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다 볼 수 없다”고 실토

― 김재규 사건같이 역사적인 사건이면 그러지 않겠지만, 보통 사건에서는 사건기록을 전부 복사하지는 않으니까, 그 기록을 보려면 주심 판사한테서 빌려오는 식이 되는 겁니까?
양: 기록을 회람하니까, 그때 볼 수는 있죠.
― 재판연구관(대법원 판사 1명에 2명의 재판연구관이 붙어 있음)이 대법원 판사를 도와 기록을 검토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양: 재판연구관이 모시고 있는 대법원 판사가 주심을 맡은 사건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기록을 다 보지 않고, 대법원 판사가 맡기는 일부만 보고 검토하는 수가 많아요.

― 제가 듣기로는 양 변호사님은 대법원 판사 시절에 기록을 집에까지 가져가셔서 꼼꼼하게 보시는 분으로 유명했던 걸로 압니다만….
양: 주심 맡은 사건이 아니면 기록을 다 볼 수는 없어요. 중요한 점만 보는 거지요. 도저히 다 볼 시간이 없어요.
― 그래도 사형 판결이 난 사건이면 주심 아닌 분도 기록을 다 보시겠지요.
양: 큰 사건이라고 해서 특별히 본다 안 본다, 그런 것 없어요.

― 보통 몇 건씩 판결하십니까?
양: 2주일마다 주심으로 맡고 있는 사건의 선고가 있는데, 형사는 열댓 건, 민사는 7~8건, 특별사건 서너 건씩 하죠.
― 이야, 그렇게 많습니까. 2주에 모두 스물대여섯 건의 선고를 하시려면 하루에 평균 두 건의 기록을 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양: 그렇죠. 큰 사건이면 하루에 한 건 정도 보지요.
― 집에 기록을 가지고 가셔야 되겠습니다?
양: 가지고 가야죠. 일요일과 토요일엔 더 봐야 되고. 술 마실 시간, 놀러 다닐 시간, 이런 거 없어요. 사건이 너무 많아요.
― 그러면 합의할 때, 대체로 주심 의견에 따라가겠군요.
양: 그렇지요.

― 원칙은 네 판사님 전부가 기록을 다 읽고 합의할 때도 토론을 벌이고 해야 되지 않습니까.
양: 원칙은 그렇지요.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고, 사건은 많아서 그렇게 잘 안돼요. 마, 주심과 재판장이 기록을 많이 보지요. 주심은 기록을 다 봐야하고, 그 다음에 재판장이 기록을 좀 보는 거지요.
― 아까 말씀하신대로 사건이 그렇게 많다면 재판장도 기록을 전부 볼 시간은 없겠습니다.
양: 마, 적지요. 다른 대법원 판사보다는 조금 더 보는 거지요.

하루에 2건을 판단해야

양 변호사가 1985년도 <변호사>지(서울변호사협회 발간)에 쓴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이란 논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첫째, 자기(대법원 판사 시절)에게 배당된 사건을 살펴보자. 우선 휴일 등 별다른 일이 없는 바에야 2주에 한 번씩의 부합의가 있었고 그 2주 후에 다시 다른 사건의 부합의를 하고 그전 부합의한 것에 대한 판결선고를 한다. 각 부합의 2일 후에 전체합의를 한다. 이것이 매월매월 계속되는 것이다. 매부합의 때마다 주심으로서 민사사건은 최소한 7~8건, 형사사건은 15~16건, 특별사건(행정소송․가사심판․특허사건 등) 3~4건을 세밀히 통람메모하고 판결초안까지 대강 작성한 후에 합의에 돌린다. 합의가 잘되면 판결문을 정서하여 회람에 공한다. 전

체합의시에 미합의된 사건을 상정, 합의하고 다른 부원의 미합의 사건을 심의한다. 그밖에 부합의에 있어 재판장으로서의 부원 주심 기록을 대체 통람하여야 한다. 이것이 대법원 판사로서의 근본적인 일인데 이에 끝나지 않고 민사․형사에 결친 재항고, 준항고, 특별항고 등 사건을 처리한다. 상고 및 상고장 각하 등 잡사건도 있다. 전체 판결 결정을 정독하고 이에 대한 서명 날인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이와 같이 한 달에 60건 가까이의 사건을 마치려고 하니 법원에서만의 집무로써는 도저히 불가능하여 법원에서 보던 기록을 매일 한 보따리씩 싸서 들고 집에 와서 보지 않을 수 없다. 밤 12시 안에 자본 적이 없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기록 보기에 더 필요하다.
온종일 세 끼 밥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빼고는 기록 보는 데 몰두한다. 텔레비전 프로 등 일체 금물이다. 신문은 법원에서 잠시 뒤적일 뿐이다.

원래 본인은 등산을 좋아해 매 일요일 안 가본 산이 없을 정도였는데 이를 그만두었다. 16~17년이 흐른 요사이 나는 그때 다닌 등산로를 하나하나 따져보고 오른다. 정상 근처의 길과 경치는 그 전과 같았으나 산 일대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몸은 5~6 킬로그램 정도 체량이 불어나 오래도록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퇴관 후에 고혈압에 걸려 고생할 줄이야 그 당시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요사이는 5~6킬로그램 정도 다시 줄었지만.

한번은 연휴일을 맞아 오래간만에 그 전에 등산을 같이 가던 친구들 3인의 권고를 거절할 수 없어 충북 보은 법주사 문장대까지 오르기로 하였는데 법주사에 이르러 산에 오르는 길에 들어서니 집에 두고 온 기록 생각이 나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동행한 친구들께, 나 바빠서 아무리 생각해도 갈 수 없으니 용서해달라고 애원하여 마침내 뒤돌아보고 또 보며 되돌아오고 만 일까지 있었다.

오휘웅 씨 사건 기록은 약 1500쪽이고, 200자 원고지로 환산하면 약 3000장 분량에 해당한다. 판단의 기준이 설 정도로 읽는 데는, 나 같은 경우, 꼬박 1주일이 걸렸다. 대법원 판사가, 주심 맡은 사건 기록만 읽는다 해도 그런 기록을 하루에 2건씩 읽고 판단까지 해야 한다면, 과연 올바른 선고가 가능할까. 논쟁점이 수두룩한 딱딱하기 짝이 없는 책 몇 권을 읽는 것과 꼭 같은데, 이게 도대체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며, 이래 가지고 誤判(오판)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법원 판사가 하루에 평균 2건씩 판단해야 한다는 그 사건들은 거개가 당사자들의 행․불행, 더 나아가서는 운명을 결정짓는 것인데도 말이다.

“誤判 안하려면 판사 포기해야”

사정이 양 변호사의 실토대로라면 대법원 선고는 사실상의 단독심이고, 그것도 시간에 쫓겨서 허둥대면서 내리는 선고란 얘기다. 인간에 대한 세심한 성찰과 관심과 애정은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우러나오는 법이다. 바쁜 상황에서는 아무리 한 인간의 생명이 걸린 문제라도 판단이 소홀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 씨 사건처럼 언론의 관심이 크지도 않은 사건일 때는 아무래도 신경을 덜 쓰게 될 터이다.

성실하다고 소문난 양 변호사조차, 자신이 사형을 확정시킨 피고인의 이름을 내가 먼저 대어도 기억해내지 못하지 않았는가. 대법원은 더구나 서류로써만 판단을 해야 한다. 그만큼 더욱 신경을 써서 기록을 검토해야 한다. 지금의 제도로서는 1, 2심보다도 오히려 대법원의 검토가 더 엉성해질 가능성이 높다.

서울고법의 김 모 판사는 “우리나라의 재판이 너무 빨리 진행되도록 돼 있어 오판이 두렵다”고 말했다(1986년 4월 인터뷰). 우리나라에서는 구속사건일 경우, 1심 선고는 구속된 지 6개월 안에, 2심 선고는 2심으로 넘어온 지 4개월 안에, 3심 선고도 4개월 안에 내리도록 하고 있다. 즉, 구속된 지 1년 2개월 안에는 형이 확정되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빠른 소송 진행으로 피고인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장점도 많지만, 사실 판단이 어려운 사건의 심리를 조급하게 하고, 특히 상고심의 업무를 과중하게 만들어 오판의 위험성을 높이는 단점도 있다. 김 모 판사는, 기소된 지 10년이 지나도록 2심 선고가 나지 않고 있는 일본의 ‘다나카 前수상사건(록히드 뇌물 사건)’을 예로 들면서, “그런 재판 경향도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너무 빠르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또 인간의 판단능력이 갖는 한계 때문에 “오판은 의사의 오진처럼, 줄일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며, 오판을 안 하겠다는 것은 판사를 안 하겠다는 말과 같다”고 실토했다.

나는 오휘웅 씨에게 사형을 확정시킨 대법원 재판부의 주심이었던 강안희 변호사를, 서울 동대문 로터리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 만나보았다. 과연 강 변호사는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강 변호사는 그때의 판결은 “만장일치의 합의에 의한 것이었으며, 기록상으로는 오 씨의 유죄가 요지부동이었다”고 회상했다.

대법원 판결문에 나타난 여러 모순점을 생각하면서 나는 강 변호사가 말한 ‘요지부동’의 의미를 곱씹어보았다. “여자가 남자를 목 눌러 죽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의사의 증언을 증명력이 있다고 인정하고, 살해 현장에서 오 씨의 지문이 안 나온 것은 장갑을 끼고 갔기 때문에(끼고 간 사실은 조사도 안됐고 장갑도 발견 못함) 反證(반증)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강 씨가 말하는 ‘요지부동’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