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사형대로부터 교단으로》에 의하면, 대구교도소에서 가석방된 강종헌은 1988년 12월21일 교도소 정문을 나서는 순간 준법서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통일운동 임무를 재개한다.
 
康 씨는 감옥생활을 거치면서 어느덧 ‘통일운동’의 핵심적 존재로 변해있었다. 감옥 속에서 동료 수감자들에게 보여 온 투쟁성과 감옥 속에서 만들어진 인맥, 외부에서 그를 석방시키는 운동을 해온 후원 세력이 결합되어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여 접근하고 형성된 통일전선 관계였다.
석방 나흘 후인 크리스마스 이브엔 박형규 목사가 주도하는 거리 예배에 참가했는데, 예배의 마지막에 康 씨가 작사·작곡한 ‘그날이 온다’를 모두가 함께 불렀다(자서전 123쪽). 해가 바뀐 후 文益煥(문익환) 목사 집에도 식사 초대를 받았다. 이때 문익환 목사는 “금년 중에 무슨 일이 있어도 평양에 간다”는 대목이 포함된 유명한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자작시를 읊었다.
가석방되어 歸日(귀일)한 후 전개한 反국가 활동에 관한 부분은 자서전에서 매우 애매하게 기술되어 있다. 자신의 삶을 기록한 것이라기보다, 한국 내의 소위 ‘통일운동’ 동향과 흐름을 정리하고 해설한 내용이 중심이다. 이런 것을 과연 자서전이라고 해야 할 것인지 의문이다. 그는 한국에서의 통일운동 투쟁의 흐름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집어넣어 자서전으로 만들었다. 남한 정세를 정리한 자서전의 큰 줄기는 당연히 평양 측의 인식, 공식적 총괄일 터이므로 그 점을 알 수 있다는 것은 그런대로 흥미 있는 일이다.
자서전을 보면 康 씨가 용어 사용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이 드러난다. 康 씨는 한국의 민중운동이 1989년에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정리한다. 즉, 1980년대 후반부터 ‘민족민주운동’이라는 용어가 정착했는데, 이는 통일운동과 對美(대미)관계 등 민족문제를 향한 지향성이 강해졌음을 반영한다고 총괄하고 있다(同 124쪽). 그가 얼마나 ‘통일과업’에 집중하고 있었는지가 느껴진다. 康 씨는 1989년 1월21일 연세대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결성대회에도 참석한다.
자신을 ‘在日(재일)한국인정치범’으로 규정한 康 씨는 1989년 4월4일 일본으로 귀환하자마자 휴식과 적응 시간도 마다하고, 일주일 만에 일본 전국을 돌며 ‘한국 내 정치범 석방운동’을 시작한다. 도대체 14년 만에 일본에 돌아온 지 1주일 밖에 안 되는 강종헌에게 그런 전국순회 집회를 주선, 준비한 세력이 누구였을까? 자서전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康 씨는 밀입북 후 東京(동경)에 체재 중이던 문익환 목사를 다시 만났고, 文 목사가 귀국 후 수감된 뒤엔 문익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는 광범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에 수반되는 비용, 인맥, 자금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자서전 종반에서도 자신이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얻게 된 대학강사 직으로는 도저히 생활이 안 된다는 점을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벅찬 일정 탓에 건강을 해쳐서 휴양까지 해야 했던 이 사업에 들어가는 자금을 어떻게 조달했는지, 누가 도와주었는지는 언급이 전혀 없다.
1989년 여름부터 과로로 쉬고 있던 康 씨는 10월에 在日한국인 3세 여인을 알게 되어 1990년 5월3일 京都(교토)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식에도 歸日(귀일) 후 친해진 민족단체 친구들이 축하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1989년 11월22일 오사카市 키타구(北區)에 있는 작은 빌딩에 ‘한국문제연구소’를 열었다. 11월22일에 연구소를 개소한 것은 1975년 학원침투간첩단사건 발표가 11월22일이었던 것을 상기하여 정했다고 한다. 康 씨는 자신의 연구소 開所(개소)를 후원한 사람들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歸日(귀일) 후에 알게 된 조총련 청년 십수 명이 축하해주었고 “교육의 권리를 비롯해서 在日조선인의 민족적 諸(제) 권리를 획득하는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同 134쪽)라고 한 것을 보면, 그를 도와준 새로운 친구들이 거의 조총련임을 짐작할 수 있다. 조총련에게는 물론 평양으로부터 지령이 내려졌을 터이다.
 
1991년 4월에는 연구소 기관지 <한국의 소리>를 창간한다. 매 호마다 ‘민족단체 청년들’과 일본 친구들이 기고해주었다고 하는 등, 자서전을 보면 그가 歸日 후에 그를 전폭 지원한 것은 대부분 反국가단체인 조총련과 한통련이었음을 할 수 있다.
康 씨는 아무런 전후 설명 없이 1991년 봄부터 범민련 해외본부 공동사무국 사무처장이 됐다고 간단히 적고 있다(同 140쪽). 시기적으로 보아, 즉 <한국의 소리>는 범민련 해외본부 공동사무국의 기관지이기도 했다고 볼 수 있다. 康 씨가 어떤 경위로 해외본부 공동사무국 차장이 되었는지, 京都에 사는 그가 어떻게 東京에 있는 사무국 일을 볼 수 있었는지, 당시에 직속 상관은 누구며 동료는 누구였는지, 범민련 북측본부, 남측본부, 여타 해외 지역과는 어떻게 연락을 취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설명이 없다. 특히 같은 해외본부 공동사무국 차장이던 조총련 朴勇(박용)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이토록 극도로 감춘다는 것은 그 정도로 비밀이었다는 反證(반증)이다.
이런 당연한 문제에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康 씨의 자서전은 통일사업에 대한 현란하고 일방적인 장황한 내용들로 독자의 관심을 돌린다. 교묘한 용어 전술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가 해외본부 공동사무국 차장으로서 첫 번째로 관계한 사업이었을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1991년 4월, 일본 치바현 마쿠하리 개최)에 대해, 그는 남북한이 ‘통일팀’을 파견했다고 기술(同 141쪽)한다. 이는 북측의 전형적인 악질적 用語(용어) 조작이다. 당시 남북간 합의된 공식 용어는 ‘단일팀’이었다.
강종헌은, 동구와 소련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북방외교로 인해 “외교적 위기상황에 직면한” 평양 측이 남쪽에 흡수되지 않기 위해 내어 놓은 민족공조 전술을 외치기 시작하는 일로 범민련 해외본부 공동사무국 차장으로서의 평양 측 대변인 역할을 시작한다.
“한국의 통일운동단체가 특히 남북의 평화공존과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조선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베트남 식 무력통일이든, 독일 식 흡수통일이든 체제 타도를 통한 통일 추구는 그 과정에서 심대한 피해를 쌍방에 초래합니다. 조선반도에서 한 쪽이 다른 쪽의 체제를 부정하고 그 제압을 기도하면 반드시 군사충돌이 일어나고 전쟁으로 확대됩니다. 그것은 과거 동족 전쟁을 체험했던 조선 민족이 배운 피(血)의 교훈입니다. 연방제는 ‘통일’의 논리이기보다 ‘공존’의 논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북 간의 격차가 현저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압도적인 격차가 발생하고 말았기 때문에 두 체제의 장기적인 공존을 보장함으로써 상호의 불안을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동 142쪽).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우선 동족 전쟁(6·25전쟁)를 일으킨 게 바로 金日成(김일성)이 아닌가? 그리고 무력통일을 위해 소위 ‘4대 군사노선’을 강행해 온 게 金日成 아닌가? 그리고 그런 金日成을 믿고 ‘그날이 온다’는 노래를 작사·작곡했던 것이 바로 강종헌 자신이 아닌가?
강종헌은, 남북한 유엔동시가입과 ‘남북한기본합의서’ 및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에 대해, 남북의 정부당국이 내린 ‘현실적 선택과 현명한 결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강종헌과 범민련은 한국 내 정치범석방과 국가보안법 해체 운동을 더욱 강화한다. 물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제3차 범민족대회에 범민련 해외본부가 대표단을 파견하게 되어 1992년 8월2일 나고야(名古屋)발 전세기 편으로 처음으로 訪北(방북) 할 기회를 얻었다고 태연히 거짓말을 한다.
“21년 전인 1971년 4월 모국유학을 결의하고(*자기 나라 대학에 유학하는 일에 어째서 ‘결의’까지 필요한가), 처음으로 南의 김포공항에 내렸을 때와 같은 감개를 느꼈습니다. 조국만이 줄 수 있는 상냥함과 엄격함일까요? 불과 두 주일 정도의 체재를 통해 北의 조국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대회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민중과 접촉도 행사를 통한 것에 한정됩니다. ‘이동의 자유도 없는 나라에 가봤자 즐겁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그래도 실제로 가보고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수도 평양뿐 아니라, 백두산, 개성, 판문점까지 北의 조국을 종단했던 것이 나에게 귀중한 체험이 되었습니다. 정치체제에 대한 贊否(찬부)는 제쳐두고, 그 아름다운 산하는 틀림없는 나의 조국이며, 뜨거운 마음으로 통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동포라는 강한 애착이 싹 텄기 때문입니다.”(同 144쪽)
방북에 앞서 사전에 면회를 신청했던 백모(아버지의 누나)는 주소를 모르면 찾을 수 없다고 하여 만나지 못하고, 예전에 오사카에서 가까운 곳에 살던 먼 친척 아저씨가 뉴스를 보고 호텔로 찾아와서 만났다고 한다.
康 씨는 수 만 명 이상의 北送者(북송자) 가족들이 겪는 비극, 투옥과 강제실종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난처한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자신의 알리바이를 자서전 속에 만들고 있다. 즉, 귀국자들 중에는 北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 불행한 처지에 빠진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꼭 만나고 싶었던 妻 씨의 외삼촌도 ‘지상낙원’이 아닌 조국의 현상에 실망하여 비판적 언동을 되풀이하다가 ‘反혁명 분자’가 되어 수용소로 보내지고, 가족들은 전기도 없는 농촌으로 추방되었으나 일본에서 장인이 트럭 등을 보내는 재정지원으로 조금 나은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 후, 이번 면회신청 덕분에 당국으로부터 수용소 내에서 사망했다는 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고 기술한다.
그러면서 康 씨는, 이 비극에 대해서도 南이든 北이든 민중이 정책과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反국가·反혁명으로 단죄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同 146쪽)고, 북한 동포의 노예적 참상이 北의 폭압체제 때문이 아니라 분단 때문이라는 식으로 호도한다. 그리고 바로 남북의 민간 교류가 본격화되는 것은 ‘통일을 위해 준비된 대통령’(김대중)이 등장해서부터라고 말을 돌린다.
“조선 민족은 2000년 6월 ‘분단의 시대’에서 ‘통일의 시대’로 이행하는 역사적인 제1보를 내딛었습니다.”(同 150쪽)
“6·15 남북공동선언은 在日 코리안 사회에도 화해의 흐름을 만들어 내어, 한국 민단과 조선총련, 그리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들이 하나가 되는… (중략) …통일 마당이 넓혀지고 있습니다.”(同 151쪽)
1999년 범민련 직책을 그만둔 후(왜 그만 두었는지 상황과 경위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아마도 조직 상부의 지시였을 것이다), 2001년 8월15일 ‘민족통일대축전’에 해외대표단으로 참가한 康 씨는, 남북정상회담 덕분에 옥중에서 함께 있었던 남쪽의 통일운동가들을 평양에서 만난다.
康 씨는 ‘생각하는 바가 있어’ 이번이 마지막 訪北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대전교도소에서 신세를 졌던 K 씨와 L 씨에게 특별면회를 신청했다고 한다. 두 명은 2000년 9월 김정일의 요구에 따라 김대중이 北으로 송환한 비전향장기수(63명)였다.
 
康 씨는 K와 L의 가정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당국이 호텔에서 만나라고 하자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옥중 동료였던 비전향장기수 가정을 찾아가는 경위를 설명하는 가운데 놀라운 고백을 한다.
“행사가 끝난 8월17일에 두 사람이 숙소인 양각도 호텔로 찾아왔지만,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호텔에서는 만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담당자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두 분에게는 ‘내일 반드시 자택을 방문하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중략) 그날밤 담당부서와의 길고 심각한 교섭이 시작되었습니다. 담당관도 몇 번인가 상사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관례를 돌파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최종적으로 내가 전한 의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의 생활을 공개하지 않는 사정은 잘 압니다. 그러나, 나는 두 분과 南의 형무소에서 고락을 나눈 동지입니다. 지금도 동지적인 신뢰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이 조국은 혁명동지의 의리를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나라가 아니었습니까? 나에게 호텔에서 만나라는말입니까? 가정을 방문해서 가족 분들에게도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닙니까? 상부의 책임 있는 분에게 내 의사를 전해 주십시오. 만약, 옥중에서 함께 싸운 동지의 집에도 갈 수 없다면 내가 이 나라를 다시 방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략)
다음날 아침, 담당자로부터 ‘특별 배려입니다. 점심 지나서 L 씨 집을 방문할 것이니 준비해주세요. K 씨도 거기서 합류합니다’라고 통고받았습니다. 솔직히 ‘특별 배려’에 감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략) (北으로) 귀환하신 여러분들이 국가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을 알고 마음이 조금 풀렸습니다.”(同 154쪽)
“다음날 원산에서 만경봉호를 타고 니가타(新潟)를 향해 출항했습니다. 가족 방문을 마친 동포와 수학여행을 다녀오는 조선학교 학생들로 배는 초만원입니다. 만경봉호로 조국을 왕래하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중략) 한국문제연구소 간판을 내걸고 12년 동안 제대로 된 연구를 단 하나도 해오지 못한 게 아닌가? 강연 의뢰를 받고 조선반도 정세를 분석해왔지만, 그 내용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중략) 다시 한 번 기초적인 공부부터 시작하자. 알맹이 있는 통일운동을 하기 위해서도 국제정치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자. 니가타로 돌아오는 만경봉호에서 그렇게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대학원에서 연구생활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同 155쪽)
강종헌은 어째서 감히 평양의 담당관을 상대로 당당하게 교섭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또는, 다른 사안은 결코 의도적으로 노출·발설하지 않은 그가 대담하게도 스스로 김정일 폭압체제에 대한 충신의 표상으로 되어있는 ‘비전향장기수’ 들과 혁명동지임을 드러낸 것일까?
 
범민련 해외본부 공동사무국 사무차장이라는 자리는 단순한 사무를 처리하는 자리가 아니다. 조총련 측이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조총련과 한통련을 비롯해서 전 세계 종북세력의 연락센터 역할을 하는 것이 공동사무국이다. 범민련 남측본부가 북측본부와 직접 연락 통신할 수 없을 때에 이를 중계하는 것도 해외본부가 해야 할 일이다. 평양 측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을 지도핵심으로 포치하는 자리이다. 그러한 자리에 어째서 강종헌이 뽑혔을까? 在日간첩 출신 수십 명 중에서 뽑는다고 하더라도 왜 강종헌이었어야 했을까? 혹시 북송된 비전향장기수 들이 평양에 개선한 후에 노동당에 강종헌을 최고의 혁명전사라고 보고했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이 쓰인 것은 2010년 9월이다. 康 씨가 단순히 자신의 혁명성과 동지애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혹시 이 부분이 강종헌의 혁명성과 지도핵심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그 덕분에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전략공천을 받게 된 것은 아닐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