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젊은데 왜 실버타운에?>

지난해 연말이었다. 아내가 갑자기 폭탄선언을 했다.

“나 더 이상 싱크대 앞에 서기 싫어. 그리고 명절도 치르기 싫단 말이야.”

그 말이 몽둥이가 되어 내 머리통을 후려치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치가 없고 곰같이 둔했다. 가까이 있는 아내가 어떤 고통이 있는지 무관심했다. 항상 밥해주고 일해주고 그렇게 붙박이 가구같이 거기 있는 걸로 착각했었다. 나는 내 입장에서 내 잣대로만 모든 걸 재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제부터 나 혼자 밥을 해 먹어야 하는 건가? 명절을 없애겠다고 하면 그걸 주관하던 나는 가장에서 해고된 것인가? 나이가 드니까 용도가 폐기된 건가, 그런 섭섭한 마음만 들었다.

밥 해주는 파출부를 둘 수도 없고 싫다는 사람에게 사정을 하기도 그랬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혼자서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내 손으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전부터 포구가 있는 갯마을에 집을 얻어 글을 쓰며 황혼의 인생 삼막을 보내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남해와 동해를 다니면서 드라마 속 장면 같은 어촌의 집들을 가 보았다. 대낮의 풍광은 낭만이지만 밤은 달랐다. 혼자 살던 노인이 죽어 폐가가 된 곳이 많았다. 귀신들만 빈 골목길을 다니는 마을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바닷가 아파트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글을 쓰려고 제주도 바닷가에 아파트를 얻은 한 유명시인은 밤이 되니 관리실하고 자기 집에만 불이 켜져 있더라고 스산한 광경을 그의 수필에서 묘사하고 있었다.

문득 젊은 시절 고시원에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각자 자기의 방에서 공부하면서 밥만 공동식당에서 함께 먹었다. 실버타운이 떠올랐다. 서초동 이웃 법률사무소에 그런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시내의 실버타운에 묵으면서 자기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었다. 밥부터 청소와 빨래 그리고 숙소의 관리까지 다 해준다는 것이다. 아내의 폭탄 선언은 부두의 버팀기둥에 매어 있던 배의 줄이 풀리듯 노년의 내가 새로운 세계로 옮기는 계기가 됐다.

동해 바닷가 실버타운에 들어왔다. 그냥 바닷가 작은 아파트를 전세 얻은 셈이었다. 정성이 담긴 소박한 시골 밥상이다. 그런 밥은 고시공부 시절 훈련이 되어 있는 셈이다. 참기름, 장조림, 젓갈 등으로 입맛을 보충하는 요령이 기억 저편에서 떠올랐다. 관리비도 저렴했다.

이곳은 철저한 자유주의 개인주의였다.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 누구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지내보니 냉정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깊은 배려였다. 매일 아침 먼 바다의 붉은 일출을 보면서 글을 쓴다. 낮이면 하얀 파도가 부드럽게 밀려오는 해변을 산책한다. 포구 마을의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여유를 즐기기도 한다. 밤이면 하늘에 걸린 하얀 달과 파란 별들을 보면서 음악을 듣는다. 전에는 몰랐던 삶의 여백을 찾은 것 같다. 동해로 내려와 지혜로운 젊은 사람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동해로 내려와 원룸에서 또는 작은 책방을 내고 미니멀 라이프를 즐기는 젊은 부부들도 봤다. 그들은 굴레에 묶이지 않는 자유인이었다.

실버타운에는 절대 안 가겠다고 하던 아내가 툭 터진 드넓은 청담색 바다와 시골 마을의 고즈넉함 그리고 정성이 담긴 산채 나물을 만나더니 여기서 살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나보다 더 바닷가 생활을 즐긴다. 사십년 동안 밥을 하고 수고를 하게 했으면 이제는 감사하면서 그 일에서 해방 시켜 줄 때도 됐다. 이제 아내도 계단 오르내리기가 힘든 노인이다. 당연하다. 실버타운에 사니까 불쌍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면회가 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칠십이면 아직 젊은데 뭐 벌써부터 실버타운 타령이냐고 질책하는 분도 있다.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나온 오해다. 나는 칠십 년 동안 왜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나의 고정관념이 우물이었다. 서울만이 그중에서도 강남만이 일등 시민이라는 것도 착각이었다. 늙은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지혜의 도서관은 보지 못하고 오래된 겉모습만 보고 싫어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안에다 대고 소리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