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實錄연재]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공소시효가 끝난 부산 어린이 살해 사건의 내막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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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注―‘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는 1981~1982년에 걸쳐 월간 〈마당〉에 연재 후, 1987년 한길사에서 나온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 포함되었다가 2011년 조갑제닷컴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현재는 절판)되었다. 조갑제 기자가 가장 애착가는 기사로 꼽은 이 글을 조갑제닷컴에 재연재한다.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1장 한을 품고 죽다 ①

*지은이 메모 - 이 사건은 1982년 10월17일에 공소시효(살인은 15년)가 끝남으로써 이제는 범인을 붙들어도 처벌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경찰과 검찰과 법원과 언론이 고문과 조작과 誤判(오판)과 誤報(오보)로써 무고한 사람들을 고생시키는 틈을 타서 범인은 면죄부를 받고만 것이다. 힘없는 서민들이 경찰·검찰·법원·언론의 총공세에 직면할 때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가를 이 사건은 똑똑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도의 범죄는 처벌되지 않고 개인의 피해는 회복될 수 없음을 고문후유증으로 40대에 요절한 김기철씨는 廢人(폐인)이 된 그의 몸과 정신으로 입증하였다. 이 기사는 1981~1982년에 걸쳐 월간 〈마당〉에 쓴 것이다.
  
  
  
   1장 한을 품고 죽다
  
   神話가 된 사건의 발단

  
   하나의 神話(신화)가 있었다. 형사, 검사, 판사, 변호사, 그리고 사회부 기자들 세계에선 이미 傳說(전설)처럼 돼버린 사건이 있었다. 열네 해가 흐른 지금도 그 사건 이름만 대면 그들은 자기 아이들 이름을 외듯 스물도 넘는 사건 관계자들의 성명을 줄줄 기억해내곤 한다.
  
   아직도 그 사건을 악몽처럼 추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건을 떠올리면 잠 못이루는 사람들이 있다. 그 생각만 나면 속골이 쑤시고 뼛속이 저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건을 누가 새삼 입에 올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슴속을 저며 오는 슬픔과 북받치는 분노와 남기고 싶지 않은 원한과 되살아나는 복수심을 홀로 억누르며 완강하게 삶을 버티고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건에 짓눌려 비참하게 일생을 끝막음한 사람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행로를 바꾸고 그들에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고통을 선물한 장본인의 生死(생사)는 알 길이 없다.
  
   살아 있다면 그는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헤고 있으리라. 1982년 10월17일이 어서 빨리 오라고 그는 빌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365일. 한 해만 지나면 그는 이 나라의 법이 보장하는 免罪符(면죄부)를 얻게 된다. 그리하여 신화는 化石(화석)으로 굳어지고 곧 망각 속에 파묻혀버릴 것이다. 1981년 10월, 나는 이 사건의 조각들을 찾아 끼워 맞춤으로써 한 사나이의 墓碑銘(묘비명)을 대신할 글을 남겨놓기 위해 취재의 길에 올랐다.
  
   1967년 10월17일 오후 9시30분쯤 金根夏(김근하) 군은 박희철 선생 집을 나왔다. 부산 화랑초등학교 5학년인 열한 살 소년 근하는 두 시간 동안의 과외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아버지 김용선 씨(당시 45세)와 어머니 최을남 씨(36) 및 누나, 형, 그리고 두 동생이 기다리고 있는 집은 150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근하는 친구 네 명과 함께 화랑초등학교(서구 동대신동) 담벼락을 따라 찻길을 걸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근하는 친구들과 헤어졌다. 찻길을 뛰어 건너 컴컴하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골목 속으로 소년은 사라졌다. 이것이 근하의 살아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약 20분 뒤 부산 영 880호 영업용 시발 택시 운전사 장용태 씨(당시 40세)는 보수동 검정다리 근처에서 한 청년을 태웠다. 그는 “실을 물건이 있다”면서 택시를 화랑초등학교 정문 쪽으로 몰게 했다. 1분도 안 돼 정문 앞에 택시가 닿자 청년은 정문 기둥 옆에 놓아둔 마분지 상자를 안고 뒷자리에 올랐다. “국제시장으로 가자”고 청년은 말했다. 장 씨는 여위고 작은 몸집의 이 청년이 실은 상자가 매우 크고 무겁게 보였으므로 그를 유심히 살폈다. 짧게 깎은 머리, 희고 둥근 얼굴, 밤색 점퍼, 맘보바지, 검은 운동화, 경상도 사투리… 운전사는 인상과 옷차림의 특징들을 머리에 새겼다.
  
   택시가 보수파출소 앞 신호대에 이르렀을 때 마침 直進(직진)신호가 켜졌다. 장 씨는 곧장 부평동 쪽으로 나갔다. 청년은 대청동 쪽에서 국제시장으로 들어가길 원했던 듯 ‘국제시장으로 가야 할 텐데…’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청년은 중구청 앞에 올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장 씨는 교차로에서 국제시장의 남쪽 입구로 좌회전을 할까 하다가 다시 방향을 물었다.
   “자갈치시장으로 갑시다.”
   “거긴 들어갈 수가 없는데요…”
   “그러면 남포동 멸치 도가로 갑시다.”
  
   운전사는 천사당 양과점까지 와서 남포동 해안 쪽으로 우회전을 하려고 했으나 버스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청년은 다시 시청 뒤 해안통으로 가자고 했다. 장 씨는 바다 쪽만 찾는 청년에게 버럭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택시를 시청 뒤, 대동여인숙 앞에 세웠다. 요금 140원을 건네준 청년은 상자를 안고 내리더니 영도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밀수품이다!”
   장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차를 돌려 나오면서 시청 정문 옆에 붙은 광복파출소에 신고했다. 근무하고 있던 백일채 순경(당시 30세)은 파출소 급사 주병규 군을 먼저 그곳으로 보냈다.
  
   “어떻게 나왔나?”
   경남제빙 앞 해안통에 상자를 내려두고 서 있던 청년이 다가오는 주 군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바람 쐬러 나왔습니다.”
   “재미 보러 왔어? 연애하나?”
   괴청년은 거듭 농을 걸었다. 마음을 놓은 주군은 쪼그리고 앉으며 상자에 손을 댔다.
   “저리 비켜!”
   갑자기 청년은 화를 벌컥 냈다.
   백 순경이 현장에 나타난 것은 이때였다.
   “이게 뭐요?”
   “책입니다.”
  
   청년은 정복 경관 앞에서 한풀 꺾인 듯 공손하게, 그러나 불안하게 대답했다. 백일채 순경은 상자를 풀려고 허리를 굽혔다. 이것이 실수였다. 청년이 후닥닥 뛰어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을 먼저 붙들어두고 상자를 조사했어야 했는데 백 순경은 물건에 먼저 손대었다가 청년을 놓친 것이었다.
  
   백 순경은 청년을 뒤쫓았다. 청년은 진주식당 앞을 지나 찻길을 뛰어넘어 천사당 양과점 앞으로 해서 남포동 해안통의 어둠 속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이것이 범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때가 오후 10시10분. 백 순경은 허탕을 치고 돌아와 상자를 풀어보았다. 책 대신 구겨진 어린이의 시체가 나타났다. 입은 손수건으로 틀어 막혀 있었고 오른쪽 가슴엔 길이 25센티미터쯤의 과도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상자를 묶은 것은 파란색 나일론 끈. 칼은 오른쪽 제 3늑골의 연골부를 끊고 胸壁(흉벽)을 지나 왼쪽 心房(심방) 벽을 꿰뚫고 있었다.
  
   칼을 뽑지 않았으므로 출혈은 많지 않았다. 부산대학교 병리학교실 이선경 교수의 剖檢(부검)에 의해 직접 死因(사인)은 ‘흉강 내 출혈’로 밝혀졌다. 범인은 단 한 번 칼질로 그 소년의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경찰은 이날 밤 소년의 신원을 김근하 군으로 밝혀내고 수사본부를 사건 발생지 관할서인 서부경찰서 동대신동파출소에 설치했다.
  
   ‘진범 검거!’
  
  〈국제신보〉 변수갑 기자는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수사가 시작된 지 열닷새, 수많은 ‘유력 용의자들’이 나타났다간 사라져갔다. 그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경찰과 다른 신문사의 기자들을 상대로 밤 새워 취재전쟁을 벌였으나 용의자들은 모두 무혐의로 밝혀졌었다. 수사는 이제 迷宮(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건 발생 뒤 〈국제신보〉 사회부는 수사본부 근처 여관에 취재본부를 두고 경찰 출입 기자 7, 8명을 이 사건 취재에 투입했다.
  
   취재진의 중심은 서부서를 출입하는 변수갑 기자와 부산시경을 맡은 하윤락 기자였다. 변 기자는 그때 서른일곱 살, 부산의 일선 경찰서만 14년째 출입하고 있었다. 형사들은 물론이고 시내버스의 안내양들까지 키가 나지막한 그를 알아볼 정도로 변 기자는 ‘발로 쓰는’ 맹렬 사회부 기자였다. 하 기자는 市警(시경)의 간부들과 특히 인간관계가 좋아 핵심 수사정보를 곧잘 물고 왔으며 그래서 변 기자가 밑바닥에서 긁어모은 잡다한 정보를 보완하기도 했다. 사회부장은 법조 출입 기자로 명성을 떨치고 특히 ‘장경근 일본 밀항 사건’의 수사 때 장경근을 일본까지 태워다 준 선원을 부산 지검이 구속한 사실을 특종하여 이름을 날린 장철 씨.
  
   〈국제신보〉는 사건 발생 때부터 잘 나가기 시작했다. 친한 형사로부터 深夜(심야)에 연락 전화를 받은 하 기자는 마분지 상자가 버려진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기자가 됐다. 덕택에 그날 새벽 〈국제신보〉는 호외를 내어 상대지보다 한 발 앞서 이 사건을 알릴 수 있었다.
  
   사건 발생 뒤 한 번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변 기자는 11월2일 아침 이제는 맥이 풀린 것 같은 수사본부에 들렀다가 화끈한 정보를 얻었다. 그는 수사본부에서 內勤(내근)을 하며 수사 기록들을 챙기는 서무 요원들과 친했다. 이들로부터 그는 동부경찰서 한일민 주임이 ‘거의 틀림없는’ 용의자를 뒤쫓고 있다는 귀띔을 들었다. 변 기자는 용의자의 이름을 얻어냈다. 동대신동 2가에 사는 전경렬(가명·당시 20세). 변 기자는 전 씨의 집을 찾아갔다. 수사본부에서 왔다고 속임수를 쓴 뒤 전 씨의 부모에게 사진을 내놓으라고 했다. “사진과 책, 공책, 옷가지까지 당신네들이 몽땅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그들은 되물었다. 변 기자는 그제야 한 주임 班(반)이 전 씨를 연행해갔고 가택 수색까지 끝냈음을 알았다. 변 기자는 전 씨가 졸업한 경남상고의 앨범이 남아 있는 것을 겨우 발견, 그의 얼굴 사진을 오려 내 왔다.
  
   변 기자는 수사본부에 돌아와서 한일민 주임 班(반)뿐 아니라 그와 함께 차출된 동부서 천현준 주임 반 요원들까지 모두 증발해버렸음을 알아냈다. 한, 천 두 주임이 새벽에 만나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서로 축하하는 악수를 교환하고 황급히 나가더란 얘기도 들어왔다. 변 기자는 취재진을 풀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한일민 주임을 뒤쫓기 시작했다. 집요한 기자들의 추적은 이날 밤 늦게까지 계속됐다. 그들은 경찰서, 파출소, 여관, 호텔 등을 뒤지며 돌아다녔다.
  
   한편 한주임 반의 형사 일곱 명은 기자들의 눈을 피해 전 씨를 데리고 여덟 군데의 파출소와 여관을 옮겨 다니며 그를 신문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용케 수사반이 머물렀던 여관이나 파출소에 들이닥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몇 시간 전에 나갔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남부서 대연파출소 2층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갔을 때도 형사들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어디론가로 ‘떴다’는 것이었다. 기자들은 대연파출소 근처의 파출소와 여관을 이 잡듯 뒤져갔으나 형사들의 꼬리를 잡을 수 없었다.
  
   변 기자는 자정을 넘기고는 추적을 포기했다. 비록 한 주임을 붙들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거의 틀림없는 범인을 쫓고 있다’는 心證(심증)은 더욱 굳어졌다. 더구나 이 ‘극비 수사 진전’을 다른 기자들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변 기자는 이 특종거리를 부장에게 보고했다. 그동안의 추적 과정에서 주워 모은 정보의 조각들을 끼워 맞춰 “전 씨가 자백을 했고 그는 근하 군의 전 과외가정교사였으며 증거물도 이미 압수한 것 같다”고 보고했다. 장철 부장은 이 特種(특종)을 號外(호외)로 빛내기로 결단했다. 변 기자는 기사를 썼다. 200자 원고지 석 장분의 짤막한 기사였다. 이때 장철 부장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사진에 직접 확인한 정보가 아니란 점이 노련한 사건기자를 불안케 했다. 그는 변 기자에게 다시 한 번 확인해보라고 지시했다. 변 기자는 새벽에 수사본부로 달렸다. 수사본부장 이수태 부산시경 수사과장과 단독 면담에 들어갔다. 단도직입으로 변 기자는 다그쳤다. 본부장은 말했다.
   “범인이란 심증은 간다. 그러나 증거물을 확보하지 못했다, 하루만 더 기다려주면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내겠다.”
  
   변 기자는 장 부장에게 전화를 했다. “범인이 틀림없습니다. 윤전기를 돌리십시오!”
   변 기자는 眞犯(진범)이란 보증은 받지 못했지만 자신의 肉感(육감)을 믿고 도박을 건 것이었다. 본부장의 ‘심증이 간다’는 말은 ‘범인인 것 같다’는 느낌과 같은 뜻이다. 증거물이 없는 상황에서 이 ‘느낌’은 아무런 有罪(유죄) 입증 자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기자와 경찰의 길이 갈라진다. 경찰은 공소유지를 할 수 있는 증거를 갖춰야 용의자를 구속할 수 있지만 언론계의 구조와 생리는 ‘확신’만 갖고도 기사를 쓸 수 있게 하고 있다. 경찰은 ‘자백’ 이외에 증거물이란 객관적 자료를 가져야 범인으로 단정하지만 기자들은 心證(심증), 곧 확신이란 주관적 자료만 갖고도 곧잘 단정을 내린다.
  
   〈국제신보〉는 호외를 인쇄했다. 3일 새벽 街販(가판) 소년들은 호외를 뿌리고 다녔다. 〈국제신보〉의 맞수인 부산일보사 앞에, 수사본부 앞에, 시경 앞에 한 뭉텅이씩의 호외가 뿌려졌다.
  
   ‘근하 군 살해 有力(유력) 용의자 체포’라고 기사를 썼더라면 그것은 당시 수사상황의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사로는 여러 번 有力 용의자들이 사회면을 화끈하게 장식했다가는 무혐의로 풀려나가곤 하던 그 즘의 신문 분위기에선 호외감이 될 수 없었다. 호외는 용의자 아닌 범인 체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호외의 새까만 커트 제목은 ‘근하 군 살해 진범 체포’라고 외치고 있었다. 전 씨의 이름은 물론, 앨범 사진도 박혀 있었다. 범인을 더 강조한 ‘진짜 범인’, 이 ‘眞犯(진범)’이란 신문 용어는 ‘가짜 범인’도 있다는 것을 은연중 反證(반증)하는 낱말이기도 했다.
  
  
  (계속)
[ 2020-07-06, 16: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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