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눈물 젖은 朴正熙’ ③ - 상반된 면모를 지닌 ‘야무진 少年’
‘급장 朴正熙’는 ‘대추방망이’로 불릴 만큼 냉엄했지만, 옛날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 정도로 순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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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공립보통학교 입학

박정희는 구미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는 1920년에 개교했다. 처음 3년 간은 4년제로 운영하면서 學務官(학무관)들이, 구미 面內(면내)의 가정을 방문해 가며 아이들의 취학을 유도했다. 박정희의 셋째 형 상희도 이 무렵 학교를 다니게 된다. 구미공립보통학교가 정식으로 6년제 학생들을 배출한 것은 1925년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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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다니던 당시의 구미공립보통학교


박정희는 구미공립보통학교에 1926년 4월1일 입학하여 1932년 3월1일자로 졸업했다. 班(반)을 組(조)라 불렀는데, 졸업 때 박정희는 2조였다. 2학년 때까지는 급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는 최우등생을 자동적으로 급장으로 뽑아, 박정희가 졸업할 때까지 급장을 했다.

구미보통학교 1~3학년 때 박정희는 몸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생활기록부에 결석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질병으로 결석한 日數(일수)는 1학년 때 18일, 2학년 때 20일, 3학년 때 16일이었다. 4학년 이후에 건강상태는 좋아져 5학년 때 하루, 6학년 때 사흘만 결석했다. 구미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인 1931년, 박정희 소년의 키는 135.8cm, 몸무게는 30kg, 가슴둘레 66.5cm로 발육상태 평가는 丙(병)이었다. 상당히 작은 체구에 속했다. 박정희는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땅따먹기 놀이를 자주했다고 한다. 작은 조약돌을 손가락으로 튕기고 뼘을 크게 벌려 영토를 차지하는 놀이였다.


급우의 評: “사색하는 태도가 인상 깊어”


그런 박정희에 대한 급우들의 인상은 어떠했을까?
李洛善(이낙선·상공부 장관 역임)은 1962년 자신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육군 소령)로 있을 때 박정희와 관련된 메모 등을 모아놓았다. 일명 ‘박정희 파일’이란 것인데, 여기엔 박정희의 급우들이 그를 評한 자료들이 많았다. 동기생(대구사범 4회) 石光守(석광수·작고·<국제신문> 상무 역임)가 이낙선 소령에게 보낸 편지엔 박정희의 학창시절 인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말이 없고 항상 성난 사람처럼 웃음을 모르고 사색하는 듯한 태도가 인상 깊었다. 동기생 중 누구와 친하게 지냈는지조차 알 수 없다. 5학년 때 검도를 시작하였으므로 크게 기술이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권투는 기숙사에서 그저 연습을 했을 정도이지 도장에는 나가지 않았다. 군악대에 들어가서 나팔수가 되었다. 축구도 잘했고 주로 자신의 心身(심신) 연마에 노력했다. 성적에는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으나 (머리는) 우수한 편이었고,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나팔의 1인자”

동기생 曺增出(조증출·작고·부산 문화방송 사장 역임)이 써 보낸 인물評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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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 부는 박정희 소년(맨 오른쪽)

<대체로 내성적인 편이었고 항상 무엇인가를 구상하고 있는 듯하였으나 外表(외표)하지 않은 관계로 그의 진정한 위인 됨을 파악한 學友(학우)가 희소했다. 다른 학우들은 장차의 이상 및 포부에 대하여 종종 피력하였으나 그는 일절 침묵을 지켜왔고 交友(교우)의 범위도 그다지 넓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검도에는 전교에서 손꼽히는 勇者(용자)로서 방과 후에는 竹劍(죽검)을 들고 연습을 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에 학우들과 장난칠 때도 검도하는 흉내를 내어 머리를 치곤 했다. 나팔의 제1인자로서 큰 버드나무 아래서 하급생들을 데리고 나팔 연습하는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기계 체조도 잘했다. 4~5학년 여름 휴가 때는 대구 80연대에 들어가서 군사 훈련을 받았는데 박정희는 敎鍊(교련)에 매우 취미를 가진 것으로 기억난다. 시범 때 그가 자주 조교로 뽑혀 나왔다. 특히 총검술은 직업군인을 능가할 정도로 우수하였다.>

동기생 張月相(장월상)은 생전에 이런 증언을 남겼다.

<박정희는 어릴 때 몸집이 비록 작았지만 야무진 데가 있어 ‘대추방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체구에 비해 담력이 세고 머리가 비상하여 암기력이 뛰어났습니다. 3학년 때 학예 발표회 연극에서는 노인 역을 맡아 학부형들과 선생님들을 놀라게 해 준 적도 있었습니다.>


옛날 이야기를 구수하게 풀던 소년


동창생 이진수는 교실에서 선생님이 ‘누가 나와서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보라’고 하면 박정희가 자진해서 나와 옛날 이야기를 잘했다고 말한다.

<박정희가 이야기하면 아이들이 다 재미있어 했어요. 꼭 나이 많은 어른들이 해주시는 것 같았으니까요. 이렇게 합니다. ‘옛날에 말이지, 서당 훈장이 꿀을 감춰두고 아이들에게는 이걸 먹으면 죽는다고 했거든. 그라고는 혼자서 조금씩 먹는기라. 하루는 훈장이 밖에 나갔다 오는 사이에 아이들이 꿀단지를 꺼내 실컷 퍼묵은기라. 얼마나 맛있겠노. 손가락으로 꿀을 찍어 쏙쏙 빨아 묵고 하다가 보이 다 묵어뿌릿는기라. 인자 큰일이 날낀데 우야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구수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진수(경북 구미시 송정동 鄕長)는 박정희가 급장을 ‘야무지게’ 했다고 기억한다.

<아침 조례를 할 때면 급장인 박정희가 일어나 ‘기오츠케(차렷)’, ‘센세이니 게이레이(선생님께 경례)!’라고 구령을 붙이지요. 구령만은 일본 말을 썼지만 그 밖에는 우리말을 썼습니다. 공부도 잘했지만 예쁘게 생겨 선생님들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았지요.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면 대답을 가장 많이 하는 친구가 박정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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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보통학교 시절의 단체 사진. 세 번째 줄 맨 오른쪽이 박정희이다.



별명이 ‘악바리’, ‘대추방망이’

동기생 朴升鏞(박승용)도 박정희 소년을 비슷하게 회고한다.

<돌이켜 보면 박정희는 귀엽고 예쁘게 생긴 친구였지요. 그런데도 학교 다닐 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성품이 몹시 독한 데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별명이 ‘악바리’, ‘대추방망이’였지만 함부로 그렇게 부르지도 못했어요. 공부도 잘했고 해서 아이들이 그를 두려워했던 겁니다. 일본인 교사들도 그를 귀여워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박정희가 급장을 지냈던 3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급우들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 정도였습니다. 동급생들보다 키가 작았던 박정희는 겁도 없이 말 안 듣는 아이들이 있으면 체구나 나이가 위인데도 뺨을 후려 갈겼어요. 반에서 가장 키가 컸던 권해도는 박정희보다 한 뼘 이상 키 차이가 났고 장가까지 들었는데 교실에서 뺨을 맞아야 했습니다.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보듯이 權(권) 군의 뺨을 때리던 박정희의 모습을 생각하니 지금은 웃음이 나와요. 늘 냉엄한 표정인 정희에 대해서 아이들은 가까이하기를 어려워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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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난
[ 2015-06-17, 17:52 ] 조회수 : 30092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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