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慈王 아들 부여풍, 일본 원군 이끌고 귀국
정순태의 백제부흥전쟁 (7)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글: 정순태(작가·前 『월간중앙』 主幹·前 『월간조선』 편집위원)
 사진: 박태신(내포지방고대문화연구원 원장)·전용식(홍주in뉴스 대표기자)

부여풍은 661년 9월이 아니라 662년 5월에 귀국
 
 661년 6월 태자 金法敏(김법민)이 왕위를 승계했는데, 그가 文武王(문무왕)이다. 신라의 왕위교체기에 부흥군은 지금의 大田(대전)에까지 진출하여 경주-공주 간의 糧道(양도)를 틀어막아 웅진도독부의 병사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게 했고, 고구려를 치기 위해 北上(북상)하던 文武王(문무왕)의 앞길을 가로막기도 했다. 다음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마지막 부분인 패망 이후의 記事(기사)이다.

<무왕의 조카 福信(복신)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때 승려 道琛(도침)과 함께 주류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 前 임금(의자왕)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가 있던 부여풍을 서북부(內浦지방)에서 맞아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서북부에서 모두 이에 호응하니 군사를 이끌고 都城(사비)에 있는 劉仁願(유인원)을 포위하였다.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檢校帶方州刺史(검교대방주자사)로 임명하여, 王文度[왕문도, 웅진도독으로 임명된 직후 병사(病死)함]의 군사를 거느리고 劉仁願를 구원하도록 했다.>

 660년 9월 하순, 사비성과 웅진성을 제외한 백제 故土(고토) 곳곳에서 부흥군이 봉기했다. 10월 9일, 신라 무열왕이 태자 김법민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출전, 10월 18일 백제부흥군의 爾禮城(이례성, 連山)을 점령했다. 10월 30일에도 신라군은 사비성 남쪽 백제부흥군의 진지를 격파했다. 이때 당 고종은 의자왕의 아들 扶餘隆(부여융)을 司稼卿(사가경)으로 임명해 웅진도독 유인궤와 동행토록 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60년 겨울 10월 백제의 좌평 鬼室福信(귀실복신)이 좌평 貴智(귀지)를 보내, 당병 포로 100여 인을 바치면서 원병과 함께 일본에 체재 중이던 왕자 扶餘豊(부여풍)을 보내줄 것을 청했다. 왜국의 여왕 사이메이는 파병을 결심하고, 재빠른 行步(행보)를 보였다.

12월 24일, 사이메이는 王都(왕도) 아스카(飛鳥: 지금의 나라)로부터 나니와(難破: 오사카)의 宮(궁)으로 이동했다. 원정에 동원될 장병들을 징집하면서 駿河(스루가: 지금의 靜岡縣)에 명해 전함을 건조하도록 했다. 661년 1월 9일 사이메이는 배를 타고 규슈(九州)로 내려갔다. 5월 치쿠시(筑紫: 후쿠오카)에 도착해 아사쿠라(朝倉)宮에 입궁했다. 신라 정벌을 위한 大本營(대본영)을 설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왕 사이메이는 661년 가을 7월 후쿠오카의 아사쿠라宮에서 急死(급사)했다. 사이메이의 장남 나카노오에(中大兄)가 승계했다. 645년 ‘乙巳의 變(을사의 변)’이란 宮內 쿠데타 이후 왜국의 최고 권력자였던 나카노오에는 즉위를 하지 않고, 稱制(칭제)라는 형식을 빌려 국정을 수행했다. 그가 바로 텐치(天智)이다. 그의 어머니 사이메이는 남편 둘(왕족 高向와 왜왕 舒明), 자신의 왜왕 2차례(35대 皇極과 37대 齊明) 역임(再祚), 그녀 所生 아들 둘(天智와 天武)의 왜왕 즉위 등의 기록을 남긴 여성이다.

 사이메이 여왕의 屍身(시신)은 치쿠시에서 나니와로 옮겨져 661년 9월에 장례가 거행되었다. 나카노오에의 파병과 관련해 『日本書紀』에는 661년 9월 說(설)과 662년 5월 說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사이메이 死後(사후) 1~2개월에 걸친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661년) 8월, 前軍(전군)장군 대금하 阿倍比邏夫(아베노히라부) … 등을 보내 백제를 구하게 하였다. 무기와 식량도 보냈다. 9월, 황태자(稱制를 하던 中大兄)가 長津宮(나가츠노미야)에 거주하였다. 백제의 왕자 豊璋(부여풍을 말함)에게 織官(왜국의 官等 제1위)을 주었다. 또 多臣蔣敷(오오노오미코모시키, 神官)의 누이를 처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대산하 狹井連檳郞(사이노무라지), 소산하 秦造田來津(에치노다쿠쓰)를 보내 군사 5000을 거느리고, 본국(백제)으로 돌아가는 길에 호위를 하게 했다. 豊樟이 나라에 돌아가자, 福信(복신)이 마중 나와 절하고, 국정을 모두 맡겼다.>

부여풍은 641년 의자왕의 즉위 초에 왜국에 건너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환국 시기를 놓고 661년 9월 說과 662년 5월 說이 엉켜 있는데, 필자는 662년 5월 說을 합리적인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사이메이 여왕이 급사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위와 같은 일을 끝내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특히 662년 1월에 왜국이 福信에게 화살 10만 개와 실(絲) 300 斤, 布 1천 端, 쌀 종자 3천 斛(곡)을 보냈는데, 만약 부여풍이 661년 9월에 귀국해 있었다면 王인 그를 젖혀두고 신하인 福信에게 주요 군수물자를 직접 원조하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다. 이는 부여풍이 아직 왜국에 체재 중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은 부여풍 귀국과 관련한 『일본서기』 天智 원년(662년) 5월 條의 기사이다.

<(662년) 5월, 대장군 大錦中 아베노히라부(阿曇比邏夫連) 등이 수군 170척을 거느리고 豊樟을 백제국에 보내고 勅하여 왕위를 계승시켰다. 또 金策(金泥로 쓴 책)을 福信에게 주고, 그 등을 어루만지며 칭찬하고 爵祿을 주었다. …>

필자는 위의 두 記事(기사)를 비교 분석해 부여풍의 귀국일자가 662년 5월일 것이라는 심증을 굳혔던 것이다.

01.png
豆率城(두솔성)의 원경(청양군 長坪面 赤谷里)

 

02.png
무너진 두솔성의 성돌 (사진 홍주in뉴스)

 

콩밭 매는 아낙네의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백제부흥군은 사령부를 처음엔 임존성[지금의 禮山郡 大興面(예산군 대흥면)]에 두었다가 661년 3월 무렵엔 周留城(주류성)으로 옮겼다. 그러다 662년 12월에는 避城(피성)으로 이전했다가 두 달 만인 663년 2월3일에 주류성으로 되돌아왔다. 신라군이 663년 2월 避城과 불과 8km 동쪽의 沙平城(사평성)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피성은 지금의 당진시 眄川面(면천면) 잿골로 비정되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뒤로 미룬다. 어떻든 避城에로의 遷都(천도)는 백제부흥군 내에 찬반의 논란 끝에 부여풍의 주도로 강행되었던 만큼 실패 후에는 백제부흥군 수뇌부 내에 심각한 내분을 일으켰던 것 같다.

우리 답사팀은 豆陵尹成(두릉윤성)을 거쳐 직선거리로 6~7km인 칠갑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한 豆率城(두솔성)을 찾아갔다. ‘콩 두(豆)’ 자가 들어가는 城의 이름을 豆陵尹城에 이어 또다시 대하니 문득 “콩밭 매는 아낙네의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는 가요 「칠갑산」이 떠올랐다. 아무튼 예로부터 차령산맥의 줄기인 칠갑산과 계봉산 일대에서는 콩 농사를 많이 했던 듯하다.

두솔성이 위치한 이곳의 지명은 청양군 長坪面 赤谷里(장평면 적곡리)이다. 661년 3월 신라군이 두릉윤성 전투에서 부흥군에게 대패했을 때 ‘殿軍(전군)’을 맡은 上州軍(상주군)만은 부흥군 2000명을 戰死(전사)시켰다. 殿軍은 퇴각하는 군의 맨 뒤에서 적의 추격을 막는 부대를 말한다. 박태신 원장은 “그때 부흥군이 흘린 붉은 피가 계곡을 적시고 흘러 赤谷里란 이름이 붙은 것 같다”고 풀이했다. 어떻든 이곳의 直前(직전) 지명은 피 냄새가 2배 진동하는 赤谷面 赤谷里(적곡면 적곡리)였다.

(계속)

[ 2019-11-13, 17: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