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30분 귀가’ 주장 믿으면 오 씨는 무죄

이날 나는 내친 김에 현장 주변의 거리 측정을 해보았다. 사건 당일 오휘웅 씨가 다녔던 코스를 따라서, 그것도 그가 말했던 시간대에 걸어 보았다. 먼저 숭의동 로터리변에 있었던 불교회관에서 8시5분에 출발, 약간 빠른 걸음으로 시화상회 자리까지 걸어오니까 8시15분쯤이었다. 오 씨는 그때 두 씨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인삼주를 한잔 얻어 마셨다고 하니 3분쯤 머물렀다고 쳤다. 8시18분에 칠공주사진관 자리에 갔다. 1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8시19분, 여기서 오 씨는 사진을 찾고 두어 마디 대화를 했다니 3분쯤 머물렀다고 쳐서 8시22분, 다시 시화상회로 오는 길에 군고구마를 샀다니 도보 1분에 지체시간 1분을 보태어 8시24분에 시화상회에 도착했다는 얘기가 된다.

오 씨는 여기서 두 여인에게 고구마 봉지를 건네주고 두어 마디 대화한 뒤 서둘러 집으로 갔다고 주장한다. 그 지체시간을 2분으로 잡아 8시26분에 시화상회를 출발, 오 씨의 옛날 집(지금은 오 씨의 동생 집)에 도착하니 8시31분이었다.
만약 오 씨가 8시26분부터 세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고 친다면 1인당 살해시간을 의사의 말대로 5분으로 잡고 15분을 더해서 8시41분에 범행이 끝났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 즉시 오 씨가 집으로 왔다면 8시46분쯤이 귀가시간이다.

이석홍, 송안섭, 박소연 씨의 말대로 오 씨가 8시30분경에 집에 도착했다면, 오 씨는 범인이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다. 물론 이런 계산은 오 씨가 8시5분에 불교회관을 출발했다는 것을 기준점으로 하여 추정한 것이다. 오 씨뿐 아니라, 오 씨에게 불리한 진술을 계속한 두 여인의 말을 근거로 계산해도 오 씨가 두 번째로 두 씨 집에 나타난 것은 8시20~30분 사이였던 것 같다. 어느 경우를 믿든 “오 씨의 귀가시간이 8시30분”이란 증언이 사실이라면 그는 범인일 수가 없다. 문제는 재판부가 이 증언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주관적 판단인 것이다.

두 여인의 편에서 시간 문제를 풀어본다. 8시26분쯤부터 범행이 시작 됐다면 빨라도 8시41분쯤에 끝이 났을 것이다. 서둘러 삼성라사에 나타난다 해도 8시45분경 이후일 것이다. 손에 묻은 피를 씻지 않고 나타난 걸로 봐서 두 여인은 범행 직후였던 것 같다. 이옥련 씨가 말한 ‘두 씨의 출현 시간 8시40분경’은 두 여인의 행적과 비교해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 진술에서 흔히 있는 10분 정도의 오차를 감안한다면, 두 여인이 8시40분경에 삼성라사에 나타났다는 이 씨의 진술과 두 여인의 범행시간은 양립될 수 있는 범위에 든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오 씨에게 있어서는 범행과 ‘8시30분 귀가’는 절대로 양립 불가능이다.

“그 옷 그대로 입고 연행됐다”

나는 박소연 씨가 “8시28분에 오 씨가 웃으면서 좌담회에 참석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묘한 느낌을 가졌다. 이 짧은 한 마디 말을 믿는다는 것은, 오 씨에 대한 사형선고가 誤判(오판)이었고, 그에 대한 사형집행은 사법살인임을 인정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복잡해 보이지만, 그 진실의 핵심은 결국 한 여자의 말을 믿느냐, 안 믿느냐로 귀착된다. 나는 귀가시간 문제에 있어서는 믿느냐, 안 믿느냐의 판단을 유보하기로 하고, 사건 뒤 오 씨의 행동을 정리해 봤다. 오 씨가 웃으며 좌담회에 들어와, 태연히 강론을 한 뒤, 박 여인에게 재정보증서를 부탁하고(이석홍 씨에게는 신원보증 부탁), 신도들과 사진을 나눠 보며, 그 뒤 식사를 하고 잠을 자다가, 다음날(31일) 새벽에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12월31일 밤늦게 풀려나 다시 그날 밤을 집에서 잔 뒤, 다음날(1월1일) 아침엔 아버지 생일잔치를 주관하고, 이발소에 가 있다가, 경찰에서 한번 더 다녀가라 한다는 전갈을 받고, 파출소로 제 발로 찾아갔다는, 사건 뒤의 행적이 세 사람을 죽인 살인범의 행동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날(1986년 5월8일) 인천에서 나는 다시 오기남 씨를 찾아가 꼬치꼬치 물어 보았다.

“그날(12월31일) 새벽 3시쯤 경찰관들이 집으로 와서 오 씨를 데려갔다고 하셨죠?”
“예, 제가 휘웅이를 깨웠습니다.”
“자고 있습디까?”
“몇 번 흔들어서 깨울 정도로 잠에 빠져 있었어요. 두이분네 집에서 사고가 났다고 했더니, 아, 그래요 하면서, 옷을 주워 입었어요.”
“전날 밤에 입었던 그 옷을 그대로 입고 경찰관에게 연행돼 갔습니까?”
“그렇습니다.”

“일단 풀려났다가 1월1일 오전에 다시 신흥동파출소로 출두했는데 그날 아드님을 만났습니까.”
“제가 점심 때 파출소에 가서 아들에게 국밥을 사주었어요.”
“국밥을 사서 파출소에 있는 아드님에게 가져다주었단 말씀이지요.”
“그게 아니고 아들을 데리고 나와 파출소 앞에 있는 음식점에 가서 사 먹인 것이죠.”
“경찰관이 감시차 따라왔겠군요.”
“아니오. 우리 둘뿐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드님이 무슨 말을 합디까?”
“파출소에 데려다 놓고, 묻지도 않고, 가라고 하지도 않는다고 하더군요.”
“불안해 보였습니까?”
“덤덤합디다.”
“휘웅씨는 간이 큰 편입니까?”
“닭도 죽일 수 없는 아이예요. 닭을 죽이는 걸 보면 그 고기를 먹지 못하는 아이였어요. 이석홍 씨가 휘웅이를 항만하역업체에 취직시켜 준 적이 있었는데, 며칠 일해 보다가는, 잘못하다간 도둑질 배우겠다면서 그만둔 일도 있습니다.”

그날 인천에서 돌아오는 전철에서 생각해 보았다. 이옥련, 송안섭 씨 등 이 사건의 증인들은 11년이 지난 지금도 시체를 본 충격과, 신문과 증언의 시달림 때문에 그 경험을 악몽처럼 기억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 올바른 증인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두 보통사람들은 입증하고 있다. ‘증인 없는 사회’의 책임은 ‘용기 없는 시민’쪽에 있는 게 아니라 ‘용기 있는 시민’을 그냥 놔두지 않는 사회와 제도 쪽에 있는 것이 아닐까.

세 사람의 시체를 목격한 충격만으로도 심장병에 걸린 보통사람이 있는데, 그 세 사람을 죽인 직후에도 유쾌하고 태연할 수 있는 또 다른 보통사람이 있었다고, 내 책상 위에 놓인 낡아 냄새 나는 재판기록은 결론 내렸었다. 나는 다시 그 기록 뭉치를 뒤적이기 시작한다.

두 여인, 오 씨의 혼담에 훼방

1975년 9월29일 신흥동파출소에서 있었던 증인 신문에는, 오휘웅 씨와 혼담이 오고 갔던 김 모 양의 동생 김종렬 군(당시 20세)도 증인으로 나섰다. 김구남 변호사는 이 증인신문을 통해서 오 피고인이 세 사람을 죽여서까지 두이분 여인과 같이 살고자 할 이유가 없고, 두 여인이 일방적으로 오 피고인에게 열을 올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문(변호사): 증인의 누나와 피고인간에 약혼말이 있었다는데 그런가요.
답: 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문: 중매는 누가 하였나요.
답: 불교회 사람들이 하였습니다.
문: 약혼이 성립되었던가요.
답: 약혼할 단계에서 피고인의 어머니가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나의 누나가 품행이 좋지 않다는 말을 하여 불쾌해 하지 않고 있던 차입니다.

문: 증인의 누나와 피고인간에 약혼설이 있을 때 두이분이가 약혼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였다는데 어떠한가요.
답: 두이분이가 저의 집에 찾아와서 우리 집에 있던 이웃 사람들에게 저의 누나와 피고인이 결혼하여 살면 칼부림이 날 것이라고 하였다는 말을 이웃 사람들로부터 들었습니다.
문: 피고인의 어머니가, 당신의 누나가 품행이 좋지 않다고 하였다는데 구체적으로 무어라고 말하던가요.
답: 이웃에 살고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피고인의 어머니가 저의 누나가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면서 그게 사실이냐고 묻는 말을 제가 간접적으로 들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