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연합사 창설의 主役 : 柳炳賢 회고록
저   자 : 유병현         
펴낸곳 : 조갑제닷컴
판   형 : 신국판
페이지수 : 460  쪽
출판일 : 2013년 10월12일
판매가격 : 1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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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病魔와 싸우며 남긴 ‘참군인’의 기록

수도사단장, 주월남 맹호부대장, 대(對)간첩대책본부장, 초대(初代)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합참의장, 주미(駐美) 대사. 군(軍)의 여러 요직을 거쳐 외교의 중심지인 미국 대사까지, 군인으로 또 외교관으로 40년간 공직(公職)에 봉사한 유병현(柳炳賢) 장군이 회고록을 냈다. ‘대필을 시키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유 장군이, 암과 급성폐렴 등 5년여의 어려운 투병기간 동안 집필한 회고록은 그야말로 ‘노병(老兵)의 마지막 전투’였다.

1980년대 후반 박정희, 하나회, 5·16, 10·26, 12·12사건 등의 비화(秘話)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맺은 인연으로 유 장군의 회고록을 출판하게 된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는 이런 독후기(讀後記)를 남겼다.

“유병현 회고록 원고는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고, 명작을 읽는 것처럼 감동적이었다. ‘아, 여기 참군인이 있었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언론과 정치로부터 멀리 떨어진, 참호와 밀림과 상황실에서 오로지 군대를 위하여, 조국을 위하요, 준비하고 싸우고 고심(苦心)하였던 일꾼이 있었다. … 유 장군은 ‘여러모로 부족한 나에게 40년이나 공직에서 봉사할 기회를 준 나라에 보은(報恩)하기 위하여’ 썼다고 한다. 그는 ‘심한 병마(病魔)와 싸우며 아흔인 내가 이 글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천운(天運)이었다’고 썼다. 대한민국이 유병현 장군 같은 인물을 가진 것도 천운이었을 것이다.”


한미연합사의 산파産婆, 유병현 장군이 말하는 창설 비화秘話

유병현 장군은 5·16 후 군정(軍政)시절 39세에 잠시 농림부 장관을 지낸 적이 있지만 1948년부터 1981년까지 33년간 줄곧 군의 요직을 거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관장교시절엔 육군본부 작전국 교육과장으로 근무하면서 한국군의 교육체계를 잡았다. 1966년엔 수도사단장으로서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수도사단은 맹호부대로 불렸다. 귀국한 뒤엔 북한군의 대남(對南)도발 극성기에 합참 전략기획국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지내면서 예비군 창설과 대(對)간첩 작전을 주도했다.

1974년엔 5군단장으로서 6사단 지역에서 북한군이 파들어 오고 있던 땅굴을 지하에서 요격하는 작전을 지휘하였다. 철원의 제2땅굴이다. 회고록엔 이 ‘지하(地下)전쟁’ 이야기가 마치 추리소설처럼 전개된다. 이미 파놓은 땅굴을 발견한 적은 전후(前後) 세 차례 있었지만 파고 있는 땅굴의 방향과 깊이를 예측하여 미사일을 격추하듯이 대응 땅굴을 파서 요격에 성공한 예는 한국은 물론 세계 전사상(戰史上) 처음일 것이다.

유 장군은 1974년 말 합참본부장 겸 대(對)간첩대책본부장으로 옮겨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될 ‘한미연합사령부’ 창설을 주도한다. 한미연합사 창설은, 그때까지 미군에 종속적이던 한국군의 위치를 대등한 동맹군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전시(戰時)에 미군의 대규모 지원을 제도화한 것이다. 그 뒤 한반도에서 평화가 유지되고 북한의 핵개발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대응 핵개발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은 한미연합사의 안전판 역할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 한미연합사 창설은 한미 양국의 국가 지도부가 동의함으로써 만들어졌지만 시종일관 이 협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사람은 한국 측 대표 유병현 장군이었다. 유 장군은 ‘연합사는 내 작품’이란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유 장군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924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난 그가 중일전쟁, 한국전,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익힌 군사적 안목과 애국심 덕분일 것이다. 한미연합사 창설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견줄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업적인데, 유 장군은 그런 일을 하도록 단련되고 준비된 사람이었다. ‘한미연합사의 산파(産婆)’라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전두환-레이건 정상회담‘ 성사시켜 김대중金大中을 살리다

유 장군은 1979년 10·26사건 때는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었다. 위컴 사령관이 미국에 가 있었으므로 유 장군이 연합사를 대표하여 미국과 협의, 위기를 관리하였다. 12·12사건 직후 합동참모의장이 된 그는 1980년 5월의 광주사태 때 미군과 공조, 북한군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신경을 썼다. 회고록에는 ‘광주사태 때 북한군 1개 대대가 들어왔다’는 탈북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유병현 장군 인터뷰도 수록되어있다.

합참의장 시절이던 1980년 말, 그는 방미(訪美) 길에 오르면서, 레이건 신임 대통령(당시는 당선자 시절)과 정상(頂上)회담을 성사시켜달라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밀명(密命)을 받는다. 오랫동안 미군 고위층과 좋은 관계를 가지면서 안보협력을 해왔던 유병현 장군의 진가(眞價)가 외교전선에서도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전 유엔군사령관 베시 대장 등의 도움으로 레이건 당선자의 측근인 리처드 알렌(뒤에 대통령 안보 보좌관)을 만나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金大中)의 감형(減刑)을 조건으로 전두환-레이건 정상회담에 합의하였다. 당시의 비밀접촉 과정과 기록이 이 책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내가 김대중을 살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유 장군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은 이 자료로 입증된다.


| 책 속으로 |

나이 든 사람에게 급성폐렴은 어려운 투병이었다. 그래도 회복기에 들어서자 나의 군사학파 문하생으로 불려온 부관과 보좌관들이 찾아왔다. 영광스럽게도 내가 20년간 보임해 두었던 15명의 부관들 중 12명이 장성으로 승진해 군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내가 걸어온 국가안보의 길을 기록으로 남겨야한다고 충고해주었다. 나의 발자취를 회고(回顧)하여 글로 쓰려니 어려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 생각을 구술(口述)하여 대필하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진통제를 먹으며 매주 여러 번의 통원치료를 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책상에 앉아 있기조차 힘이 들어, 흩어진 여러 기록과 자료를 찾아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예측하기 어려운 병세라 시간을 정하여 나의 말을 받아 써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정리한 이 글이 기록으로 남아 앞날의 국가안보를 연구하고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랄뿐이다.
-39~40페이지(머리말 中)

우리 국군의 지휘권 내지 통수권마저 미군에게 전적으로 이양하였다는 국내에서의 논란이 있었다. ‘우리 육·해·공군을 귀하의 지휘권에 배속한다(assign to your command authority)’고 한 것은 그 앞에서 ‘한국에서 싸우는 모든 유엔군이 귀하의 작전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어 있어서(placed under your Operational command)’라는 말과의 중복을 피해서 줄여 쓴 것이었다. 더 확실하게 말하면 맥아더 원수는 답서에서 “한국군을 ‘작전통제(Operational command)’하게 됨”을 이라고 명확하게 말하였다. 여기에서 ‘command’라는 단어는 일률적으로 지휘라고 하기보다는 배속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때 자주 사용한 ‘Operational control’과 동의어이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미국의 합동참모본부가 해석하고 있다. 정확한 뜻에서 유엔군이 한국전 이래로 한국군을 지휘하거나 통수권을 행사한 실례가 전혀 없었다.
-73페이지(1부 1 북한의 남침 中)

준비공사를 진행할 때에 기획단 요원들에게 예측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식을 얻고 협조체제를 구성하게 하였다. 그 대상은 국방과학연구소, 수자원공사, 지질연구소와 학계들이다. 전진(前進) 숙영지에는 발전기도 설치되었으니 공사기획단을 그곳으로 진주시켜 공사통제단으로 개칭해 앞으로의 모든 공사를 통제 감독하게 하였다.
나는 이 기간 중에 공병의 공사 진행을 확인하면서 내 판단이 적절한지 되풀이하여 생각해 보았다. 나는 옳은 판단을 했다고 자신했다. 평양의 수뇌들은 내가 수맥을 찾는 시추기로 그들 만행의 덜미를 잡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공사를 하고 있을 때에도 적의 지하공사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리석은 김일성아, 너의 머리는 이 정도냐, 나하고 겨루어 보자’고 외쳤다.
-178페이지(1부 3 땅굴 탐색 작전 中)

미 1군단사령부를 해체하지 말고 한미연합으로 개편해 그곳에 우수한 우리 인재들을 요직에 보직하면 예하의 한국군을 작전통제하는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 나의 보고를 듣고 한참 숙고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별다른 질문 없이 “미국이 그대로 들어줄까? 유 장군 해봐”라고 결론을 내렸다. 박 대통령에게 승인 받은 미 합참안에 대한 우리의 대응수정안을 미 측에 설명하면서 동의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까지 우리 군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아왔었기에 유엔군 사령부나 8군의 일방적인 지시에 반대하고 수정을 요구한 일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우리의 제안을 주한미군이 수용한다고 하여도 본국의 미 육군과 합참을 거쳐 합동참모회의에 보고하여 승인받는 단계가 있다. 그러하니 대통령이 결재한 수정안을 미 측에 동의하게 할 여러 방안을 세우느라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201~202페이지(1부 4 유엔군의 역할과 한미연합사령부의 창설 中)

2개월간 심혈을 기울인 대미(對美)교섭은 미 합참이 나의 수정안에 동의하게 되어 만족스러운 결말을 보았다. 박 대통령이 결재한 수정안에 추가해 철수장비의 이양과 유사시 주월(駐越) 5만 군의 신속한 철수 조치 약속을 받게 되어 무거운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성취감도 느끼게 되었다. 용산에 있는 미군 장교들은 한국 육군 소장이 펜타곤의 아성(牙城)을 공략했다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용산에는 우리 합참과 육군본부, 유엔사령부와 8군에 각각 작전참모가 있지만 나를 그중에서 제일가는 작전참모로 꼽으며 또 내가 무슨 구상을 하는지 눈치를 보기도 하였다. … 이렇게 활성화된 군단은 후에 한미 야전군사령부로 개칭되고 새로 창설된 제3군사령부에 임무를 인계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내가 구상하였던 효율적인 한국방어체제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한미(韓美)연합방위체제로의 전환시험이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문제점들을 하나씩 시정해 나갔다.
-205~206페이지(1부 4 유엔군의 역할과 한미연합사령부의 창설 中)

북한은 핵을 개발하고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장사정 포병을 전방으로 추진하고 全 국토가 사정권 내에 들어가는 유도탄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감히 재침해 오지 못하는 것은 우리 국군의 응징력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굳건한 한미동맹이 존재하고 그 임무를 차질 없이 수행할 한미연합사가 창설되었기 때문이다.
-227페이지(1부 4 유엔군의 역할과 한미연합사령부의 창설 中)

“이번 워싱턴 방문 중에 내가 얻은 결론은, 양국이 이해하고 힘을 모을 수 있다면 우리의 전통적인 유대와 우호 관계를 획기적으로 복원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해결 방책으로 나는 귀국 즉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미국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의사로 김대중 씨를 감형 조치하도록 건의하겠다. 나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한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할 때 레이건 대통령 당선자는 취임식 때 전(全) 대통령을 워싱턴으로 초청하여 정상회담을 열어 주한 미 지상군 철수의 취소를 포함한 양국 관계의 근본적 개선과 아울러 경제 협력의 증진을 협의해 주기 바란다. 이와 같은 조치가 이루어지면 한미 간에 존재하는 현안은 말끔히 해결되고 동북아에서 공산침략을 막을 수 있는 견고한 방파제가 한반도에 재건될 것이다.”
-280~281페이지(1부 5 암호명 ‘신춘계획’ 中)

알렌 안보특보를 만나 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주역(主役)을 담당한 남다른 성취감을 서로 나누며 성과를 경축하였다. 알렌 특보는 한미 정상회담을 총평하면서 “한국의 새 대통령이 백악관과 워싱턴 정가(政街)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양국 관계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고, 이 기회를 발판 삼아 국제 사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알렌 특보는 회담 성사의 비화(秘話)를 하나 들려주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생면부지의 나로부터 정상회담 제안을 받고 즉석에서 믿고 추진하게 된 것은 미국 군사 분야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나에 대한 평이 좋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알렌은 또 비밀이 잘 지켜진 것도 회담 성사의 한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또 “대통령이 외국 국가원수와 회담한다는 계획이 비밀로 이렇게 잘 지켜진 것은 워싱턴에서 드문 일이며, 민주당과 국무부가 알게 되었더라면 각기 서로 다른 주장을 하였을 것이다. 특히 언론이 알았으면 부정적인 것 외에는 전혀 도움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296페이지(1부 5 암호명 ‘신춘계획’ 中)





유병현柳炳賢 화보 / 유병현 연보 및 상훈賞勳 기록
머리글 \ 40년간 공직公職에서 봉사할 기회를 준 나라에 보은하고 싶어서 쓴 글
독후기 \ “여기 참군인이 있었구나”하는 감동-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1부 내가 걸어온 길
1 북한의 남침
2 베트남전쟁과 맹호사단장
3 땅굴 탐색 작전
4 유엔군의 역할과 한미연합사령부의 창설
5 암호명 ‘신춘新春계획’
6 주미駐美대사 시절
2부 우리 안보의 나아갈 길
1 주변정세
2 북한
3 국가의 총력안보
4 남기고 싶은 말
3부 유병현 장군 인터뷰
1 전중戰中세대의 증언-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2 “광주사태 때 韓美공조로 北개입 원천 봉쇄”-이지영 조갑제닷컴 기자




柳炳賢(유병현)

1924.10.18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중리 193번지 출생(出生)
1948 육군사관학교(특7기) 졸업
1952 미 육군기갑학교
1955 미 육군참모대학
1956 국방대학원
1959 육군기갑학교 교장
1961 국가재건최고회의 농림위원 (준장)
1963.6~12 제19대 농림부 장관
1964 제15사단장
1966 수도사단장 / 駐월남 맹호부대장 (소장)
1967 합참 전략기획국장
1967 군사정전(停戰)위원회 한국대표
1969 육군본부 정책기획부장
1970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1971 연세대학교 대학원 경제 수료
1972 제5군단장 (중장)
1974 합참본부장 겸 대(對)간첩대책본부장
1978 초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대장)
1979 제9대 합동참모의장
1981.6 대장(大將) 예편
1981 제11대 駐미국대사관 대사
1983 청주대학교 명예행정학 박사
1985 외무부 본부대사(~1986)
1992 토지개발공사 이사장
1993 한미안보연구회 회장(~1997)

을지무공훈장 / 충무무공훈장 2회 / 화랑무공훈장 3회 / 1등 보국훈장(現보국훈장 통일장) / 청조근정훈장 /
미국 공로훈장 4회 / 미국 동성훈장 3회 / 태국 공로훈장 / 인도네시아 공로훈장 / 자유중국 공로훈장 /
베트남 무공훈장 / 사우디아라비아 수교훈장 / 쿠웨이트 수교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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