 진정 성립과 진술의 임의성은 인정하고, ②사법경찰관 사무취급이 작성한 피고인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는 진정 성립과 진술의 임의성은 인정하나 그 내용은 당공정에서의 피고인의 주장에 반하는 부분은 부인하며, ③사법경찰관 사무취급이 작성한 압수조서와 압수물, 의사 김갑환 작성의 정시화, 정연호의 정연경에 대한 시체 검안서, 의사 김상현 작성의 정시화에 대한 감정서와 정연홍, 정연경에 대한 검안서 및 수사협조 질의사항 답변서, 감정인 정석웅 작성의 담배꽁초 타액 감정서는 각 본건 증거로 함에 동의하며, ④그 밖의 서류들에 대한 동의여부는 차회 진술하겠으며 주장사실을 입증키 위하여 사진 9매 및 사진 넣은 봉투를 증거로서 제출하고 당일 사진을 찾으러 간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을 입증코자 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진술을 하다.

검사는 변호인 제출 사진 등은 증거로서 필요 없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공소사실을 입증키 위하여 증거로서 증인 이주순, 신재순(각 인천 소년교도소 재감 중)을 각 증거 신청함(공판기록 인용).

여기서 진정 성립이라 함은 증거가 위조가 아니고 진짜란 뜻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변호인이 (기록에는 ‘피고인 및 변호인’으로 되어 있으나 피고인이 이런 법률적인 견해를 표시할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왜 검찰 및 경찰에서 작성한 오 피고인에 대한 신문조서의 임의성을 인정했느냐이다. 오 피고인은 고문에 의해 강요된 진술이라고 여러 번 주장했으므로 당연히 임의성을 부인했어야 했다. 이 사건에서 고문 여부는 유무죄를 가리는 중요한 쟁점이었다. 변호인이 너무 쉽게 임의성을 인정함으로써 고문주장을 스스로 포기한 형편이 됐다.

피고인이 경찰에서 한 진술은, 이 경우처럼 변호인이 임의성을 인정해도 내용을 부인하면 재판부가 판단을 할 때 증거로 쓸 수 없다. 그러나, 검사가 작성한 신문조서는 임의성만 인정하면, 아무리 변호인이 “그 내용은 당공정에서의 피고인의 주장에 반하는 부분은 부인한다”고 해도, 신빙성까지도 인정되는 게 관례이고, 이 재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부분에 대해 어느 변호인은 “그 사건 변호인이 고문을 입증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했든지, 아니면 피고인이 유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하고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다. 당연히 경찰 및 검찰 조서의 임의성을 부인해버렸어야 할 텐데…. 임의성을 인정하고 내용을 부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검찰에선 ㄱ이란 이야기를 하고, 법정에서는 ㄴ이란 이야기를 했을 때 ㄴ이 맞다는 뜻으로 하는 경우인데…”라고 고개를 갸우뚱한 변호사도 있었다.

오 씨는 나중에 상고 이유서에서 1, 2심 변호인들이 피고인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변론을 했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는데, 어쨌든 경찰․검찰 조서의 임의성 인정은 오 씨의 고문주장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 판단이었음은 확실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