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와 얘기를 나누게 됐다. 석 달 전 다니던 직장에서 사표를 내고 앞으로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며 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저는 나이가 오십이고 결혼하지 않은 채 싱글로 살아왔습니다. 대학에서 순수 사진을 공부하고 언론사 사진기자로 이십 년 동안 근무했어요. 자유롭게 살고 싶어 스스로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우선 제주도에서 한 달을 살아봤는데 금세 시간이 지나가더라구요. 사진은 순수한 작품 외에는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나머지 인생 끝까지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한 남자의 그림자를 보는 듯했다. 용기 있는 결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인 그는 앞으로 남은 세월을 그의 뜻대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를 보면서 나는 몇 명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유능한 정치부 기자였던 고교 선배는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일년 정도 방랑 생활을 했다. 그리고 산을 하나 사서 소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작은 포클레인을 움직이고 트럭을 운전했다. 인부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이십 년을 보냈다. 지금 수만 평 그의 야산은 금 소나무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방송 기자였던 또 다른 대학 선배는 퇴직 후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 마을로 들어갔다. 그곳을 수행터로 삼고 경전을 읽고 글을 쓰는 작업을 십이년째 해오고 있다. 그는 이따금씩 차에 작은 텐트를 싣고 바닷가 여행을 한다. 혼자 텐트 안에서 밤하늘의 별을 즐기는 것 같다. 인생은 선택에 따라 살아있을 수도 있고 빈 껍데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또 다른 스타일의 인생 삼막도 있다. 서울 변두리의 한 실버타운에서 묵고 있는 법조 선배는 매일 아침 서초동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 와서 앉았다가 오후가 되면 돌아간다. 그는 고등법원장을 할 때까지 수십 년간 법관이었다. 반쯤 열려진 그의 사무실 문을 통해 그가 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책상 앞에 그는 정물같이 앉아 있었다. 그 자체가 적막한 사무실이고 법관이고 책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변의 선배 변호사들 중에는 일을 하지 않아도 아침에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고 사무실로 나가 버릇같이 신문을 펼쳐 들어야 마음의 안정이 온다고 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삶의 관성이 그들을 꽉 붙들어 맨 것 같았다.

나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왔을까. 삼십 년 전이었다. 인생의 가을바람이 불고 있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자신이 그동안 꿈만 꾸던 빈 껍데기 인생 같다는 회의가 들었다. 학교 시절부터 그 나이까지 남이 심어준 가치관에 세뇌되어 산 것 같았다. 판검사가 최고의 좋은 직업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세상이었다. 부자가 되어야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감옥 안에서 죄수와 함께 지내는 교도관이라는 직업에 감사하며 만족하는 사람도 있었다. 택시기사를 하면서 하루종일 손님들과 대화하며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이 세상은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다양한 회색지대를 모르던 나는 허수아비일 수 있었다. 꿈꾸는 인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깨어있지 못했던 것이다.

사표를 내고 작은 법률사무소를 차렸다. 변호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세상을 들여다보는 직업이었다. 바닥에 떨어져 신음하는 수많은 인생들을 만났다. 인간들의 깊숙한 내면에 숨은 본능과 야망을 보고 그 실패와 추락을 목격했다. 부자가 되고 싶고 높은 자리를 탐하는 것은 그림자를 붙잡으려 하고 바람을 좇는 것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거기에도 갖가지 색과 빛깔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희망을 잃은 감옥의 시멘트색도 있고 슬프고 어두운 물에 젖은 낙엽 같은 색도 있었다. 분노의 핏빛이 있는가 하면 서릿발 같은 자존심의 흰빛도 번뜩였다.

그것들을 반면교사로 해서 나는 삶을 공부했다. 삶은 일상이었다. 안달하지 않고 흘러가는 인생을 받아들이는 게 한 방법이었다. 좋은 삶은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 세상에 참여한다. 그렇게 매일 조금씩 세상의 일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나의 인생 삼막은 파도 치는 동해의 해변가 적막한 방에서 글을 쓰는 일이다. 나의 변호사 수첩 속에서 들끓는 그들의 애환과 좌절을 침묵의 체로 여과해서 재료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