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멸망, 신라 武烈王의 죽음
정순태의 백제 부흥전쟁(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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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순태(작가·前 『월간중앙』 主幹·前 『월간조선』 편집위원)
 사진: 박태신(내포지방고대문화연구원 원장)·전용식(홍주in뉴스 대표기자)

의자왕의 誤判과 백제 멸망, 그리고 부흥군 봉기

659년 여름 4월에도 의자왕은 신라 서부국경지대의 獨山·桐岑(독산·동잠) 두 성을 침공했다. 의자왕은 당이 고구려 침략을 뒤로 미루고 백제를 먼저 친다는 것을 예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고구려=防波堤(방파제)>라는 역사적 경험을 過信(과신)한 결과였다.

660년 3월, 당 고종은 나이 68세의 싸움꾼 蘇定方(소정방)을 神丘道行軍大摠官(신구도행군대총관), 신라 武烈王(무열왕)의 차남인 金仁問(김인문)을 副대총관으로 삼은 병력 13만의 백제 정벌군을 편성했다. 6월, 1700척의 함선에 분승한 당군은 山東半島(산동반도)의 萊州(내주)에서 출항하여 서산-당진 앞바다에 떠 있는 德積島(덕적도)에 먼저 상륙했다. 山東半島 동단인 成山角(성산각)에서 덕적도까지는 300여km에 불과하다.

신라의 태자이며 兵部令(병부령)인 金法敏(김법민)은 당항성에서 군선 100여 척을 이끌고 덕적도에 가서 소정방의 당군을 接應(접응)했다. 둘은 7월10일 사비성 남쪽 1舍(30리) 쯤에서 兩軍(양군)이 합류한다는 軍期(군기)를 정했다.

신라의 대장군 金庾信(김유신)을 비롯한 品日·欽純(품일·흠순) 장군이 거느린 5만 대군이 7월 9일 황산벌에서 백제 장수 階伯(계백)이 이끈 5000 결사대를 격파하고, 7월 11일 泗比城(사비성) 남쪽에서 당군과 합류했다.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포위되기 직전인 7월 12일, 의자왕은 태자 孝(효)를 대동하고 사비성을 빠져나와 熊津城(웅진성)으로 도피했었다. 7월 18일, 사비성은 나당연합군에게 투항했다. 의자왕과 태자 孝도 사비성으로 돌아와 항복했다. 이로써 백제는 개국 31왕 678년 만에 멸망했다.

전쟁 마무리 이벤트는 勝戰(승전) 축하연이었다. 8월2일 대연회가 개최되어 질펀한 술잔치가 벌어졌다. 무열왕과 소정방 등 여러 장수들은 堂上(당상)에 드높이 坐定(좌정)하고 의자왕과 부여융은 堂下(당하)에서 술을 치게 했다. 술잔을 올리는 의자왕의 모습을 목격한 백제인들은 모두 울었다. 승전 병사들의 노략질도 갈수록 심해졌다.

그런데 연합군이 점령한 곳은 사비성·웅진성 등 백제의 수도권뿐이었다. 백제인들의 봉기가 곳곳에서 잇달았다. 豆尸原嶽(두시원약, 청양군 정산면)에서는 좌평(관등 1위) 正武(정무)가, 久麻怒利城(구마노리성, 공주)에서는 달솔 餘自進(여자진)이, 任存城(임존성,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에서는 福信(복신)·道琛(도침)·黑齒常之(흑치상지)가 봉기했다.

8월 26일, 蘇定方은 임존성을 공격했지만, 패퇴했다. 그럼에도 9월 3일 당군은 철수했다. 郎將(낭장) 유인원이 지휘하는 당병 1만 명의 병력만 남겨두고 서둘러 귀국한 것은 고구려 정벌을 위한 부대 정비의 목적도 있었겠지만, 더 이상의 성가신 戰後(전후) 처리를 신라에 맡기겠다는 속셈도 없지 않았던 듯하다. 그때 의자왕, 그리고 왕족 및 귀족 관료 90여 명과 백성 1만 2000여 명이 당으로 끌려갔다. 이때 무열왕도 사비성에 왕자 金仁泰(김인태)가 지휘하는 병력 7000을 남기고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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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리 9층석탑 뒤로 보이는 豆陵尹城의 遠景(원경), 사진 홍주in뉴스

 

661년 豆陵尹城의 패전과 武烈王의 죽음

우리 답사팀은 公山城(공산성) 앞에서 취재차를 돌려 금강변의 627번 지방도로 등을 따라 西進(서진)하다가 豆陵尹城(두릉윤성)의 遠景(원경)을 카메라에 잡기 위해 靑陽郡 定山面 西亭里 9층 석탑(보물18호) 앞에서 잠시 下車(하차)했다. 西亭里(서정리) 부근에는 10여 년 전과 달리 번듯한 商街(상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古山子 金正浩(고산자 김정호)는 『大東地志(대동지지)』에서 두릉윤성을 청양군 정산면 白谷里(백곡리)의 계봉산성이라 하였다. 鷄鳳山(계봉산)에 위치한 豆陵尹城 일대를 둘러보았다. 두릉윤성은 서정리 동쪽 1.5km 지점이다. 두릉윤성은 공주와 부여로부터 각각 서남쪽과 서북쪽 50리 거리이다.

663년 8월 13일, 문무왕이 이끈 신라군은 두릉윤성과 그 서쪽 6km에 위치한 豆率城(두율성)을 항복시킨 다음 8월 17일 주류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이곳 두릉윤성은 신라군에게 뼈아픈 패배의 현장이기도 했었다.

2년 6개월 전인 661년 2월, 부흥군의 지도자 福信(복신)은 당군이 지키는 사비성에 대해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8년(661) 條에는 사비성을 구원하러 가던 신라군이 사비성 북쪽 50리인 豆陵尹城에서 백제부흥군의 기습적인 出城(출성) 공격을 받아 대패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8년(661) 봄 2월, 백제의 殘敵(잔적)이 사비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이찬(관등 2위) 品日(품일)을 大幢將軍(으로 임명하고, 잡찬(관등 3위) 文汪(문왕)과 대아찬(5위) 良圖(양도), 아찬(6위) 忠常(충상) 등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였으며, …사비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3월5일, …品日이 자기 군사의 일부를 나누어 豆良尹城(두릉윤성) 남쪽에 먼저 가서 진지를 만들 곳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백제인들이 우리 진영이 정돈되지 않은 것을 보고, 불의의 급습을 가해오자, 우리 군사들이 놀라 패주하였다. 12일, 대군이 古沙比城(고사비성, 청양군 정산면 德城里 草幕골 土城)에 와서 진을 치고 있다가 두량윤성을 공격하였으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승리하지 못하였다. 여름 4월 1일에 군사를 철수하는데, 大幢(대당)과 誓幢(서당)을 먼저 보내고, 下州(하주)의 군사를 뒤따라오게 하였다. 賓骨壤(빈골양)에서 백제군을 만나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전사자는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군수품을 매우 많이 잃었다. (중략) 무열왕이 여러 장수들의 패전 책임을 물어 정도에 따라 벌을 주었다.>

아무튼 661년 2~4월의 패전에 무열왕 金春秋(김춘추)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던 듯하다. 무열왕은 661년 6월에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한편 고구려는 제 앞가림에 바빠서였겠지만, 백제부흥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661년 5월, 고구려 장수 惱音信(뇌음신)이 말갈 장수 生楷(생해)와 함께 攻城(공성)무기인 抛車(포차)를 벌여놓고 신라의 北漢山城(북한산성) 안으로 잠시 돌을 좀 날리다가 천둥 번개가 치자 금세 포위를 풀고 물러나 버렸다.

(계속)


[ 2019-11-12, 10:5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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