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비참할 때의 朴正熙를 곁에서 지켜본 한 여인의 證言
눈물 젖은 朴正熙’(1)동거녀의 생전 肉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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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돌아가시지 못한 게 마음 아파요.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내가 너무 했다는 생각이야. 표현을 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명복을 빌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옛날 추억이 자꾸 생각났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지요. 미안하다는 생각뿐이야. 지금은 지극히 사랑해 줬던 사람이니 극락세계에 갔으면 하고 생각하지요.”

● 편집자 注: 아래 글은 조갑제닷컴 刊 《李龍文- 젊은 거인의 초상》(趙甲濟 著)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李 女人의 육성 증언: “나와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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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동거한 이화여대 출신 이현란의 사진(앞줄
맨 왼쪽). 박정희가 肅軍 수사를 받고 살아나온 직후
그의 용산 관사 현관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앞줄 가운데는 박정희의 바로 윗 누님 박재희 씨,
그 오른쪽이 박정희다. 수사를 받고 나온 직후라
박정희의 모습이 다소 초췌해 보인다.

1988년, 박정희의 두 번째 동거녀였던 李 씨는 할머니가 돼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작은 식품가게를 꾸려가면서, 며느리도 보았고, 비교적 담담하게 과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세파를 겪었다. 자유기고가 강인옥 씨가 李 여인과 만나 들은 이야기를 녹음상태 그대로, 될 수 있는 대로 손질을 하지 않고 여기에 소개한다. 이것은 인간 박정희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데 역사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이효 씨가 들러리를 서달라고 권유했어. 그때 그(박정희)는 대위였지. 토, 일요일은 미션 계통의 학교라서 이틀간 휴학을 하게 되는데, 토요일 오후 이효 씨가 자꾸 나가자고 해서 명동 삼호정이라는 곳에서 식사를 하게 됐는데, 자기네는 미리 준비했는지 여럿이 나와 있었어요. 윤태일, 이한림, 이주일, 이효 씨 부인 등 8명이 들어가 앉았는데 수줍고 해서, 구석에서 대꾸도 못했어. 식사 후 미스터 朴이 소개됐고….

그때 나는 전성기였지. 이화여대 다닙네 하고 포부도 크고 했지. 키도 조그만 양반이 볼품도 없고, 일본 육사 나왔다는데 박력이나 기품은 있었어요. 그는 일요일마다 기숙사로 나를 찾아왔어요. 나는 그때 있는 돈도 없애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북쪽에서 안 나오고 나 혼자 있을 때였기에….

다른 친구는 이성에 대해 생각할 나이이지만 난 못했어. 만나자면 만나고 데리고 나가서 사주고. 이효 씨 부인이 와서 약혼하자고 해요. 그때는 부모님도 없고 돈도 떨어져 가고 의지할 데가 필요했어요. 방학 때(두달) 돈 좀 벌어야 되는데, 그이가 학비 7500원을 대준다고 했는데 나는 책 구입과 모양내기를 좋아했어요. 깨끗하게 차려입는 것을 나는 중요하게 생각했어.

그런 형편에 침착하고, 나에게 잘하니까 역시 여자이므로 끌렸어요. 당시 미스터 박은 태릉 육사의 제2중대장이었는데, 약혼식은 성대히 했지요. 24세 때 만나 27세 되던 해(1950년) 2월 6일에 떠났습니다.

한마디로 남편이 좀 더 좋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맘이 있었는데, 양쪽이 다 부추겨 옷도 다 못 입은 채 끌려갔지요.

화장도 안한 상태였고, 우리 친구들도 하나도 몰랐어. 지금은 독일에 간 친구 하나만 참석하게 됐는데 나는 같이 가려고 한 게 아니고 피아노책 구입하려고 기숙사서 나오는데 미스터 박이 ‘이의 없죠?’ 하길래 부끄러워 대답 못했는데 그것이 응한 걸로 됐어요. 가보니 여러 사람이 와 있었어요.

명동의 그 한식집 간판도 못 봤을 지경이었죠. 너무 당황해서 말입니다. 걔(친구)는 내가 마음의 준비가 있었던 줄 알았나봐. 미스터 박이 방을 준비했다 해서 합치게 됐지. 용산 관사에 간 지 얼마 안 있다가 며칠 후 숙군(肅軍) 대상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누가 연락해 줬어요. 밥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효 대위가 술에 취해 왔어요. 놀란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잡고 내가 어리고 수줍어하니 돈을 얼마 줬지요. ‘당분간 기다려라. 갑자기 출장갔다’고 합디다. 그랬으면 아래채로 전화했거나 인편으로 메모가 왔을 것인데 밤새 생각하니 이상했어요. 근처 강문봉 대령 부인에게 찾아가니 ‘몰랐느냐’고 남편을 불러 알려 줍디다.”


“당신 사랑하기 때문에 도망가지 않았소”

“너무 기가 막혀. 지금도 가슴 떨릴 정도로 쇼크 받았어요. 많은 사람이 관사에 왔다 갔다 했어요. 나이는 어리고 의지할 데가 없어 나는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이북서 공산당이 싫어서 내려왔는데 빨갱이 마누라라니. 얼마 후 김창룡(金昌龍)이가 왔어요. 경위를 설명하고 미스터 朴이 메모를 주라고 하더라면서 건네줍디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이것 하나만 믿어 주라. 7기생의 육사 졸업식에 간다고 면도도 하고 아침에 국방부에 출근하니 어떤 사람이 귀띔해 주더라. 내가 얼마든지 차타고 도피할 수 있었는데, ○○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 갔다. 이건 나한테 얼마나 불리한 줄 아나?’

한 여인 때문에 안 갔다니… 그러나 난 괘씸했어요.

그것까진 또 괜찮아. 고향에서 박재석(둘째 형) 아들이 고춧가루 등을 갖고 왔어. 재옥이 엄마가 알까봐 서대문형무소도 못 다니게 해.

그때 같이 온 사람이 박영옥의 아버지가 이전에 좋아했던 여자인데 그 여자가 집 알려 주러 같이 왔다고 해요. 그녀가 입이 가벼워 ‘이렇게 참한 색시가 어쩌나’하고….

재옥 어머니는 인물이 좋았대요. 재옥을 맡기고 피신했어요. 영옥의 집에. 그때는 본인들이 없으면 이혼이 안 돼요. 미스터 박이 초조해 재옥 엄마를 찾았으나 결국은 행방이 묘연하여 나 몰래 이혼수속을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난 배신감으로 용서가 안됐어요.

미스터 박은 나한테 무척 잘했어요. 이만한 나이에 보는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은데, 그때는 이제 죽어도 여한은 없겠다 싶을 정도로 잘해줬어요. 그게 고마웠어요. 괘씸한 생각도 들고 해서 가출을 여러 번 했어요. 그때마다 잡혀오고….

그 당시 바보는 아니었나 봐요. 남한테 손가락 받는 생활은 하기 싫다고 했으니.

나를 알기 전에 왜 이혼처리를 못했나 이거지. 암암리에 얼마나 노력했는지 몰라요. 저 사람이 국방장관 재목감은 된다고 생각했지. 남편복은 있나 봐. 지금 남편도 세상없이 잘 해줘. 그러니 이렇게 고생해도 깨끗이 잊고 살았지. 한 가지, 이 스캔들이 이제야 문제될지 몰랐어요. 두 달 사이 5kg이나 빠져 큰일 났지. 이제 무슨 망신이야. 10년 전이면 약이나 먹고 죽었지. 나는 그때 사흘이 멀다 하고 집은 나가고, 관사 사택 고개만 넘으면 속이 후련해 날개가 돋는 기분이었어.

부부싸움은 없었어요. 내가 나이가 어려도 ‘식사하쇼…’하고 꼭 존대해 줍디다. 인격 있고 무게 있고 말이 없고.

‘내가 말이 없어 재미없지’라고 하기도 했어요. ‘말이 핀 꽃에 열매가 없다’고 나는 말하기도 했답니다. 조금도 낯붉힌 적은 없었어요. 술을 노상 마셔도 정신은 말짱해.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집에서는 그래도 술 안 마셨어요. 내가 싫어하니깐. 술 한상이라도 우리집서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누가 오기만 하면 벽장에 숨어 다른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어요. 서로 다칠까봐 했던 때니깐.

이효 씨의 소개받고 그 이듬해에 약혼하고 그 이듬해 이듬해 2월 6일에 가출하여 결별했으니, 집 나오면 그이가 찾아내고, 나중에는 그이도 지치는지 잘 안 찾았어요. 그해 6월 사변 때에 지금 남편을 만났어요. 모 고교에서 교편 잡고 있었지요. 친구 오빠가 그 학교 서무과장으로 있었는데 술 한 잔 안 먹는 착실한 사람이라고 소개했어요.

마음 흐트러질까 봐 자꾸 소개했어요. 그분은 총각이었고. 거절하려고 다방에서 만났는데 프로포즈 했어요. 나는 과거가 있으니 단념하라고 했어요. 남자고 여자고 깨끗하게 단념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리고 나는 영등포 모 여고에서 시간 강사(생물학)도 조금 하고, 그 남자도 영등포에 있는 고교로 직접 찾아오고… 순진하고 거짓이 조금도 없는 남자이고 진실하고. 내가 참 잘 봤다고 생각했지요. 나는 과거가 있고 맘 좀 식힌 뒤에 결혼할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약혼하라고 해서 약혼 때 되어 또 거절했어요. 그러던 차 6·25사변이 났는데 그 전에 영화 두 편 같이 본 정도지, 6·25 날 영등포 당산동 하숙집에 나를 찾아와 피난 가자고 데리러 왔어요. 강제로 피난 보따리 싸갖고 둘이서 대구로 피난 가 거기서 결혼했어.

큰아들을 거기서 잉태하고 대구서 낳고. 남편은 경북 의성에서 교사로 있다가 서울로 올라왔어요. 교장, 부교장 패로 갈려 있던 교육현실이었는데 그때 교장편이었는데 교장이 암으로 돌아가 교직 사표를 내고 사업을 시작하여 부동산 투기로 돈을 잘 벌었어요. 그러다가 부도가 나 4년 전 이 일을 시작했는데 지방에 납품하는 것인데 봉고차로 합니다. 우리 물품은 하이클래스예요. 말이 돼지머리라서 기분이 그렇지 고급제품이야. 공장에 직원이 둘, 양념 만들랴 바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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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에 보존되어 있는 이현란의 학적부 '보증인란'. 보증인란에 박정희의 이름이 적혀 있고, 관계는
숙형(淑兄·사모할 淑에 나이 많을 兄을 써 '사모하는 사람'으로 풀이됨)이라고 되어 있다.



“마음이 돌아서질 않아서…”

“한마디로 그 사람은 독해요. 그 뒤 대통령이 된 뒤에도 보면 독해. 일본 교육 받은 탓인지… 그러나 다감(多感)한 분이었습니다. 내가 이왕 남이 될 바에야 너무 거만 떨었고 쌀쌀했어요. 대통령이 될 줄 알았으면 덜 쌀쌀했을 걸. 사람들은 내 심정을 몰라요. 그분도 신사적이었고 여자를 접촉하는 과정에서도 여자 기분 맞춰줘요. 철두철미 여자에게 그 이상 다정다감할 수 없어요. 내가 이남에 먼저 나온 다음에 성준이 동생이 나왔어요. 미스터 박이 정보국에 있을 때 남동생이 (박정희를) 찾아와 내가 일본으로 간 줄 알았다고 하더랍니다. 정보 제2과로 젊은 학생이 오더니 ‘당신이 박정희요?’라고 했다고 미스터 박이 나에게 섭섭하다고 합디다.

약혼식 소식을 친정에 안 전했어요. 창피해 안 알렸지요. 그게 다 나이가 어린 탓이었지. 왜 그렇게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섰는지 몰라. 손님 한 사람만 와도 벽장에 숨었으니 그게 얼마나 우스운 일이야.

이화여전 다닐 때는 나이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아이가 둘인 학생도 있었고, 남들은 결혼해서들 다니는데 그러지 못한다고 박 씨는 섭섭해해. 그이는 분해서(?) 쩔쩔매기도 했어요. 그러니 맹꽁이지. 자기 말대로 여자 앞에서는 약했나봐. 이대 김○○ 교수가 청계천 근처서 살았는데 날더러 와 있으라고 하고 부인도 친절하고, 그때 한번 기숙사에 들어가는 게 소원이라고 하고 자꾸 튀어 나가려고 하니 미스터 박이 2학년 1학기 등록금을 내줬지요.

그런데 다니지 않았지요. 1학년 1학기 등록금은 교장선생이 댔고, 2학기는 벌어서 댔고. 미스터 박이 등록금 내준 건 알지도 못했어요.

내가 어떤 소령하고 약혼했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창피해 못 다니겠어요. 가을에 입학한 것이 잘못된 것이야. 처음엔 동국대에 시험 쳤어요. 여학생은 별로 없고 별로 좋은 여학생도 없고, 숙대는 합격했고, 친구는 서울대, 나는 이대(梨大)로 가자고 해서 이대 시험 쳤어요.

봄에 입학해서 여름방학 때는 가정교사로 아르바이트하고, 을지로 2가에 있는 부잣집에 한병화와 같이 그 집 아이(다섯살짜리)의 가정교사를 했고 선을 봤지요. 그 이듬해 봄·여름 지낸 뒤 그해 겨울에 약혼하고.

방학하기 직전으로 기억되는데, 그때 눈이 조금 왔는데 1학년 겨울에 선보고 사귀다가 학비문제로 학교를 중단했어요. 일 년만 더 다니면 됐을텐데. 등록금 안 내고 시험만 쳐도 됐지. 돈보다는 내가 맹꽁이라 중단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다지 맹꽁이었는지. 지프차 타고 자주 와도 숨길 많이 했어요. 햇수로는 3년이지만 8개월만 살았어요. 트럭으로 가출했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그래서 낭설이 날까 봐 있는 얘기를 그대로 하는 거야.

1950년 2월 6일에 (집 나간다는) 메모를 밤에 써놓고 미스터 박은 홀에서 공부한답시고 페치카에 불을 때고 관사는 하이클래스야. 의자로 홀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잠잘 때인데 몰래 나왔어. 남자가 부화가 나서 살겠어? 미스터 박은 술 먹고 자고 있었고 내 몸 하나 빠져 나왔지요. 편지에는 ‘그동안 고마웠고 맘이 돌아서질 않으니 날 찾지 말고, 날 찾으면 투신자살할 것’이라고 썼어요. 시장서 고향 아줌마를 만나 ‘지금 남자는 결혼경력이 있고 거기다가 빨갱이니’하고 푸념을 했습니다. 그 아줌마는 ‘그냥 살지, 여자가 뭐…’라고 했어요.

그래도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영리하긴 해서 요리조리 피해 다녔죠. 고향 부인네 집에서 살았는데, 사변만 안 나도 내 인생이 바뀌는 건데… 가출은 수도 없이 했고…. ○○이든 ○○이든 관사에 발 디딘 사람은 없었어요. 식구들하고 다시 상봉한 건 6·25사변 나고, 의성서 안동시장서 고향사람들 만났는데 친정 식구들이 다 내려왔다고 해요. 첫애 뱄을 때인데 너무 맘이 외롭고 고생도 컸지요.

날개 달고 날아가고 싶었어요. ‘연락해 달라’고 내 소재를 적어 줬지요. ○○이가 내려와 상봉했어요. 내가 첫애를 낳고 20일이 됐는데 식구들은 을지로 2가에….

아버지는 인물이 좋아 장개석과 알고 지내기도 했지요. ○○이가 호적에 빠진 것은 요전에 알았지요. 별 뜻은 없어요. ○○이가 사변 때 전라도에서 약혼했어요. 그 당시 서울에 없어 호적에 빠졌는데 요전에 알았지요. 미스터 박과 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모양인데, 아이를 가질 시간이 없었어요. 나도 약은 여자야. 벽장에 숨어 있으면 그까짓 여자가 없어서 그러느냐고 미스터 박의 동료들이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난 못마땅했어.”


“가출 후 내가 전화, 비열한 짓 말라고.'

“가출 후 내가 전화했어. 非신사적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한 20일 뒤에 내가 교만하다느니 못됐다느니 했다는 소문이 들렸어. 내 성질이 어떤데. 내가 술집에서 일했다는 건 말도 안 돼. 길에서 지프차를 타고 오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피난 시절). 대구인데 임신 2개월쯤 됐을 때, 내가 모양내고 원피스 입고 싹 빼고 가는데 지프차의 빵빵대는 소리가 들려요. 사변통에 월북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돌아다보고 깜짝 놀랐어요.

朴 씨가 내리려고 해서 나 살려라 하고 뛰었지요. 마침 트럭이 지나가서 만나지 못했어요.

우리 영감님도 한번 스캔들이 있었던 건 알지만, 그 대상이 누군지는 몰라. 며느리 앞에 이게 무슨 볼썽사나운 일이야. 요즘 잠 못 자요. 그때 속은 게 분하기도 하고, 내가 애 낳을 새가 어디 있어? 차라리 애가 있으면 붙잡혀 못 나왔을 거야. 그 사람이 얼마나 독한 사람인데. 미스터 박은 방에 누워 책으로 얼굴을 덮고는 연설 연습을 하고….

독일의 히틀러가 영웅이라고 하더군. 독재자지만 난사람이라고. 그 사람보고 더는 몰라도 국방장관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아무리 애써도 마음이 돌아서질 않는거야. 그는 요만큼을 가도 데려가려고 하는 거야. 화장실에 오래 있어도 들여다봐. 어디 갈까봐. 땅을 치고 울기도 많이 했어요.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에 지금 내가 이러고 사는지도 몰라. 연분이 아니었지.

친구들이 놀려 ‘그때 좀 참지. 잘났다고 하더니 돼지머리기름 장사 하니?’ 한마디로 내가 너무 쌀쌀맞았어.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내가 애정이 있을 때도 쌀쌀맞았어요. 날 놓아 달라고 자꾸 그러니 울더라고요. 여자(本妻) 하나 있었던 것도 몰랐는데 애까지 내게 입적한다는데 천길 만길 뛰겠더라고. 팔자인가봐. 그가 대통령이 되고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어쩌면 그런지. 그냥 대통령이지. 그게 괴로웠으면 내가 쪼글쪼글 늙었을거야. 68kg 나갔었던 적도 있어. 3개월 전에 피곤이 누적돼 아팠지만서두….

한번 야유회 간 적은 있지요. 엄정자라는 친구와 같이 갔는데. 우리 아이들도 성격 강해요. 생각도 많이 하고 참기도 많이 참으며 길렀어요. 언젠가 길에서 그 엄정자를 만났는데 야유회 사진을 갖고 있다고 합디다. 태릉에 그 과의 사람만 놀러 갔다는데, 가서 말 한마디 없이 있다가 왔는데 곤색에 흰색 칼라의 옷, 그때 귀엽다고들 했지요. 몇 해 전 편도선이 급성이 돼 수술하고 그래 얼굴이 지금처럼 찌그러졌어요. 지금 생각하면 미안한 감이 있고 고인(故人)이 되니깐 더 미안해요.

내 얘기 나와서 陸 여사가 재떨이로 맞기도 했대요. 내 소식을 상당히 궁금해 했다는 겁니다.

박 대통령께 편지 써라 했다는 것은 모르는 얘기고, 동생 ○○이가 기자라 그이가 춘천에 있을 때 만났어요. 나는 ‘가자미 덴뿌라’를 좋아했는데 그이가 ‘가자미 덴뿌라’를 하도록 하더니 ○○이 보고 ‘맛있지? 나도 이것 좋아하는데 누님도 좋아했지’했다고 전해 줍디다.

대통령 되기 직전에 그이가 못잊어 하고 있다는 걸 알고 미안하기도 했어요. 나이 먹으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미스터 박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시골에 따라갔지요. 6월 사변나기 전인데 산소에 갔더니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오는 곳이야. ‘대학생 제수씨’ 온다고 서울 멋쟁이라고 광목에 물들여 옷들 해 입고 떡 해준다고 방아 찧고. 미스터 박의 누나 박재희는 없었고, 결혼했다는 얘기는 그때까지 몰랐어요. 알고는 얼굴 쳐들고 어떻게 가요. 나는 분해서 화장실에도 쫓아가고 하룻밤 자고 부랴부랴 서울로 왔지요. 박 대통령 돌아가던 날도 밥도 한 그릇 더 먹었어요.

내 친구가 전화를 걸어 왔는데 저녁을 먹고 숟갈 놓을 때에, ‘너 참 독하구나’고 해. 곱게 돌아가시지 못한 게 마음 아파요.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내가 너무 했다는 생각이야. 표현을 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명복을 빌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옛날 추억이 자꾸 생각났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지요. 미안하다는 생각뿐이야. 지금은 지극히 사랑해 줬던 사람이니 극락세계에 갔으면 하고 생각하지요.”

이 기사를 퍼갈 경우 'chogabje.com'이라고 밝히고 인터넷 링크가 가능하도록 해주세요.
[ 2016-06-27, 13:4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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