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村江 패전 후 羅唐연합군의 침공을 겁낸 倭
정순태의 백제부흥전쟁(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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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순태(작가·前 『월간중앙』 主幹·前 『월간조선』 편집위원)
 사진: 박태신(내포지방고대문화연구원 원장)·전용식(홍주in뉴스 대표기자)

삼국 간 쟁탈의 요충이었던 唐項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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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성으로 比定되는 당진시 신평면 雲井里 잿골의 토성. 토성 내부에 선돌(立石) 2基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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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唐 직선항로의 출발항이자 도착항이었던 黨項城(경기도 華城市 西新面 尙安里 唐城

 

답사 3일차 아침에 필자는 32번 국도를 타고 12km를 달려 당진시 新平面 雲井里 城재로 찾아갔다. 운정리는 1979년 10월 26일에 완공된 揷橋川防潮堤 바로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날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고 上京한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安家의 만찬장에서 중앙정보부장 金載圭에 의해 피살되었다. 10·26 사건은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한국 현대사의 중대한 고비이다.

박성흥 선생은 삽교천방조제 西岸에 위치한 신평면 雲井里를 662년 12월 신라군이 상륙·점령한 沙平城으로 比定했다. 사평성이 신라군에게 점령되자 백제부흥군은 遷都 2개월 만에 避城을 버리고 주류성으로 되돌아갔음은 이 글의 앞에서 거론했다.
 
‘사평성 잣골’에는 선돌(menhir) 2基가 서 있다. 이는 이곳에 先史시대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사평성은 주류성과 피성의 위치를 比定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에 대해선 앞에서 설명했다.

필자는 雲井로터리에서 77번 국도를 타고 8km 쯤 북상해 송악IC에서 서해안고속도로(15번)를 진입했다가 西평택 분기점에서 제2서해안고속도로(153번)로 접어들어 북상했다. 이곳 서해안 일대는 새로운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지만, 최근의 경기 후퇴로 많은 공장들이 매매 또는 임대의 광고판을 벽면과 출입구 등에 붙여 놓고 있었다,

송산마도IC에서 나와 305번 지방도로(4차선)를 5km 쯤 달리다 육일리 사거리에서 2차선 도로에 접어들어 1km 쯤 西南進하니 구봉산 기슭에 사적 217호 唐城이 나타난다. 당성은 바로 삼국 간 쟁탈의 요지였던 당항성이다. 신라는 6세기 중반 한강 하류 유역을 백제로부터 횡탈함으로써 서해안으로 진출해, 당황성을 차지했지만, 이후 100년간 백제·고구려의 협공을 받아야 했다.

당항성 남쪽은 간척사업으로 공장지대와 농경지로 변해 있지만, 삼국시대에는 성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었던 것 같다. 신라 제1의 軍港 당항성에서 사평성까지는 海路로 불과 42km 정도이다. 그런 만큼 사평성을 빼앗긴 백제부흥군으로서는 큰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필자는 당항성-주류성-백촌강의 역사적 相關關係를 생각하면서 上京했다.


白村江 패전 후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지레 겁낸 왜국 

신라와 당을 적으로 돌려세웠다가 패배한 왜국은 나당연합국이 일본열도를 침략할세라 심각한 걱정에 휩싸였다. 664년, 對馬島(쓰시마)·壹岐(이키)·筑紫(치쿠시)에 防人과 烽火를 두고, 특히 치쿠시에는 太宰府(다자이후) 방어를 위해 水城(미즈키)을 축조했다. 다자이후(지금의 후쿠오카縣 太宰府市 소재)는 규슈·이키·대마도의 국방·외교를 담당하는 出先기관으로서 왜국의 對外窓口이다.

665년에도 치쿠시에 大野城(오오노죠)과 基肄城(키이죠)을 쌓았고, 長門(나가도)를 비롯해 세토內海 연안 곳곳에도 百濟式 山城을 건설했다. 이 해에는 백제의 官人 400여 명을 近江國 神崎郡에 이주시키고, 2년 후인 667년에는 金田, 屋島, 高安의 城을 축조했다.

天智는 또 667년에 백제 官人 700여 명을 近江 蒲生郡에 이주시키고, 671년에는 余自信 등 70여 명에게 官位를 주었다. 예컨대 沙宅紹明은 法官大輔에, 鬼室集斯는 學職頭(문부대신 겸 국립대학 총장)에 취임하고 있다. 大野城과 長門城을 축조했던 憶礼福留·答鉢春初 등이 군의 요직에 취임한 것도 주목된다.

특히 帝王學에 밝은 沙宅紹明과 兵法에 정통한 答鉢春初는 太子師傅로 중용되었다. 결국, 왜왕 천지는 주위를 백제 관인들로 굳히면서 나당군의 침공에 대비했다.

667년 3월, 中大兄은 王都 아스카(飛鳥)를 버리고 일본 제1의 호수 琵琶湖 서안에 近江大津宮을 지어 천도하고, 668년 1월에는 大王(오오기미)으로 즉위했다. 천도의 이유는 서쪽으로 산맥이 달리고, 동쪽은 광활한 琵琶湖를 끼고 있는 지리적 여건이 나당연합군을 방어하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여차 하면 배를 타고 도주하기도 좋은 곳이다.

그러나 정세는 급변했다. 668년 9월, 평양성의 함락 직전에 문무왕의 密命을 받은 김유신은 왜국에 공식사절을 파견해 관계개선을 요청했다. 이에 왜국은 文武王과 金庾信에게 선박 1척씩의 예물을 보내 신라의 평화공세에 응답했다.

이것은 ‘648년 비밀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당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신라 지도부의 對唐 開戰에 대비한 주변외교였다. 적어도 나당연합군에 의한 일본열도에의 침공은 없을 것임을 확인한 왜왕 天智는 크게 안도했을 것이다.

‘648년 비밀협약’이란 백제와 고구려가 평정되면 평양 以南 고구려 땅과 백제 全土를 신라의 영토로 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당 태종 李世民이 신라 재상 金春秋에게 그렇게 言約했다‘ 668년 9월 28일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은 신라와의 ’648년 비밀협약‘을 무시하고 평양에 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 이것은 웅진도독부와 계림대도독부의 上位식민기관이었다. 농업생산력이 높은 한반도를 직할 식민지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東아시아의 政治地形은 急轉했다. 668년 11월, 왜국은 즉각 답례사절을 신라에 파견했다. 이로써 657년 이래 10여년 간 단절되었던 국교가 회복되었다.

671년 12월, 왜왕 天智가 죽었다. 후계자로 天智의 아들 大友(오오토모)가 즉위했으나 오오토모의 삼촌인 大海人(오오아마)이 擧兵하여 古代 일본 최대의 내란이 벌어졌다(壬申의 亂). 오오토모는 大津宮을 빠져나와 도주했다가 마침내 자결했다. 조카를 죽음으로 몬 오오아마(大海人)가 673년에 오오기미(大王)으로 즉위했다. 그가 天武이다.
고구려 멸망 후, 신라 문무왕은 우선 백제 故土 획득을 위한 군사작전을 야금야금 시도했고, 당 고종은 大怒했다. 이에 문무왕은 669년 5월, 각간 金欽純과 파진찬 金良圖를 파견해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지만 2인 모두 투옥되었다. 670년 1월, 김흠순은 석방되었으나 계속 억류 중이던 金良圖는 獄死했다.

670년 3월3일, 신라군은 압록강을 넘어 당군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이로부터 676년 11월까지 나당 7년전쟁이 전개되었으며 그 최후승자는 신라였다. 신라는 大同江 이남의 땅을 차지했고, 당군은 압록강 이북으로 물러났다.

나당 7년전쟁 시기에 왜왕 天武는 신라·당 양국으로부터 모두 ‘러브 콜’을 받았다. 일본은 脣亡齒寒의 의미를 깨닫고 나당 7년전쟁 기간에 신라에 대해 好意的 中立을 지켰다. 그 보답으로 신라는 日本의 律令國家 완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계속)

[ 2019-11-26, 10:5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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