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동아 歷史교과서, 총 6페이지에 걸쳐 '朴正熙 집권시기' 비판

유신체제 비판하면서 같은 시기 김일성 독재 및 北인권탄압은 일체 기술하지 않아

지난 8월30일 교육부 검정을 통과한 두산동아의 ‘고등학교 한국사’는 무려 6페이지에 걸쳐 박정희 대통령 집권시기에 비판으로 점철되어 있다.

문제는 이처럼 유신체제를 비판하면서 같은 시기 북한의 김일성 독재체제, 그가 자행한 반체제 인사 및 정적 숙청, 北인권탄압 등에 대해서는 일체 기술하지 않았다.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은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중략) 군사정부는 부정 축재자와 폭력배 등을 처벌하고 자립경제와 사회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한 국민 운동을 벌여나갔다. 나아가 ‘농어촌 고리채 탕감’과 ‘농산물 가격 안정 정책’을 실시하였다. 민심을 수습하고 정변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러한 정책은 목표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294페이지)

▲군사정부는 주요 야당 정치인의 정치 활동을 규제하면서 중앙정보부를 통해 비밀리에 민주 공화당을 조직하였다. 박정희는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어기고 대통령 선거에 참가하여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上同)

▲베트남 파병으로 한국은 미국과 정치적-군사적 동맹 관계는 더욱 강화될 수 있었지만, 제3세계에서 입지는 한층 약화되었다. 또한, 5천여 명의 군인이 죽고, 1만여명 넘게 부상하였다. 수만 명이 고엽제 피해로 고통을 받고 있다. 베트남에 민간인 학살 등 많은 상처를 남기기도 하였다.(295페이지)

▲1970년 전태일 분신 이후 노동 운동이 성장하고 학생 시위도 확산되었다. 나라 밖 사정도 바뀌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또한, 주한미군도 감축하면서 박정희 정부에게 남북 화해를 권유하였다. 국내외 상황이 변화하자 정권 유지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부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통일을 바라는 국민의 바람과 달리 박정희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대통령에게 국가권력을 집중시킨 유신헌법을 만들었다.(296페이지)

▲1977년 8월에 YH 무역 여공들은 부당한 공장 폐쇄에 맞서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1명이 사망하고 신민당 의원들과 기자들도 부상을 입었다. 10월에는 외국언론과의 기자회견 내용이 문제가 되어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구고히에서 제명당하였다. 이에 부산과 마산, 창원 등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유신 철폐와 독재 체제를 반대하는 시위를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부마 민주항쟁 사태의 해결 방안을 놓고 정권 내부에서 갈등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가 피살되어 유신체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297페이지) 

[해설1] 박정희, 부국강병 통치이념-선진 대한민국 토대 구축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는가”

이는 1955년 10월 8일 UN 한국재건위원회(UNKRA)에서 인도 대표 ‘메논’(Menon)이 한 말이다. 한국을 돕기 위해 UN에서 파견된 특별조사단의 단장인 메논이 일주일동안 방문후 보고한 내용이다. 당시 그는 한국 땅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결론지었다.

1960년대 말 대한민국, GNP 82달러의 세계최빈국

당시 사회는 혼란과 가난, 그 자체였다. 6.25이후 한국은 생산시설 파괴로 인해 외국의 원조로 생존할 정도의 어려운 시기였다. 1960년 말 경제 사정을 보면 일인당 GNP는 단돈 82달러였고, 외환보유고는 2천3백만 달러에 불과했다. 무역규모는 대만, 필리핀에도 훨씬 못 미쳤다.

이외에도 1960년 당시 영국 외무부가 작성한 분석 자료에 한국의 실정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한국이란 나라는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분단국으로서 별다른 가망이 없는 곳이다. 국민성은 게으르고 문맹률은 높으며 정치적 미숙에다 경제적 빈곤이 겹친 나라, 게다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군사적 불안 등 온갖 부정적 요인을 안고 있어서 가망이 없다”

실제로 1964년 한국이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을 때 이미 일본은 50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고, 태국은 7억 3천 6백만 달러, 필리핀은 4억 5천8백만 달러의 수출을 기록했다. 특히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한국의 다섯 배 정도의 수출을 하고 있었다. 남미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는 우리가 감히 넘보지도 못할 경제성장을 이룩한 시점이었다.

당시 북한은 남한을 훨씬 앞질러 가고 있었다. 남한이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는 동안 북한은 강력한 철권통치 속에서 공업화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도 6.25로 피폐할 대로 피폐했음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초 이미 수출 2억 달러를 달성한 상태였다.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경제개발에 관한 논의가 있었지만 실제로 경제개발 계획을 실시한 것은 1962년의 일이다. 따라서 북한은 남한보다 10년 앞서 경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초부터 경제개발 주력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경제개발에 대한 박차를 가했다. 우선 박 대통령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중점을 두었다. 당시의 한국 경제 상황은 4.19와 5.16으로 인해 급격한 정치적*사회적 변혁이 있었고, 미국의 경제원조가 급격히 감소하며 원조의 조건도 까다로워졌다.

게다가 한국의 경제라인은 기존의 미국에서 일본으로 서서히 전이되는 과정에 있었다. 한국이 이런 변화에 적응해 가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최우선 과제였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서둘렀고, 경제개발의 목표를 위한 투지를 불태웠다.

박 대통령은 농업부문을 경제계획의 첫 번째 목표로 삼고 ‘농어촌 고리채 정리’,’농산물 가격안정‘등 일련의 중농정책을 펼쳐나갔다. 이와 함께 그는 자원의 빈곤에서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인력개발을 통한 수출만이 경제개발의 관건이라고 결심하고 수출 진흥에 역점을 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했다.

경제적 악순환 시정-자립경제 달성 기반 구축

공업화에 중점을 둔 박 대통령의 산업정책으로 말미암아 정부는 1961년 7월 22일, ‘종합 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이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다음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962년부터 66년까지를 기간으로, 이승만 대통령도 해결하지 못했던 만성적인 가난을 타파하려 했다.

박 대통령은 ‘모든 사회 경제적 악순환을 과감히 시정하고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 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 등 주요역점 사업을 발표했다. 그 결과 국민총생산에 있어서 성장을 경험했고, 2차 산업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또한 경제발전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차츰 공업국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제2차 경제개발 결과 공업부문의 빠른 성장으로 인해 67년의 8.9%의 성장률을 보이며 고도성장의 발판을 닦은 뒤 69년에는 15.5%라는 성장률을 보여 사상 최고의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제2차 경제 개발 계획의 성공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3차 계획(1972~76)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기간동안 한국은 연평균 10.2%라는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수출 액수도 거의 배수 이상으로 성장했다. 박정희는 제 3차 5개년 계획의 중점목표로 ‘농어촌 경제의 혁신적 개발, 수출의 획기적 증대 및 중화학 공업의 건설’을 정하고, 이러한 노력으로 새마을 운동을 벌이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 주도형 개발전략과 공업구조 고도화를 위한 중화학 공업화정책의 추진으로 이루어진 과감한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의 성과로 한국은 60년대 농업국가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었고, 70년대를 지나는 동안 한국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국력이 크게 신장됐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 집권 당시부터 시급히 요구됐던 국방력 강화에도 큰 진전이 있었고, 국민생활도 현저히 윤택해졌다.

“한국, 정책을 실천에 옮길 능력 가진 국가”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하버드대학교 국제개발연구소(HIID)가 공동 저술한 ‘한국경제-사회의 근대화’에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한국의 경제성장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61년 연간 7%의 성장을 목표로 하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다. 60년대 초반의 경제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이 성장목표는 어처구니없이 높다고 여겨졌으나 결국에는 초과 달성되었다. 그리고 1964년과 65년에 경제 자유화 계획(시장자유화 정책)이 도입되고 1964년~67년 수입대체 지향형 경제를 수출 지향 형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고도성장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한국경제의 역량은 개발정책 수립에 있어서 보다도 그 시행에 있어서 더욱 뚜렷하게 발휘된다. 뮈르달의 정의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정책을 실천에 옮길 능력을 가진 양성국가’인 것이다”

정리/김필재 spooner1@hanmail.net
 
[해설2] “鄧小平, 朴正熙 경제모델 ‘그대로 모방’”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중근동 지역에는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많은 국가들이 탄생했다. 이들 신생 개발도상국들은 자유, 비동맹 그리고 공산진영을 막론하고 경제개발을 국정의 최고 목표를 내걸고 경제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들 국가 중 경제성장에 성공한 사례는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뿐이다. 특히 외국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3세계의 유일한 경제발전 모델은 ‘박정희 모델’이외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대통령이 내건 ‘조국근대화’는 경제 분야에 있어서의 공업화와 농촌의 기아와 빈곤을 추방하기 위한 농업생산의 기반확충과 농촌 진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박 대통령은 집권 18년 반 동안 꾸준하고 강력한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했다.
 
이광요(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는 1979년 10월 방한 기간 중 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 평가를 받는데 소모합니다. 또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력을 오직 일하는 데만 집중시키고 평가는 역사의 심판에 맡깁니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 만약 각하께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시는 분이셨더라면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1979년 10월 19일, 청와대 환영만찬)
 
박 대통령은 이광요 총리가 떠난 지 1주일 후 김재규에 의해 암살됐다. 이광요 총리는 이후 미국의 TIME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중국의 등소평(鄧小平)과 일본의 요시다 총리,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아시아의 3대 지도자”로 꼽았다.
 
이광요 총리는 등소평은 중국을 나락에서 건져 올린 개혁-개방의 아버지로, 요시다 전 일본 총리는 한국전쟁-냉전 개막 직후 일본의 대외정책 기조를 친미(親美)로 돌려 일본 경제 부흥을 이끌어낸 공로자로, 박정희 대통령은 '한강의 기적'을 일군 지도자로 평가했다.
 
미(美) RAND 연구소의 윌리엄 오버홀트(William H. Overholt)박사는 ‘중국의 부상(浮上)-Rise of China,1989)’에서 “등소평은 한국의 박정희 모델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면서 박 대통령의 개발전략을 높이 평가했다.
 
일례로 1992년 2월 등소평은 남부지방 시찰 길에 올랐다.
 
그는 상해(上海), 주강(珠江), 광동(廣東)들을 돌아보고 홍콩(香港)에 인접한 신흥공업지구인 심천경제특구에 들러 “광동성은 20년 안에 아시아의 네 마리 용(四龍) 즉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 경제면 뿐 아니라 사회질서와 사회 정세면 에서도 따라 붙어야 한다”는 이른바 ‘남방순행강화(南方巡行講話)’를 발표, 한국의 경제발전을 높이 평가했다.
 
이외에도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의 동방정책 즉 ‘동쪽의 일본-한국의 경제기적을 배우자’는 정책을 통해 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도력에 큰 감명을 받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마하티로 총리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박 장군은 매우 강한 지도자였으며, 대기업을 일으켜 국부(國富)를 증진시킨 강한 지도자”로 평가하기도 했다.
 
조갑제닷컴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해설3] “박정희, 조국 근대화에 몸 바친 혁명가”

“한국 좌파 세계관, 관념적·폐쇄적 민족주의에 기초”... 이영훈 교수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2007년 9월6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 에서 ‘박정희 모델의 특질과 역사적 배경’을 주제로 강연을 가졌다. 이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이날 강연에서 박 대통령이 주도한 근대화 혁명을 조선의 타락한 역사에 대한 '충절의 반역'으로 평가했다. 그는 박 대통령을 '근대화 혁명을 일으키고 그 혁명의 제단에 몸을 바친 혁명가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

사람들은 흔히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끈 박정희 모델은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정희 모델은 정부가 시장을 대신해 투자와 경제발전을 주도한 것이다. 이제는 시장이 발전하고 성숙했다. 때문에 정부주도형의 박정희 모델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대개 이 같은 논리로 박정희 모델을 비판한다.

박정희 모델은 개발 정책의 형성·집행·점검 조정의 모든 과정에서 정부주도형 이상의 행동·조직원리와 정신적 가치를 내포했다. 박정희 모델이 성공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박정희 모델에 대한 비판은 이 점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박정희 모델의 성공을 가능케 한 정부의 행동·조직원리와 정신적 가치는 오늘날에도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오늘날의 세계경제는 민간부분의 재산권·자율성·창의성을 존중하는 신자유주의 사상과 정책이 지배적 풍조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역할은 선진국에서조차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것은 기술진보의 속도·생산·자본·유통의 세계화 속도가 워낙 빨라 민간부분의 능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급속한 변호가 몰아치기 때문이다.

박정희 경제모델, 실용적 민족주의에 입각

이러한 추세 속에서 한국의 정부 능력은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는 형편이다. 그 점을 반성하기위해서라도 역사에서 배운다는 자세로 고도성장의 한 세대를 이끈 박정희 모델의 특질을 진지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모델에서 가장 중요한 특질은 정부가 추구한 다양한 개발 정책이 하나의 중심원리로 통합됐다는 점이다.

그 중심원리는 바로 ‘수출주도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기 내내 이 중심원리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나 수정은 없었다. 흔히들 1973년부터 시작된 중화학공업화를 가리켜 방위산업의 육성을 포함한 수입대체형 개발전략으로의 전환으로 이해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중화학공업은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겨냥해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에 충분한 규모로 건설됐으며, 그 점에서 그것 역시 수출주도형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수출주도형 개발모형은 그것의 단초를 제공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라는 국제관계에서의 커다란 변혁을 통해 확립됐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는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이념적 난관이었다. 국교정상화를 위한 비밀교섭의 내용이 공개되자 지식인 사회와 대학가가 굴욕외교라고 소리치며 궐기했다.

‘빈털터리’로 세상을 하직한 박정희 대통령

그러나 일본정부가 제공하기로 한 무이자 3억 달러, 유이자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의 외자는 당시 수출고가 1억 달러를 조금 넘었던 한국경제의 입장에서는 종자돈으로서 실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녔다. 그만한 외자 도입이 무엇 때문에 굴욕외교인지는 처음부터 근거가 명확하지 않았다. 어쨌든 박정희 정부는 이 때문에 비판세력으로부터 저항에 봉착했다.

급직전 좌파이념의 재야세력과 그의 영향 하에 있는 대학가의 민족주의 세력은 박정희 정부의 수출주도형 개발전략이 한국경제를 다시 일본경제에 종속시킬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들의 비판에는 논리적이나 경험적 근거가 없었다. 그들의 국제 감각과 국가경제관은 세계경제의 동향과는 무관한 관념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기초했다.

그에 비해 박정희 대통령의 국제 감각과 국가경제관은 세계경제의 변화에 대한 시의 적절한 대응과 국익 추구의 실용적 민족주의를 기저로 했다. 박 대통령의 정신구조는 공(公)과 사(私)의 근대적 구분을 확연한 특징으로 했다. 재임기간 18년 동안 그는 직권으로 개인과 가족의 사익을 추구한 적이 없다. 그는 빈털터리로 이 세상을 떠났다.

동시기 비슷한 저치의 후진국 지도자로부터 이 같은 예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정신적 긴장과 그에 묻어나는 비장함은 그 기원이 군인정신에 있다. 재임 18년간 그는 근대화혁명을 일으키고 결국 그 혁명의 제단에 몸을 바친 혁명가로서 인생을 살았다. 그는 식민지로 떨어지고 만 우리 역사의 무기력함을 한탄했다.

‘억압’과 ‘차별’을 정당화시킨 조선왕조 정치철학

그는 인간정신의 타락을 상징하는 부정부패를 무엇보다 혐오했다. 그는 정신혁명을 추구했으며, 그것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경제성장도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재능과 수많은 정성으로 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것이 수출 100억 불의 고지였다.

전술한대로 결국 그것은 “우리 국민들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의 근대화 혁명은 당대의 모든 인간을 상대로 한 주의주의(主意主義)적 동원(動員)을 특징으로 했다. 19세기까지 조선의 역사는 타락했다. 조선왕조가 끝내 일제 식민지로 떨어지고 만 것은 타락한 역사에 대해 반역을 일으킬 지성과 용기가 결여됐기 때문이다.

거기(조선)서는 공과 사의 근대적 구분이 없었다. 거기서 공과 사는 억압의 질서였다. 나라는 임금의 나라였고, 조정은 양반의 조정이었다. 임금과 양반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존재였고, 그래서 공(公)의 세계를 독점했다. 상민과 노비는 비도덕적인 천한 사(私)의 존재였다. 사는 공에 의해 억압되고 차별됐다. 그것을 정당화 한 것이 조선왕조의 정치철학이었다.

타락한 역사로부터의 업보는 길고 깊었다. 그 업보는 식민지 통치를 거쳐 남북 분단의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 필자는 박정희 대통령만이 아니라 그와 역사관을 공유하면서 근대화 혁명을 주도하고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 구조를 민족의 역사에 대한 충절의 반역이라고 생각한다.

근대화를 향한 박 대통령의 충절, 역사의 필연

60년대 이후 근대화 혁명은 박 대통령의 공헌이 지대했지만 그의 개인적인 열정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근대문명에 대한 학습·기획·실행 능력이 사회에 두텁게 축적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세대가 추진한 근대화 혁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이 사회가 우수한 기업가를 배출할 능력을 결여했더라면, 나아가 ‘경제의지’(will to economy)로 충만한 국민 대중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근대화 혁명은 구호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근대화 혁명을 지지한 이 같은 전제조건은 그 역사적 기원이 식민 통치 시기를 초월해 한국의 전통 문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한 긴 역사의 관점에서 박 대통령과 그의 세대의 역사적 위치를 규정하자면, 우리의 전통문명과 외래 근대문명의 결합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그들의 근대화 혁명을 위한 반역과 충절의 역사는 한국 역사에 깊은 필연이었다.

정리/김필재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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