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南, 對日 공작을 위해 學者로 변신한 강종헌

康宗憲 자서전 분석(4): 대학에 거점 마련-내재적 접근법과 用語 전술
강종헌의 자서전 제4장은 “대학원의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교단에 서다”이다.

康씨는 평양 측의 움직이는 海上 工作基地로 불리는 ‘만경봉호’로 2001년 8월에 북한에 다녀온 직후에 대학원 진학 수속을 밟는다. 京都대학은 대학원과정 수업 자격이 없다고 康씨의 입학을 거절했으나, 立命館大學(리쯔메이깡대학) 대학원 국제관계학부와 오사까대학 대학원 국제공공정책연구과에 입학이 허가되어 등록금이 싼 大阪大學 대학원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가 대학원에 제출한 ‘연구계획서’는, <조선반도의 정치, 군사 정세가 안정되지 않고 남북대화가 진전되지 않는 것은, 상반되는 두 개의 관계가 대립, 경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6.15남북공동선언’으로 상징되는 “화해-협력의 남북관계”와, 조선전쟁 정전협정에 규정된 “적대적인 美朝(美北)관계”입니다. 前者가 우위에 있을 때는 남북관계는 진전되고, 평화와 통일을 향한 분위기가 고조됩니다. 그러나, 後者가 현저해지면 남북관계는 정체되고 민간의 경제협력과 당국간 대화도 중단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조선반도의 평화 보장과 남북 통일”을 연구과제로 선정했습니다. 그것은, ① 조선반도의 평화 보장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② 어떻게 하면 남북이 주변 大國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통일을 실현할 수 있을까를 탐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자서전 159쪽)>

라고 작성하여 그의 ‘연구과제’가 평양 측의 전략 전술을 뒷받침하는 것임을 감추지 않았다. 康씨는 특히, 그가 작성 제출하는 자료들에서부터 노골적인 용어전술을 거리낌없이 구사하고 있다.

물론, 대학원 입학 면접 및 논문 작성 과정에서 康씨의 외골수적 확신과 논리가 지도 교수들에게 지적 받았을 것임은 당연하다. 자서전 속에도 그런 사정을 밝히고 있다. 그는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며 놀란 것은 일본인 대학원생들이 自國의 현대사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것이었다고 기술(동 160쪽)하고 있다.

그 자신이 한국사회를 체험한 바 없다고 고백(동 84쪽)했던 외눈박이 혁명가가, 일본 젊은이들이 자국의 현대사에 무지한 것을 보고 놀랐다는 대목이 재미있다.

그는 석사과정 논문을, 햇볕정책의 내용을 成果와 限界라는 두 측면에서 분석하여 금후의 과제를 모색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2004년3월에 국제공공정책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논문의 제목은 “김대중 정권의 對북조선 외교 –햇볕정책의 성과와 한계-”였다. (동 161쪽)

논문은 논문이라는 형식을 빌린 ‘햇볕정책’ 선전이었다. 그는 한국의 햇볕정책은 필연적으로 등장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논문의 요점을 인용한다.

<…김대중 정권의 對북조선 외교를 분석한 결론으로서, 本 논문은 햇볕정책이 특정 정권의 1회성 정책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繼承性을 가진 정책으로서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반도의 현상은 햇볕정책이 완결된 것도, 폐기된 것도 아니라, 지금도 추진 중임을 나타내고 있다…>(동161쪽)

康씨는 석사학위 논문의 마지막 장에서 일본의 對북조선 외교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북조선과 가장 치열하게 대치해온 한국정부가 왜 이전의 적대 정책에서 포용정책으로 전환했는가? 선입관과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교착상태에 빠진 日朝(日北)교섭을 타개하는 힌트가 되지 않을까?”, “本稿에서 살펴 본 것처럼, 햇볕정책의 등장 배경에는 다양한 요인이 개재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조선반도의 냉전구조 해체를 지향하는 김대중의 확고한 평화주의, 그리고 한국사회의 뚜렷한 세대교체, 게다가 역대 정권의 적대정책이 군사 긴장과 상호불신을 높였을 뿐이었다는 진지한 반성, 이러한 諸 요인에 관한 총체적인 고찰 없이 햇볕정책에 대한 바른 이해는 불가능하며, 한국시민의 대북, 대미 인식의 변화를 통찰하는 것도 곤란할 것이다.”>(동 162쪽)

김대중의 수하인 임동원이 일본 조야를 설득하려 할 때 사용한 先供後得 따위 논리 그대로 이다. 康씨는 김대중을 열광적으로 추켜세웠다. “本稿를 마치면서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민족의 한 사람인 필자는, (중간 생략)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민족의 ‘꿈’을 ‘현실’로 접근시킨 역사적인 출발이었던 점을 높이 평가한다”(동 163쪽)

康씨는 대학원 1년 차인 2002년12월 제16대 대통령선거를 “대북정책과 對美 관계를 묻는 국민투표” 성격으로 규정했다(동 164쪽).

그는, ‘貧農의 아들’로 태어난 노무현은 수평적이고 分權的, 그리고 개방적인 의사 결정 시스템을 중시했다고 주장했다(동 164쪽). 康씨는 평양의 전근대적 폭압체제인 金氏王朝도 내재적 접근법으로 보니, 노무현의 ‘386政權’도 내재적으로 보면 당연히 좋게 보일 터이다.

康씨는 “韓國民은,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통해 남북관계의 기조가 화해와 협력이며, 한미관계도 공평하고 대등한 파트너쉽을 지향해야 한다고 내외에 표명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165쪽)라는 아전인수 격 주장이 바로 전형적인 정치 공작원, 선동가들의 태도다.

노무현 정권 등장으로 역대 정권 아래서 불이익을 받았던 사람들의 명예회복 문제가 관심을 끌게 되어, 귀일 후 “범민련”과 “한통련”의 일원으로 ‘민족운동’에 관계해 온 나도 反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 분류되어 모국의 자유왕래가 허가되지 않았었다. ‘해외민주인사의 명예회복과 귀국 보장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라는 단체가 구성되어, 民弁을 비롯하여 진보적 단체가 중심이 되어 정력적으로 운동을 전개, 그들의 헌신적 운동 덕분에 2003년9월19일 우리들 “한통련” 대표단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독일에서 4명이 합류하여 해외민주인사 일행 33명은 도착 당일 저녁에 기독교회관에서 박용길 장로 등이 참석한 환영식이 있었고 광주, 부산 등 민주화 운동의 聖地를 순례할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동 166쪽)

康씨는 스스로가 지금도 법원이 反국가단체라는 판단을 유지하고 있는 ‘범민련’과 ‘한통련’의 일원이며, 그래서 반국가단체인 한통련 대표단으로 방한하였다고 자랑하고 있다. 위의 기술 중에 특히 뻔뻔스런 대목은 “모국의 자유왕래가 허가 되지 않았었다”고 불이익을 받았음을 강조한 대목이다.

자서전 전체를 통해 조선민족, 조선문화, 조선반도 등 ‘朝鮮’을 민족의 총칭으로 고집해온 그가, 마치 대한민국을 모국으로 생각해온 듯이 가장하는 대목은 가증스럽다. 康씨는 평양을 방문했을 때 친족조차 제대로 면회하지 못했고, “교도소에서 함께 투쟁했던 혁명동지”의 집조차 방문할 수 없는 “북쪽의 조국”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하고, 反國家事犯인 자신이 불이익을 받은 것이 부당하다고 생떼를 쓴다.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다. 평양 측의 본격적인 대남 선전물 수준의 자서전은 계속된다.

“2004년 들어 진보세력과 수구세력 간에 정치제도 개혁을 둘러싼 격렬한 공방이 전개되어, 한나라당의 완강한 저항으로 노무현 정권 아래서도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지 않았다(동 168쪽), 다만, 정식 여권이 발급되어 한국 왕래가 가능해진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2004년10월10일 한통련 모국방문단에 全 가족이 참가했다.” (동 168쪽). 康씨의 정세분석 능력이 떨어진 것인지, 평양의 공식 판단이 잘못된 것인지, 한나라당의 완강한 저항으로 국보법이 철폐되지 않았다는 대목을 실소를 자아낸다. 당시 한나라당이 무슨 완강한 저항을 했다는 것인가!

康씨는 ‘學者’의 길을 걷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하여 석사, 박사과정을 밟았던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그의 자서전이 답하고 있다. 그는 2004년3월 석사학위를 받게 되는 동안에도 反國家단체인 “한통련”의 일원으로 계속 활동, 투쟁하고, “한통련 방한단”에 참가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학업에도 벅찼을 기간 중에 “6.15공동위원회”의 일본지역위원(*대표위원의 한 명)으로 연방제 추진 운동에 관계하고 있었음을 실토하고 있다. (동 169쪽)

특히, 2005년 8.15 통일행사는 노무현 정부의 또 다른 사명인 남북관계가 심화되는 가운데, “民族大祝典”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는데, 북측 대표단 200명, 해외대표단 150명의 한 사람으로 자신(康)도 일본대표단에 뽑히어 8월14일부터 17일까지 여러 가지로 의의 깊은 행사에 참가했다고 자랑하고 있다(동 169쪽)

이 행사의 의의는, 북측 대표단이 평양에서 직항편으로 서울에 온 것과, 통일운동단체뿐 아니라, 광범한 일반인이 참석하여 감동적인 대중적인 행사가 되었던 점이라고 강조한다(동 170쪽). 이 행사가 현재 민통당 대표인 이해찬이 총리시절에 태극기를 들지 못하게 했던 상암경기장의 축구경기 등이다. 노무현 정권의 종북 자세가 절정에 달했던 당시의 분위기가, 康씨는 자서전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

康씨는 자서전을 통해서 옥중에서 함께 지냈던 종북 세력들의 당시 근황을 소개하고 있다.

<8.15대회가 끝난 후의 교류회에서, 1982년 여름에 대전형무소에 함께 수감되었던 반가운 친구와 재회했는데, 당시 학생이었던 그들도 지금을 각 지역의 시민단체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며 지금도 통일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170쪽)

옥중 동료 중에는 국회의원과 장관이 된 친구도 있었다. 그러한 저명인보다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써 각자의 지역과 직장에서 활기 있게 활동하는 그들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대전에서 고교 사회과 선생을 하고 있는 후배가 말했습니다. “형, 한국사회가 여기까지 오는 건 쉽지 않았어! 사람들이 北에 대한 불신과 敵意를 극복하는 데는 정말 긴 시간이 필요했거든… 교육 현장에서 이를 실천하는데 참여한 것은 행복했다고 생각해” 조용한 미소와 변함없는 겸허한 자세에 이 쪽이 부끄러워졌습니다. 한국사회의 민주적 발전은, 그리고 통일의식의 심화는, 이름도 없는 그들 민중의 헌신이 가져온 것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동171쪽) 라고 전교조(?) 활동은 해온 후배의 투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康씨는 석사과정을 마치고 2004년2월에 박사과정 시험에 합격하여 4월부터 오사까대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다. 박사과정 연구테마를 “조선반도의 非核 평화와 동북아시아의 안전보장”으로 제출한다. 석사과정은 한국정부의 對 북조선 외교와 통일정책이 중심이었는데, 박사과정은 “북조선의 관점에서 조선반도의 核 문제와 평화체제에 대해서 연구”하기로 했다고(동 171쪽) 명시하여, 康씨의 박사과정의 목적이 소위 내재적 접근법을 통해서 평양 측의 전략을 옹호하기 위한 것임을 감추지 않고 있다.

康씨의 박사과정 중에, 6자 회담이 곡절을 겪으면서 북측이 핵실험을 단행(2006년 10월)하는 등 국제정세가 극적으로 변동하여, 그는 현재진행형인 현안문제를 박사 논문에 반영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실토하면서도, “核 문제의 본질은 조선반도에 남아 있는 냉전 구조이며, 이 해체방도를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인 연구자로서의 과제가 아니겠는가”라고 정당화한다(동 172쪽).

그가 제출한 박사학위논문 제목은 “조선반도에서의 非核化와 正常化-美朝의 상호위협 삭감에 의한 平和체제-”였다고 한다. 그의 문제의식은 두 가지로, (1) 東西냉전의 종결에도 불구하고 조선반도의 분단과 군사적 긴장은 왜 해소되지 않는가? (2) 북조선은 왜 국제적 고립을 고려하지 않고 핵무기 개발을 고집하는가? 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어서 장황한 기술이 이어지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지금까지 평양이 강변해 온 내용을 놀라울 정도로 되풀이한 것이다.

즉, “非核化뿐 아니라 정상화(조선전쟁의 종결, 美-朝, 日-朝 수교)를 강조한 것은 일방적인 核 폐기 강요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교훈을 염두에 둔 것이며,,,, 또한 상호 위협 삭감이라는 용어는 ‘북조선으로부터의 위협’과 동시에 ‘북조선에 대한 위협’도 고려하지 않는 한, 평화체제도 非핵화도 달성되기 않을 것임을 주장하기 위한 것”(동 172쪽)이라고 논문의 목적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평양의 주장과 논리를 대변하고 있음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姜씨가 자신의 논문에 첨부했다고 강조한 결론의 요지는, <북조선에 核의 先行 포기를 요구하는 일방적인 制壓정책이 아니라, 상호 위협삭감이라는 원칙에 기초하여, 핵 포기와 安全保障의 제공을 대등하게 추진함으로써, 북조선 核 문제의 해결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조선반도의 냉전체제로부터 평화체제로의 移行도 非核化와 正常化를 동시에, 혹은 순차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달성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동 173쪽) 였다.

그는 일본외교에 대한 제언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를 짓는다. 그 주장을 보자.

<(전략) 본 논문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시행착오를 거쳐 관여정책을 선택한 클린턴 정권이 북조선의 核 동결을 달성한 반면, 제압정책으로 共存을 거부한 부시 정권은 새로운 核 보유국의 출현이라는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 (중략) 핵 문제든 납치문제든 해결을 위해서는 김정일 정권과 대화하고 교섭하는 것이 전제가 된다. ‘페리 보고서’가 지적한 것처럼, 그 외의 정권이 조선반도 북쪽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체제붕괴 추구와 기대는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정부가 制裁 외교의 속박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북조선과의 국교정상화를 염두에 둔 共存 외교로 전환할 것을 정중하게 제언하는 바이다>(동 173-174쪽)

위 주장들은 ‘박사학위 논문’이라고 밝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읽은 이들은 누구나 노동신문 등 평양 당국의 일상적인 주장, 발표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康씨의 석사, 박사학위 논문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자서전 전체가 진부하고 장황한 독재체제의 문헌을 읽는 느낌이었다.

康씨를 포함한 종북들은 민중이라는 관점에서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체제 변환’을 추구하면서, 평양의 金氏王朝에 대한 한 없는 애정과 충성을 보이고 있다. 김동식씨가 폭로한 從北 감별 5개항이 ‘종북’들과 간첩 식별에서 얼마나 예리하게 적중하는 지를 알 수 있다.

康씨는 2007년3월23일 오사까대학에서 국제공공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으며 5년간 대학원생활을 통해 조금 시야가 넓어진 느낌이 들었다고 하지만(동 174쪽), 솔직히 자서전에 기술된 그의 학위논문의 요지를 보는 한 그의 세계관은 高校이래 그대로 이며, 결론적으로 노동신문 등 평양당국의 조선노동당원들이 만들어낸 논리와 표현 그대로가 아닌가!

한 때 일본사회에는 사회주의를 동경한 지식인들이 무수히 있었다. 지금도 서울에서 종북 매체에 기고하는 동경대학 명예교수인 W씨를 비롯하여, 대학교수들도 정말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김씨왕조를 노골적으로 편드는 일본인들, 특히 대학교수는 극소수이다. 평양으로서는 거의 붕괴된 정치 공작, 지식인 공작의 인프라를 방치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가 56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평양 측을 위해 대남, 대일 활동을 ‘차원 높게’ 수행하는 학자-교수가 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점은 그가 교단에 선 이후의 활동을 보면 검증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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