康宗憲(강종헌)의 자서전은 한 인간이, 젊었을 때의 미숙함 때문에 빠졌던 잘못된 선택을 끝까지 고집, 집착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특히 스스로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혁명가’들이 어떻게 거짓말과 억지를 부리는지를 보게 된다.
康의 자서전 《사형대로부터 교단으로》는 한 마디로 정직하지 못하다. 혁명을 꿈꾸며 母國유학 길에 오르면서 정체를 감추려고 시작한 거짓말이, 시간이 흐르면서 더 큰 거짓말로 발전되고 얽히게 되니 앞뒤가 맞을 리가 없다. 딱할 정도로 지리멸렬한 거짓말이다.
목적(혁명)을 위해서는 온갖 수단 방법이 정당화 된다고 믿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거짓말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적 투쟁 방법일지 모른다. 때마침 강종헌이 김일성에게 노래를 지어서 바쳤었는지를 두고 康 자신은 이를 부인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그 답이 자서전 속에 있다.
 
강종헌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자신은 작사, 작곡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는데, 그런 그가 자서전에서는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작사·작곡한 노래를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康은 1979년 들어 혹시 사형 당할 것에 대비하여 “(자신이) 파쇼 정권의 희생이 될지 모르지만, 민주화와 조국통일의 날은 반드시 온다”는 심경을 한 편의 詩(유언)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곡을 붙여서 1979년 4월19일 경 완성시킨 것이 “그 날이 온다”라는 노래라고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강종헌은 마침 구치소의 옆방에 있었던 朴炯圭(박형규) 목사에게 이 노래를 배우게 하여 朴 목사가 출소하는 편에 노래를 가족에게 전했다고 한다. 강종헌의 영향을 받은 박형규 목사는 이후 각종 집회 때 ‘在日(재일)한국인 정치범’ 석방을 호소하면서 이 노래를 보급시켰다고 한다(자서전 90, 120쪽에 가사 전문 소개).
이하, 강종헌이 체포된 후의 법정투쟁과 옥중 생활을 그린 자서전 중에서 금방 눈에 띄는 중요한 거짓말과 평양에 대한 충성심을 소개한다.
강종헌은 무슨 연유인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박형규·문익환 등 극히 일부 인사만을 예외적으로 이름을 밝힐 뿐, 수감 중의 동료나 접촉한 모든 사람의 이름은 이니셜로만 표기하고 있다. 그가 강조하듯 수감된 인사들이 정말 순수하고 떳떳한 ‘민주화 운동’을 했다면 이름을 밝히지 못할 이유가 없다. 혹은 조직 보안을 생명으로 삼는 비밀공작원으로서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감추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
 
강종헌은 자서전의 앞부분에서 서울대 의대의 비공개 서클이었던 ‘社醫硏’(사의연)이 이념서클임을 명시하고도, 법정 투쟁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경도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同 57쪽). 康은 고교 시절부터 민족의 구성요소로서 민중적 관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고 하면서도, 어떤 사람을 통해, 혹은 어떠한 책을 읽으며 형성된 생각인지 그 동기와 과정 등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조직체인 조총련을 만나서 책을 빌려 본 것은 동포청년으로서 단순한 인간적인 親交(친교)였다고 강변하고 있다(同 61쪽).
그는 수감생활 중의 추위와 배고픔 등은 자세하게 기술하면서, 놀랍게도 자신이 북한공작원으로 단죄되었던 가장 핵심적 사안인 密入北에 관한 반론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북한 공작선을 타고 밀입북한 것이 고문에 못이긴 허위 자백이었다면 자서전에서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마땅한데, 再審(재심)까지 청구한 ‘조작된 억울한 사연’에 대해 자서전에서는 반론을 전혀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상식적으로는, ‘파쇼 정권’이 자신을 북한 공작원으로 규정하여 사형을 언도한 밀입북과 밀봉교육이 전혀 근거 없는 날조라고 한다면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반론하고 알리바이를 주장하는 것이 자서전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 될 텐데, 왜 그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민주화 운동가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모처럼의 자서전에서 자기 변호를 포기한 것일까?
그가 13년간의 수감 기간을 기록한 큰 줄거리는, 구치소에서의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사형수로서 수갑을 차고 지낸 육체적 고통을 다룬 부분, 그 외에는 ‘정치범답게’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나름대로의 옥중 투쟁과 內外(내외) 정세 분석이 주 내용이다. ‘옥중 투쟁’을 기록한 대목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역시 그가 전형적인 외골수 공작원이라는 것과, 그리고 신념을 위해 지어내는 거짓말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부닥치는 모순들이다.
康은 재판(제1심) 중에는 왜 과감한 법정투쟁을 전개하지 않았었나 창피스럽게 생각했다(同 69쪽)고 했으나, 자신은 민주화 운동에 공감하는 참가자의 한 명에 불과했다(同 70쪽)고 방황한다. 1심 최후 진술에서 “나는 결코 북조선 간첩은 아니다.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한 사람의 在日한국인 청년으로서 모국의 젊은이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박한 심정에서 유학을 결심했다. 學友(학우)들을 고문에 의한 자백으로 간첩사건에 끌어들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反共(반공)선전이다라는 내용을 더듬거리는 말로 진술”했다(同 72쪽).
그러나 이는 이후의 수감생활을 기술한 부분과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거짓말이다. 그는 면회 온 모친에게 “어머니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주변 사람들과 나라를 사랑하는 생각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同 76쪽)라고 기술하고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생각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雜居監房(잡거감방)에서 한국 사회의 모순과 민주화와 통일 필요성을 ‘이론정연’하게 이야기해도 잡범들이 상대해주지 않았다(同 80쪽)라고, 구치소에서부터 수감자들에게 사상교양사업을 시도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反共교육을 받아 온 少年犯(소년범)을 보면서 암울한 기분이 되었다(同 83쪽)고 기술한 부분은, 그가 주장하는 ‘민주화’가 容共(용공)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학생 신분으로 구속된 나에겐 사회생활 체험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잡거감방 생활에서는 실수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실수(*사상교양 시도?)가 큰 문제로 발전되지 않았던 것은, 이 ‘가방 끈이 짧은’ 사람들에게 보호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同 84~85쪽)라고 민중계급을 강조하고 있다. 도대체 스스로 사회생활 경험이 전혀 없다고 고백하는 젊은이가, 어떻게 한국 사회의 모순을 이론정연하게 한국인들(학우들과 재소자들)에게 설명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그가 모국으로 유학 오기 이전에 한국 사회에 대해 철저하게 관념적 학습을 받았음을 실토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국내의 反독재 민주화 운동은 어디까지나 國是(국시, 反共)을 전제로 한 운동이었다. 우리들은 그 범위를 넘어서 북조선의 정권 승인과 평화 공존, 남북의 두 체제에 의한 연방제 통일이라는 志向性(지향성)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赤化(적화)통일이 불가능하듯이 反共통일이나 北進(북진)통일도 비현실적인 구호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점은 아무리 고문당하고 사형 판결을 받아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同 86쪽). 그가 목숨을 걸고 反共과 싸우는 것은 그가 북한공작원이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康은 감옥 속에서도 외부의 소식을 잘 접하고 있었다. 아니, 그가 자서전에 기록한 것은 출소하여 일본으로 돌아온 후에 들을 것을 정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총으로 권력을 잡을 자는 백성(민중)에 의해 멸망한다.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다. 그 배경이 된 민중봉기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동 92쪽).”
“1980년5월18일부터 5월27일까지 10일간 계엄군의 무자비한 살육에 대항하여 광주의 민중은 무기를 들고 市民軍을 조직하여 싸웠다(同 93쪽).”
“정부는 광주 시민의 싸움을 ‘폭동’이라고 부르고, 어용신문은 ‘북조선 간첩이 이면에서 선동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27일 미명에 공정여단(공수부대)의 일제 공격을 받아 도청의 시민軍은 제압됩니다. 항쟁 기간 동안 정부가 확인한 사망자만도 200명을 넘는 규모입니다. 광주의 민중은 투항하여 ‘폭도’ 로서 살아남기보다 ‘市民軍’ 으로서 최후까지 싸워 민주화 운동의 大義와 역사 속에 기억되는 길을 택했습니다(同 94쪽).”
“광주의 市民軍(시민군)을 제압한 공정여단(공수부대)는 주한미군사령관의 허가가 없으면 이동할 수 없습니다. 美 정부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이 아니라, 이를 탄압하는 계엄군을 지지한 것은 한국의 민주주의세력에 충격과 각성을 가져왔습니다. 그 이후, 아시아에서 굴지의 親美 국가였던 한국에서 反美 운동이 각지에서 전개되게 됩니다. 美 문화원에 대한 습격사건 등이 발생하고 이에 대해 국가보안법이 적용됩니다(同 105~106쪽).”
명색이 박사학위를 가진 대학교원이라면 광주 사태를 이처럼 왜곡할 수는 없다. 5월27일 광주에 들어간 부대는 공수부대가 아니라 20사단이었다. 주한미군이 공수부대의 이동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쯤을 일본에서 살고 있는 강종헌이 모를 리 없다. 강종헌이 이처럼 쓴 것은 그것이 광주사태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 기록이어서 이를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강종헌은 5共에 대해 ‘어용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간접선거를 비웃고 비판하면서도, 자서전 전체를 통틀어 북한의 독재체제는 단 한 번도 비판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지식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상식과 균형감각이 있다면, 소위 ‘사회주의 헌법’ 위에 노동당 규약이 있고, 노동당 위에 수령과 수령의 교시(말씀)이 존재하는 北을 맹목적으로 조국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康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후, 대부분 無期囚(무기수)인 “조국통일 사명을 띠고 北에서 南으로 파견된 사람들”과 함께 지낸다.
“이들은 조선노동당원으로서의 긍지와 신념을 지키는 ‘비전향 장기수’이다. 사상과 신조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반공국가에서 비전향 장기수의 옥중 생활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것이었다”, “본격적인 옥중 생활이 시작되면서 이웃 감방의 (비전향 장기수인) K씨와 S씨가 장기수용생활에 적응하는 요령을 가르쳐주었다(同 104~105쪽)”
그러나 자서전 속에서 비전향 장기수 들의 옥중생활이 어떻게 목숨을 건 것이었는지는 전혀 기술이 없다. 실상은 반대였다.
“교도소 내의 대우는 당국과 수용자들의 힘의 관계에서 결정됩니다. 전투적인 청년학생이 다수를 차지하는 獄舍(감방)에서는 당국도 어떻게 대우하면 좋을지 머리를 싸매게 됩니다 … 그래서 정치범들에게 어느 정도의 생활 조건을 용인하여 ‘평화공존’을 꾀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정 덕분에 1982년 여름과 가을은 청년학생과 함께 ‘쾌적한’ 옥중생활을 보냈습니다. 매일 두 시간 정도 실외에서 운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생활도 길게는 계속되지 않았습니다(同 106쪽).”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2년 반 후인 1984년 8월15일, 광복절 특사로 강종헌은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되고 다음해인 1985년 7월에 대구교도소로 이감되는데, 여기서 처우 개선을 내걸고 옥중투쟁을 전개한다.
“7월31일, (재일동포간첩 L 등과 함께) 저녁식사를 거부하고 알루미늄 식기로 쇠창살을 두드리면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비상사태가 되어 간수들이 달려왔습니다… 우리들도 옥중에서 항의 단식투쟁에 들어갔기 때문에 수일간의 대치를 거쳐 교도소 당국과 합의가 성립되었습니다. 이처럼 큰 고통을 대가를 지불하기는 했으나 대구교도소에서의 처우개선을 쟁취했습니다(同 109, 111쪽).”
“노태우 정권은 국경일을 기하여 정치범을 단계적으로 석방했습니다”, “나도 다음번에 내 차례가 되는가 라고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잘 아는 간수가 미리 가석방을 (몰래) 알려 주었습니다(동 118쪽)” 이는 교도소의 교도관들 일부가 좌익 수감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분위기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1988년 12월21일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절차가 남아있었습니다. 가석방이기 때문에 ‘출소 후엔 國法(국법)을 준수하겠다’는 취지의 서류에 서명했습니다(同 119쪽).”
 
國法 준수 서약서를 쓰고도 法을 지키지 않는 체제 파괴적 假釋放者(가석방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들이 국법을 준수할 리가 없음을 알면서도 정치적 필요 때문에 서약서만 받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세력들을 가석방하는 정부의 행태가 반복되는 한, 대한민국은 법치국가가 될 수 없다.
강종헌은 수감 중에 박형규, 문익환 목사 등과 인맥이 만들어지고 그들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게 된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력’은 자신들이 북한 공작원을 비호하여 그 惡의 씨앗을 보호하고 키워온 것을 자각하고 있을까?
참고로 소위 ‘在日한국인 정치범’ 석방을 위한 다양한 정치공작에 영향 받아 이를 지원한 일본 사회의 ‘유지들’ 중에는 당시의 자민당 정권 요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본 정부를 통해 한국에 은밀하고 집요한 압력을 가해왔다. 조총련의 對日(대일) 공작의 성공사례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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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조사위원회’가 작성한 ‘재일동포 강종헌에 대한 간첩조작 의혹 사건’ 조사 보고서 일부 발췌>
2) 강종헌의 찬양 고무ㆍ간첩행위 관련 판단
가) 판결기재사항
이 사건 판결문에 따르면, 강종헌은 ‘1969. 고교재학시부터 1971. 2 모국유학시까지 재일지도원 김영일, 기무라, 기하라, 하시모도, 다까하시 등에게 주체사상 등 교양을 받고 포섭되어, 하시모도, 기하라, 노무라 및 성명미상의 지도원 등과 회합하고, 김일성 찬가를 작사ㆍ작곡 제공하여 북한의 노동신문에 게재 고무ㆍ찬양하고, 서울대학교내에 통일혁명당 지부건설 등의 지령을 받아 서광태, 황혜헌 등을 통해 시도하고, 박종렬을 통해 대군사업을 시도하고, 의과대학 사회의학연구회원을 중심으로 이우재의 논문 등을 통해 사회주의 및 주체사상을 교양하고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일본신문에 게제된 김대중 연설문 등을 통해 북한을 고무 찬양하고, 서울대생의 시위 현황, 동아일보 기사, 학원내의 써클 활동, 전방시찰시 군부대현황, 등 국가기밀을 수집하여, 재일지도원에게 탐지수집한 기밀을 제공하고, 지령․금품을 수수한 후 수차에 걸쳐 지령을 수행할 목적으로 잠입하였다’는 것이다.
나) 기록 검토
판결에 따르면, 강종헌은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를 작사ㆍ작곡하여 김일성 회갑 축하 선물로 북한에 전달하였다는 것으로, 법원은 수사기관이나 검찰에서 강종헌이 상기 노래를 작사 작곡하여 북한에 전달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피고인의 법정자백에 근거해 사실로 인정하였다.
그런데 강종헌은 위원회 조사에서 “나는 작사ㆍ작곡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북한에 그런 내용의 노래를 전달한 사실이 없다.”고 진술하고,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입수한 1972. 4. 14.字 북한 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 1, 2 면을 확인한바, 상기 노동신문 기사내용에는 작사ㆍ작곡자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실제 작사ㆍ작곡자를 알 수 없었다.
(下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