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가 승부를 좌우
전투 중에서 성패를 가르는 또 하나의 요인은 부대 내의 의사소통 채널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였다. 중대장과 소대장, 소대장과 분대장, 분대장과 분대원 사이의 연락망을 유지하지 못하면 포탄이 작렬하는 전투 중에는 오합지졸로 분산돼 버린다. 전투의 勝敗는 어느 쪽이 끝까지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느냐에 달렸고, 조직의 기능은 통신망(언어 및 電信)의 유지에 있는 것이다. 9사단 대대장으로서 수도고지 및 指形능선 전투에 참여하였던 朴贊兢(총무처장관 역임. 육군중장 출신)은 이렇게 말한다.
“분대원들은 스스로 분대장의 지휘 체계 밑에 머물러 있으려고 애써야 하고, 분대장들은 스스로 소대장을 찾아가서 명령을 받아 와야 합니다. 그런 행동은 평소의 인간관계에 의하여 좌우되는 바가 큽니다. 인화(人和)가 유지된 부대에서는 아무리 긴급한 사태 하에서도 그 인간관계의 끈이 끊어지지 않아요.”
박씨는 고지 점령을 위해 돌격 선상에까지 도달한 병사들이 마지막 ‘돌격발기(發起)’ 때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분대장과 소대장을 따라 비 오듯 쏟아지는 적탄을 향해 뛰어나가는 심리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봤다고 했다.
“애국, 애족의 정신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소대장과 분대장, 또는 동료에 대한 인간적 의리 때문에 돌격하는 것입니다. 서로 살을 맞대고 전선을 뒹굴며 살아온 인간들끼리의 유대 관계가 마지막 승부를 좌우합니다. 우리 분대장을 위하여, 우리 소대장을 위하여… 이런 마음으로 돌격하는 사람들이 많은 부대는 평소에도 人和가 잘 되어 있어요. 그 인화가 결정적인 순간에서 집단적인 용기로 표출되더군요. 또 동료나 상관이 총에 맞으면 겁을 먹었던 사람들도 갑자기 악에 받쳐 물불 안 가리고 돌격하더군요. 그런 인간관계는 소대 규모 이하의 부대에서 중요한 겁니다.
중대장이나 대대장이 되면 일반 사병들과 어울릴 수가 없어 끈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못하지요. 배치 부대와 부대 사이의 경계가 가장 취약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방어책임을 미루는 바람에 진공상태가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죠. 그러나 동기생이 지휘하는 부대가 옆에 붙어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든든할 수가 없어요. 그런 부대 사이의 경계선은 2중으로 방어되어 오히려 가장 튼튼해요. 서로를 위하고 신뢰하는 인간관계 덕분이지요.”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에서 박찬긍 대대장은 전장(戰場)에서 꽃피는 인간적인 의리를 여러 번 체험했다고 말했다. 어느 날 부대가 陣地를 빼앗기고 뒤로 물러났다. 무엇보다도 시급히 해야 할 일은 호를 파서 몸을 숨기는 일이었다. 야전삽 등 공구(工具)가 없어 대검과 철모로써 땅을 파야 했다. 박 대대장은 지쳐서 땅바닥에 누워 잠이 들어 버렸다. 한참 자다가 눈을 떠보니 어느 장교가 박 대대장을 구덩이로 스르르 밀어 넣는 것이었다. 그 장교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중대장用 구덩이를 하나 더 판 것이었다. 그러고는 자기 방탄조끼를 벗어 박대대장의 아랫도리를 슬며시 덮어 주더란 것이다.
“무엇을 바라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평소의 인간관계가 그러한 희생정신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제가 대대장 할 땐데 강행군을 하다가 잠시 쉬게 되었어요. 중대장 당번병이 건빵을 10여개 갖고 있는 것을 저의 당번병이 보았어요.
‘우리 대대장님한테 드려야겠으니 몇 봉지 다오’
‘아직 우리 중대장한테도 드리지 못했는데 안 돼’라고 합디다.
무섭게 거부하는 그 당번병의 결연한 태도에서 저는 계급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의리의 무서움을 보았습니다. 그런 따뜻한 인정 없이는 그 처참한, 지옥과도 같은 戰場에서 견딜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지요.”
군인은 왜 죽고 죽이나?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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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벼대는 싸움
무미건조한 전사(戰死)기록에는 포연 속에서 뒤엉켜 싸웠던, 그리하여 사라져 간 수많은 인간들의 이야기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戰史는 전투조직을 주인공으로 삼아 기술하기 때문이다. 1952년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전투에서 어떤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참전자들을 찾아서 증언을 들어 보았다.
1948년 11월에 육사 7기생으로 졸업, 임관한 박찬긍(朴贊兢·육군중장 예편·총무처장관 역임) 은 6·25가 터졌을 때는 7사단의 중대장이었다. 25일 새벽 동두천 근방에 적의 포탄이 떨어지자, 마침 그날 연대 주번 사령이었던 朴 소령은 연대에 비상을 걸었었다. 그 뒤 포항 근교의 안강 지역에까지 후퇴했다가 9월에 北進을 개시, 원산을 거쳐 함경북도 부령 바로 밑에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시작, 흥남에서 철수, 묵호에 상륙하여 동해안 전선을 맡게 되었다. 얼마 있다가 수도 사단 1연대 중대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제1차 미국 보병학교 유학 장교단에 뽑혔다. 1년간 유학을 한 뒤 1952년 4월 수도 사단에 복귀, 1연대 3대대장(중령)이 되어 곧 수도고지 전투와 지형능선 전투에 투입되었다.
총무처장관을 그만둔 직후 필자를 만난 박 장군은 “그때의 고지 쟁탈전은 휴전회담이 무르익어 가는 과정에서 벌어져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자는 조바심으로 해서 양쪽 주력(主力)부대끼리 비벼대는 혈투였다”고 말했다.
“수도고지 전투가 본격화되기 전의 일인데, 그때 군단장은 백선엽(白善燁) 장군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백 장군은 적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해서 포로를 잡아오도록 지시했습니다. 대대장인 제가 1개 소대를 데리고 748고지 바로 밑으로 야습을 나갔습니다.”
여기서 중공군 한 명을 잡긴 잡았는데 我軍의 총격을 받아 창자가 터져 나왔다. 그때 아군 교통호는 한길이나 되는 땅굴이었다. 이 속으로 축 늘어진 포로를 끌고 가야 했다. 겨우 부대까지 데려오긴 했다. 군단 사령부에서는 빨리 포로를 후송하여 포로 신문반에 넘기라고 독촉했다.
박 중령은 위생병을 시켜 응급조치를 하게 한 뒤 겨우 소속 부대 이름만 캐내고 차에 태워 군단 사령부로 출발시켰다. 그 포로는 군단 사령부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박 소령이 속한 1연대는 7월 20일쯤 26연대와 교대하여 수도고지에서 물러나 그 뒤 10월까지 지형능선 전투에 여섯 차례 투입되었다. 당시 부대 운용은, 전투 지역에 부대를 들여보내 병력 손실이 심하면 뒤로 빼내 휴식 겸 보충을 시킨 뒤 다시 전투부대와 교대시켜 고지로 보내는 식이었다.
박찬긍 씨 증언.
“보통 1개 대대로 고지 전투를 시작, 3일쯤 지나 보면 800명의 대대병력에서 300여 명이 없어져요. 없어진다는 것은 죽거나 다친다는 뜻인데, 有效 병력이 아니니까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지요. 死傷者의 비율을 보면 10~20%가 사망자, 나머지는 부상자예요. 전투 중엔 부상자의 비율이 높을수록 부대의 전투 능력은 떨어지지요. 왜냐하면 부상자의 간호와 후송을 위해서 성한 병력이 동원되어야 하니까 전투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지요. 당시 중공군의 포병 화력은 미군의 포병 증강에 대항, 상당히 보강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양쪽은 전략적 출혈전을 벌인 셈입니다. 땅값이 피로써 지불되는 그런 전투였지요. 포격전은 장관이었습니다.
우리 쪽의 20개 포병 대대가 수도고지에 집중 포격을 퍼붓는 것을 보면 꼭 불꽃놀이 같았습니다. 워낙 한꺼번에 포탄이 떨어지니까 개별적인 폭발음은 안 들리고 교향악단의 연주음처럼 종합된 소리가 나는데 우르렁우르렁 하는 천둥소리 비슷하게 들리더군요. 지형능선과 수도고지에는 20년생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포탄이 땅과 충돌해서 터질 때는 보통 땅과 45도 각도를 이루며 파편이 쫙 퍼집니다. 참나무의 밑 둥지가 그대로 잘려 버리는데, 대강 지상 150cm 부근에서 잘리더군요. 포격이 계속되니까 잘린 나무가 또 얻어맞아 가루가 되고, 남은 그루터기도 또 얻어맞아 없어져 버려요. 바위도 땅도 포격으로 부서지고 가루가 되면서 나중에는 먼지와 나무 가루가 뒤섞여 밟으면 20~30cm쯤 푹푹 빠집디다. 포격이 시작되면 이 먼지가 눈보라처럼 날리는데 M1을 겨냥하면 가늠자가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푹 들어가면 먼지, 물컹하면 屍身
박찬긍의 증언은 계속된다.
“고지로 기어 올라갈 때 당시의 1개 분대가 갖추어야 할 기본 장비는 1인당 M1소총과 카빈과 야전삽 한 자루씩 갖고, 거기에다가 50발 가량의 수류탄과 마대 50장씩 지고 갔습니다. 일단 고지 점령에 성공하면 이 마대에 흙을 퍼 담아 엄폐물을 만듭니다. 그런데 먼지밖에 퍼 담을 것이 없으니까 마대가 가벼워요. 포탄이 떨어지면 폭풍에 마대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기도 했습니다. 나뭇가지가 있으면 마대끼리 서로 얽어 놓을 수 있을 터인데, 나무라고는 포격으로 다 가루가 되고 부러진 소총자루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이런 상황이니 屍身을 수습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시신을 그냥 버려두니까, 밟아서 푹 들어가면 먼지고, 물컹하면 屍身이었어요. 포격이 시작되면 하늘이 안 보였어요. 온 산이 빨갛게 피어오르고…. 8, 9부 능선까지는 그냥 올라갔습니다. 공격이 개시되는 것은 보통 새벽, 먼동이 트기 전인데, 8부 능선에 도달하면 날이 밝아 오지요. 8, 9부 능선에서 수류탄을 까 던지면서 올라가 고지를 점령하는 겁니다. 1개 중대 병력이 8, 9부 능선에 散開해 있다가 일시에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高地를 향해 뛰어 올라가야 하는데, 이때 고지를 점령하느냐, 못하느냐가 순간적으로 결정됩니다. 돌격이 누구에 의해서 發起되느냐 하면 고참 분대장에 의해서 됩니다. 고참 분대장이 선도하여 수류탄 세 발을 연달아 던지고 일어나 고함을 지르면서 돌격할 때 얼마나 많은 사병들이 일어서서 뒤따라 주느냐가 성패(成敗)의 관건이었습니다. 1개 중대 병력 중에 40~50명만 일어나면 고지 점령에 성공했습니다.”
“중공군 목을 잘라 오라.”
고지 점령에 성공해도 안심할 여유가 없었다. 진지 주변에 흙주머니를 쌓는 등 준비를 하다가 보면 어둑해지고 공포 속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중공군은 초저녁부터 산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고 5색 신호탄을 쏘면서 올라오는데 “와~ 와!” 하는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신병들은 이 ‘음향 효과’에 일찍부터 질려버리는 것이었다. 밤 12시쯤 되면 고지(高地) 쟁탈전이 한바탕 벌어지면서 피비린내가 자욱하게 깔리고 주인이 뒤바뀌든지, 점령 기간이 하루 더 연장되든지 하는 것이었다.
보통 한 대대가 2, 3일만 고지를 유지하면 성공적이었고, 그 뒤에는 다른 대대와 교대했다. 수도 사단에는 8개 대대가 있었는데 모두 10여 차례씩 고지 쟁탈전에 투입되었다.
당시 신병들의 사상율(死傷率)은 고참보다 평균 2배나 높았다고 박찬긍 당시 대대장은 말했다. 병력 손상이 워낙 많으니까 훈련도 제대로 안된 신병들을 계속 보충하여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지형능선 전투 때였습니다. 우리 중대의 반이 신병이었습니다. 야간의 고지 전투에서 수류탄을 던지는데 안전핀도 안 뽑고 마구 던져요. 날이 밝은 뒤에는 불발 수류탄을 회수하여 왔습니다. 연대장에게 건의하여 중대원들을 끌고 내려와 신병 1인당 수류탄을 세 발씩 주어 수류탄 던지는 연습을 시킨 뒤 다시 올라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피차간에 전술도 작전도 없는 출혈전이었습니다. 하도 양쪽이 치열하게 비벼대니까 戰果 보고도 못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 쪽 시신도 수습할 수 없는 판에 敵의 사상자를 어떻게 헤아립니까. 대충 과장된 보고가 올라갔는데 이것이 축적되면 터무니없는 전과가 되는 거지요.”
한번은 중공군 전사자(戰死者)의 목을 잘라 오라는 명령이 박 대대장에게 떨어졌다. 박 중령은 고참 하사관을 적진으로 들여보냈다. 이 하사관은 밤중에 카빈 한 자루와 마대 하나를 갖고 약 400m를 포복하여 잠입했다. 그때 屍身은 워낙 많이 널려 있어서 손으로 머리를 더듬어 피아를 구별하기만 하면 되었다. 중공군임을 확인한 하사관은 대검으로 목을 잘라 머리를 마대에 집어넣고 국군 쪽으로 기어왔다. 어둠 속에서 피아간의 대치선을 구별 할 수가 없었다. 이 하사관은 아군 전선의 후방에 도달했는데도 마대를 끼고 계속 포복만 하다가 절벽 옆에서 피곤을 못 이기고 잠에 빠지고 말았다. 날이 밝아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이때 주먹밥을 나르는 노무자가 하사관의 옆을 지나가다가 너부죽이 엎드린 사람을 발견했다. 옆에 마대가 있어 열어 보았다. 기겁을 한 노무자는 마대를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리고는 제 갈 길을 가버렸다. 뒤늦게 일어난 하사관은 없어진 중공군 목을 종일 찾아 헤맸다고 한다.
이런 격전에서는 어떤 병사가 용감한가.
박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 얌전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전투에서는 용감합니다. 보통 때 우락부락하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은 막상 전투가 시작되면 겁을 먹습니다. 이런 현상은 어떤 전투 지역이든지 공통적인 것입니다. 급박한 사태에 직면했을 때는 얌전한 사람이 침착, 냉철해지고 우락부락한 사람들은 덤벙댑니다.
특히 방어전에서는 공포가 더해요.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敵軍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심장을 죄는 공포지요. 능동적으로 공격할 때에는 공포심을 느낄 여유가 없지요. 특히 중공군이 꽹과리치고 피리불면서 소리 지르고 올라올 때는 적이 굉장한 세력인 것처럼 과대평가를 하기 쉽지요. 어둠 속에서 상황 판단도 안 되고 동료들이 옆에 버티고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게 되면 꽁무니를 빼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방어선은 강둑과 같아서 한쪽이 무너지면 순식간에 와해돼 버려요. 최초의 이탈을 막는 것은, 내 옆에 우리 편이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는 확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