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에는 '두칼레 팔라초'라는 口자 모양의 장대한 베니스 공화국 정부청사 건물이 있다. 요새같은 건물 속에 내부정원이 있다. 거기서 2층으로 통하는 넓은 계단 위. 여기서 서기 1355년 81세의 국가 원수(도제) 마리노 팔리에로는 금빛 나는 元首帽를 벗기우고 백발의 머리를 잘렸다. 최고의결기구인 10인 위원회의 한 위원이 창 끝으로 머리를 찍어 이 건물의 발코니로 나가 청중들에게 『나라를 배신한 자에게 정의를 구현했다』고 소리쳤다. 元首 이외 11명의 음모자들은 참수형보다 한 등급 낮은 교수형을 당했다.

팔리에로는 해군사령관, 외교관, 검찰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지도자였지만 베니스의 지배층인 귀족층에 불만이 있었다. 도제로 뽑힌 직후 열린 파티에서 한 귀족 아들이 자신의 부인을 모욕했는데도 귀족이란 이유로 처벌을 면하는 데서도 자극을 받았다. 베니스는 그 직전 宿敵 제노바와 海戰을 벌여 패배하기도 하여 민중들의 귀족 지배층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컸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도 점차 군주제로 바뀌고 있었다. 그는 1354년 종신제인 도제로 선출된 직후 민중폭동을 선동하여 이를 빌미로 계엄령을 선포하는 식으로 절대 권력을 장악한 뒤 공화정을 폐지하고 군주제로 바꾸려 했다. 체제변혁을 시도한 것이다. 모의 단계에서 발각되었다.
두칼레 팔라초 건물엔 대회의실이 있는데 歷代 도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팔리에로의 초상화는 떼 버리고 검은 표지판만 있다. 범죄자로 처형된 마리노 팔리에로의 자리라는 설명은 있다. 베니스는 그에게 역사기록에서 이름을 지우는 처벌도 받았다. 19세기 영국 시인 바이런이 그를 소재로 하여 연극을 썼고 드라크로와가 처형을 묘사한 그림을 남겼다.

이 사건은 최고권력자가 민중봉기를 선동, 공화정을 뒤엎으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된 쿠데타 미수였지만 베니스 지배층은 그들의 국헌(國憲)에 대한 도전에 가차 없는 응징을 한 것이다. 국가원수라 해도 용서가 없었다. 베니스 사람들은 1천1백년 동안(서기 697~1797) 독립과 자유를 지켜온 찬란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그들이 쓴 글 속에서는 독립, 자유같은 말들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베니스人들은 구호와 선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인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국가의 독립과 개인의 자유를 추구했던 것이다. 商人이 武人이었던 날이다. 商武국가이다. 귀족들에겐 특권이 부여되었으나 특혜는 없었다. 전쟁엔 늘 앞장섰다. 베니스 사람들은 상업적 이익을 핵심으로 나라를 운영했다. 實利추구를 正義 등 멋진 단어로써 미화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공화정을 피로써 사수(死守)한 것도 베니스人의 삶의 양식을 지탱하는 제도로서의 공화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이 사회주의를 거부하는 것도 한국인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리 형법 93조는 外患罪의 하나인 與敵罪를 다루고 있다. "敵國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抗敵한 죄는 사형에 처한다"

전체 형법 중에서 與敵罪만 오로지 사형만 선고하도록 하고 있다. 국가나 체제를 파괴하는 자는 살인 강도보다도 더 공동체에 危害하기 때문이다. 베니스는 '가장 고요한 공화국'(The most serene republic)이라 불린다. 베니스의 경우, serene을 '고요한' 이라 번역하기보다는 '최고의 주권국가'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맞을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