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부흥전쟁에서의 分進合擊 전법
연재/ 정순태의 백제 부흥전쟁(2)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글: 정순태(작가·前 『월간중앙』 主幹·前 『월간조선』 편집위원)
 사진: 박태신(내포지방고대문화연구원 원장)·전용식(홍주in뉴스 대표기자)

公山城 작전회의에서 채택된 分進合擊 전술

우리 답사팀은 백제부흥전쟁 당시 熊津都督府의 사령부 소재지였던 公州의 公山城에서부터 답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663년 7월17일, 신라 文武王은 金庾信 등 28將을 거느리고 백제부흥군의 중심인 주류성을 공략하기 위해 서라벌(金城)을 떠났다. 병력에 대한 기록은 역사 기록에 누락되었지만, 28將이 참전했다면 병력은 적어도 ‘5만 명’ 정도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신라군의 진로는 지금의 4번 國道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國道들은 모두 역사적 履歷을 지닌 도로라고 보면 된다. 4번 국도는 지금의 경주-영천-대구-김천—옥천-대전-논산-부여-장항으로 이어진다. 문무왕의 신라군은 지금의 4번 국도를 타고 논산까지 와서, 여기서 공주의 公山城까지는 23번 국도로 北上했던 것 같다. 오늘의 국도는 우리나라 지형상의 특성 때문에 古代의 길과 겹치게 마련이다.

문무왕은 공산성에서 劉仁願• 劉仁軌• 孫仁師 등 唐將들과 만나 주류성을 치기 위한 전략을 협의했다. 이어 8월10일경  문무왕은 육군의 主力인 신라군을 이끌고 주류성으로 向發했고, 웅진도독 유인궤, 水軍將인 杜爽, 摠管 孫仁師, 의자왕의 왕자 扶餘隆 등은 170척의 함대와 糧船隊를 이끌고 牙山灣을 향해 출항했다. 이는 백제부흥전쟁의 中心을 앞뒤에서 노리는 分進合擊 전법이었다.

이에 앞서 손인사는 수군장 두상과 함께 山東半島에서 징집한 唐의 원군 7000명을 이끌고 663년 6월 아산만의 仙掌港에 상륙시켜 백제부흥군의 중심(주류성과 임존성)을 배후에서 노리는 교두보를 구축한 뒤 본부병력과 함대만 데리고 태안반도를 우회, 웅진강(금강)을 거쳐 웅진도독부에 와서 공산성 전략회의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당 연합군의 육군과 수군은 8월10일 前後해 공산성에서 각각 진발했던 것 같다. 이때 웅진도독부의 鎭將인 劉仁願은 아마도 공산성에 계속 남아 백제의 옛 수도권을 지켰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사비성 인근 加林城(지금의 부여군 林川面 聖興山城)에는 사비성을 노리는 부흥군이 그때까지 雄據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답사팀은 서해안고속도로(15번)로 西進하다가 당진分岐點에서 당진-大田고속도로(30번)로 진입해 東進하다가 禮山휴게소에 들러 이번 답사에 동행할 內浦향토사연구회 卜益采(복익채) 회장과 <홍주in뉴스> 전용식 대표기자와 합류했다. 금년 望九의 연세인 卜회장은 필자의 2006년 답사 때도 동행했다.

답사팀 北공주 IC를 빠져나와 32번 국도를 달려 금강 북안에서 강 건너편의 公山城을 관망했다. 公山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성벽을 쌓은 웅진백제 시기의 방어성이자 王城이었다.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동•서•남쪽은 가파른 성벽이 쌓여 방어에 매우 유리한 모습이다. 그래서 백제 멸망 직후 방어에 탁월한 지형인 이곳에 웅진도독부의 사령부가 들어섰던 것이다.

세 번에 걸친 백제의 遷都

여기서 백제의 세 번에 걸친 遷都 배경을 간단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원래 백제는 漢江 본류 유역인 서울 송파구의 風納土城과 夢村土城을 중심으로 번영했다. 바로 백제의 漢城시대이다. 이런 상황이던 長壽王 15년(427), 고구려는 압록강 北岸의 國內城에서 大同江 北岸의 平壤으로 遷都했다. 당시 北중국의 패권국인 鮮卑族의 정복국가 北魏와는 和好하고, 백제와 신라를 노리겠다는, 이른바 西守南進 정책이었다. 이에 백제 毘有王과 신라 訥祗王은 433년 군사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항했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의 漢城을 攻破한 후 백제 蓋鹵王의 목을 벴다. 이로써 백제의 漢城시대는 493년 만에 종말을 고했다. 이때 신라는 병력 1만 명을 동맹국이던 백제의 王都(漢城)에 급파했으나,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다. 개로왕의 왕자 文周는 무리를 이끌고 南下하여 금강 南岸인 熊津(지금의 公州)을 새 王都로 삼았다. 

웅진도 漢城처럼 江을 통해 바다로 연결되어 있어 백제가 중국의 南朝 諸國과 왜국 등 東아시아 각국과의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백제의 웅진 시대는 63년 만에 짧게 끝났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웅진은 방어에는 최상의 立地條件을 갖추고 있었으나 판도가 협소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文化• 海洋大國을 지향했던 백제 聖王은 538년 금강 河口와 상대적으로 가깝고 넓은 평야를 품은 사비(부여)로 천도했다.

(계속)


[ 2019-11-05, 16: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