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정순태의 백제 부흥전쟁(1)
韓·日 사학계의 백년 논쟁에 종지부를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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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순태(작가·前 『월간중앙』 主幹·前 『월간조선』 편집위원)
 사진: 박태신(내포지방고대문화연구원 원장)·전용식(홍주in뉴스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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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 內浦지방을 적시는 無限川과 揷橋川의 합류지점. 무한천(왼쪽 아래)의 상류엔 백제부흥군의 중심인 주류성이 위치해 있고, 그 하류는 東아시아 최초의 국제해전이 전개된 白江口=白村江과 이어진다.

 

백제 부흥전쟁의 중심 무대는 內浦지방

서기 660년 8월부터 663년 11월까지 3년 3개월간 전개된 백제 부흥전쟁의 중심 무대는 內浦(내포)지방이었다. 내포지방이란 충청남도의 절반, 즉 車領(차령)산맥 서북쪽 7개 시·군을 말한다. 李重煥(이중환)의 『擇里志』(택리지)에서는 內浦지방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충청도에서는 內浦가 가장 좋은 곳이다. 公州(공주·충청관찰사 소재지)에서 서북편으로 200리쯤 되는 곳에 伽倻山(가야산)이 있다. 그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개(牙山灣)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는데, 곧 西海(서해)가 쑥 들어온 곳이다. 동쪽은 큰 들판(예당평야)이고…. 남쪽은 烏棲山(오서산)이 막아 다만 산 동쪽으로 公州와 통할 뿐인데, 오서산은 가야산에서 온 산맥이다. >

 가야는 산스크리트語(梵語)로 ‘코끼리’이며, 힌두교와 불교에서 코끼리는 신성한 동물이다. 불교가 전래되기 전의 가야산은 ‘검은 산’, 그 주위의 들은 ‘검은 들’이라 불렸다고 한다. 다시 이어지는 『택리지』의 기록이다.

 <가야산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합해 內浦라 한다. 地勢(지세)가 한 모퉁이로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壬辰年(임진년·1592년)과 丙子年(병자년·1636년)의 두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士大夫(사대부) 집이 많다. >

 그러나 내포지방이 마냥 펑화로운 지역만은 아니었다. 백제 부흥전쟁의 시발점은 예산군 대흥면의 任存城(임존성)이었고, 그 중심은 洪城郡 長谷面(홍성군 장곡면) 소재 周留城[주류성·鶴城(학성)]이었으며, 白村江(백촌강) 전투의 현장은 당진시 石門面·高大面(석문면·고대면) 앞바다였다.

 훗날 淸日(청일)전쟁의 전단이 열린 곳도 바로 瑞山-唐津(서산-당진) 북쪽 12km 해상인 豊島(풍도) 해역이었다. 1894년 7월25일, 일본 함대는 풍도 앞바다에서 아산만을 향해 운항 중이던 청국 함선 1척과 영국으로부터 傭船(용선·charter)했던 수송선(高陞号·고승호) 1척을 선전포고도 없이 포격을 가했다. 청국의 함선은 포격을 받아 大破(대파)된 상태로 도망쳤고, 청군 병력 1100명을 실은 고승호는 포격을 당해 침몰해 탑승 병력의 대부분이 익사했다. 고승호의 영국인 선장·선원 13명만은 전원 일본 함선에 의해 구조되었다.

이어 7월29일, 서울로부터 남하한 일본 육군은 成歡(성환)전투에서 葉志超(섭지초)가 지휘한 청군을 격파한 뒤 청군의 집결지였던 牙山(아산)을 점령했다. 그리고는 이틀 후인 8월1일 일본은 청국에 대해 宣戰布告(선전포고)를 했다.

‘洪城 주류성과 唐津 백촌강’ 論을 정립시킨 在野학자 朴性興 선생 

 2019년 9월1일 오전 6시, 필자는 八堂(팔당)댐 인근의 자택을 출발해 서울외곽순환고속국도(100번)를 거쳐 시흥의 鳥南分岐點(조남분기점)에서 서해안고속국도(15번)를 타고 달리다 牙山灣(아산만) 위에 걸린 西海大橋(서해대교)에 진입해 行淡島(행담도) 휴게소에 들렀다. 행담도에서는 필자가 이번 답사에서도 둘러볼 코스인 漢津港(한진항), 平澤-唐津港(평택-당진항), 揷橋湖(삽교호) 등 民族史(민족사)의 주요 현장을 관찰할 수 있는 절묘한 위치이다.
  
그러나 이날은 秋夕(추석) 성묘를 하는 일요일이라 그랬든지 행담도 휴게소의 주차장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어 아침 식사를 할 형편도 아니었다. 휴게소를 나서 다시 15번 고속도를 달리다가 唐津(당진)IC에 진입해 틀무시路를 거쳐 松嶽邑(송악읍)사무소 앞에서 오전 8시30분에 하차했다. 이곳에서 이번 답사에서 동행할 내포지방문화연구원 朴泰信(박태신) 원장과 만났다. 朴 원장의 승용차를 답사 차량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朴 원장은 1996년 이래 필자의 백제 부흥전쟁 유적지 답사의 동지이다. 그의 先親(선친)인 朴性興(박성흥) 선생은 회갑 이후 30여 년간 연구와 답사로 洪城 周留城과 唐津 白村江 論을 최초로 定立(정립)시킨 在野(재야)학자였다. 그것은 주류성과 백촌강의 위치 설정을 놓고 100여 년간 전개된 한·일 사학계의 논쟁에 終止符(종지부)를 찍어야 할 만한 결정적 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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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 장곡면 산성리의 주류성(제1鶴城)

 

 필자는 『月刊中央 WIN』 1996년 11월 호에 <주류성은 韓山(한산)이 아닌 홍성군 長谷(장곡)>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순전히 박성흥 선생의 지도 덕분이었다. 이에 대해 國防軍史硏究所(국방군사연구소)가 1999년에 발간한 『나당전쟁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 『國譯 三國史記』(국역 삼국사기·이병도 역주·을유문화사 P.94)에서는 舒川郡 한산 乾止山城(건지산성)이라고 주장하였으나, 학성산성·태봉산성·소구니산성 등과의 지리적 관계를 분석한 정순태의 주장이 타당성이 있어서 이에 따랐다. …白江口의 위치에 대하여 錦江(금강) 하류나 東津江(동진강) 하류로 추정하는 일본인 학자의 주장도 있으나 이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卞麟錫(변인석)과 정순태가(…) 당진군 石門面 白石(백석)해안이라고 한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이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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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沙: 唐津郡 石門面 長古項里 “白沙場漁港), 왜국 함대 400척이 입항했던 해안.

 

 이것은 1913년 쓰다 쇼키치(津前左右吉) 이래 일본 학자들이 주도한 周留城-白村江의 위치 논쟁과 설정에 한국의 재야학자 박성흥 선생이 처음으로 大逆戰(대역전)의 正論(정론)을 제시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계속)

 

[ 2019-11-04, 13: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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