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범’들의 허위 자백 폭로
[實錄연재]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9)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편집자注―‘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는 1981~1982년에 걸쳐 월간 〈마당〉에 연재 후, 1987년 한길사에서 나온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 포함되었다가 2011년 조갑제닷컴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현재는 절판)되었다. 조갑제 기자가 가장 애착 가는 기사로 꼽은 이 글을 조갑제닷컴에 재연재한다.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3장 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①

  
  
  교도소에서도 곤드레만드레
  
   일곱 남자의 운명과 그들 가족 수십 명의 명예가 걸린 ‘근하 군 살해 사건’ 재판은 1968년 8월26일 오전 10시 부산지방법원 법정에서 그 세 번째 공판을 맞았다. 이날의 주제는 김금식 씨의 대구교도소 1일 불법 출소 문제였다. 이원형 검사는 김 씨를 범행일 하루 동안 외출 보내준 혐의로 구속 기소된 대구교도소 직원 여광석, 이석연, 고화욱, 정시식 피고인 등 네 명을 신문했다. 이들 피고인은 기소 전 검찰 신문에서 자신들의 범행을 자백했다. 뿐 아니라 기소 뒤 담당 판사가 증거보전 관계로 여 교도관을 신문했을 때도 그는 김금식 씨의 불법 출소를 도와주었다고 시인했었다.
  
   그러나 이날 네 피고인은 태도를 표변, 검찰의 기소 사실을 딱 잡아떼기 시작했다. 검사가 “전번에는 왜 그렇게 진술했느냐”고 따지자 李 교도는 “검사의 강압에 의해서 그랬다”고 답했다. 그는 또 "김금식의 얼굴조차 모른다“고 말했다. 교도관들은 왜 이처럼 ‘범행 시인’에서 ‘범행 부인’으로 돌아서버렸는가?
  
   여 교도관은 뒤에 이렇게 말했다.
   “검사가 나를 간첩 사건과 자꾸만 연루시키기에 정신을 잃고 엉터리 자백을 했었다. 1회 공판 때 나는 간첩 사건에 관련되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알고 어리석은 자백을 뉘우쳤다. 나는 기소 뒤(공판 시작 이전) 판사가 증거보전 관계로 검사와 함께 교도소에 와 ‘돈 만 원 때문에 그런 엄청난 짓을 할 수 있는가? 무슨 내용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뒤에 밀수를 하면 한번 봐달라고 한다든지…’라면서 고새를 흔들기에 김 검사와 함께 옆방에 가서 ‘영감님, 이렇게 말하면 석방시켜준다고 하기에 그렇게 했는데 뭡니까?’고 대들기도 했었다.”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신세를 망치는 것보다는 저지르지도 않은 대수롭지 않은 범행을 시인해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그들은 검사가 말한 ‘간첩 사건’은 존재하지도 않은 일임을 뒤늦게 알아차리자 ‘용기’를 되찾고 허위 자백을 부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검찰은 곤경에 빠진 것같이 보였다. 이럴 때마다 그들은 기댈 곳을 갖고 있었다. 믿음직한 김금식 씨―. 그는 이날 검사의 신문에서 자신의 불법 출소 과정을 술술 불러댔다. 변호인단의 반대 신문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서윤학 변호사의 반대 신문이 점심시간을 넘기자 그는 “변호는 돈 받고 하는 일인데 남의 사정(배고픔)도 모르고 속행이냐?”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9월2일에 열린 4차 공판에서도 김금식 씨는 검사들을 싸고도는 철옹성 구실을 다했다. 그는 검사가 제시한 증거물―마분지 상자, 노끈, 칼이 범행 때 사용된 것임이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金 씨의 國選(국선) 변호인이 “다른 공범 세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데 하필 교도소에 있는 자네를 빼내 가담시키려 했을까?”라고 따지자 김금식 씨는 “그들은 나를 가담시켜 알리바이를 조작, 완전범죄를 성립시키려 했다”고 답했다.
  
   이렇게 검찰 측에 고맙게 대하는 金 씨는 교도소 안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감방 안에서도 수갑을 차고 면회마저 일체 금지돼 있었던 최형욱 씨의 말을 들어보자.
   “김 씨는 감방 안에서 주인처럼 멋대로 행동했다. 우리한테 적용되는 규율은 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官食(관식)은 먹지도 않았고 누가 넣어주는지 私食(사식)만 먹었으며 술에 취해 고래고래 고함을 칠 때도 있었다. 인원 점호도 안 받고 낮잠은 멋대로 잤다. 기분이 틀리면 ‘교도소장 오라!’, ‘검사 불러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으나 교도관들은 그를 깍듯이 대했다. 나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바싹 말랐지만 그는 피둥피둥 살찌고 있었다. 나는 그런 꼴불견을 대할 때마다 속이 뒤집혔으나 그것이 어디 처음이었던가? 기소 전 대구교도소 현장검증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기차간에서였다. 김태현 검사가 김금식과 정대범에게 맥주를 권하고 세 사람이 서로 ‘야, 금식아’, ‘잘 모셔야 한다’, ‘김 부장님 한잔 하십시오’라면서 다정스럽게 술잔을 주고받지 않는가. 살인 피의자와 검사의 술자리, 그건 참 희한한 장면이었다.”
  
   흔들리는 김금식의 마음
  
   김금식 씨는 어떤 면에서는 법의 세계와 그 생리를 검사보다도 더 소상하게 읽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 대가 없이 검찰에 봉사할 그런 쑥맥은 아니었다.
   <4회 공판을 끝낸 다음 金 검사와 나는 ‘묵계’를 맺었다. 그는 ‘공판이 끝날 때까지 순순히 범행을 시인하면 사형을 시키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유괴살해범이 살아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이 더 산들 무엇하겠느냐? 다만 死後(사후) 처리할 돈을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김 검사는 이 사건에 현상금 130만 원이 걸렸는데 그중 30만 원을 떼어주마고 했다. 5회 공판 직전 어느 날 이모와 나는 검사실에 불려갔다. 이모는 소위 ‘묵계’의 입회인이 될 참이었다. 그러나 김 검사는 이모에게 느닷없이 이모부의 과거를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이모는 기겁을 했다. 이모는 나를 향해 ‘이놈아, 죽어도 너만 죽어라’고 소리쳤다.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이모는 현상금이고 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이 사건 중 나는 이때 가장 큰 슬픔을 느꼈다.”(1969년 12월10일 <국제신보> 김 씨 수기)
  
   그 이모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김금식 씨에겐 친어머니나 같았다. 홀어머니가 있긴 했으나 生計(생계)를 잇는 데 지쳐 아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고 김 씨 이모의 따뜻한 정을 더 받고 자랐다고 한다. 이런 이모의 저주 섞인 부르짖음은 김금식 씨의 가슴에 깊은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서윤학 변호사가 은밀히 김금식 씨의 설득에 나선 것은 이즈음이었다. 徐 변호사는 네 교도관들의 변호사로 선임돼 있었으나 김 씨의 자백 번복이 없는 한 최형욱, 김기철 씨는 물론이고 네 교도관들의 무죄 입증은 매우 어렵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피고인들 가족은 두 명의 서로 다른 변호인을 뽑았고 國選(국선)변호인 한 명이 추가돼 모두 세 변호사가 이 사건을 맡게 됐으나 사건의 성질상 따로따로 변호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세 변호사는 하나의 변호인단처럼 기능하게 됐다. 그 핵심은 徐 변호사였다. 그는 6척 장신에 서글서글한 얼굴을 한 전직 검사였다. 그는 1947년에 고시에 합격, 1964년까지 부산지검에서 일했다. 3·15 마산의거 때에는 고문 경찰관을 붙잡아 들이는 데 앞장서 상당한 인기를 모으기도 했었다. 김태현 검사와도 함께 오랫동안 근무,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아는 사이이기도 했다.
  
   徐 변호사는 여러 차례 교도소로 김금식 씨를 찾아가 ‘참말을 해달라’고 졸랐다. 그때마다 김 씨는 “나는 이제 참회하고 있는 몸이다. 기독교로 改宗(개종)하여 하느님을 믿고 있다”면서 코웃음만 치는 판이었다. 徐 변호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검찰 쪽의 논리구조는 김금식의 1일 불법 출소에 모든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불법 출소’는 김 씨의 자백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김 씨의 마음을 돌려놓지 않고서는 검찰의 그 방벽을 깰 수 없는 입장이었다. 마침 김금식 씨는 김 검사에게 형량을 십 년 밑으로 해주겠다는 각서를 써달라고 요구하고 있었고 김 검사는 각서만은 써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일 때여서 김 씨의 양심을 일깨울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최형욱 씨는 “그즈음 김금식 씨는 검사와 흥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소 전의 대구 현장검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간에서 나의 아내가 그를 달래며 ‘제발 참말을 해달라’고 애걸하다시피 했을 땐 눈도 껌벅하지 않았었는데 이즈음 재판정에서 만나면 ‘바른 말을 해버릴까?’라고 농담 같지 않은 말들을 슬쩍슬쩍 던지곤 했다”고 회고했다.
  
   “다음 공판에서는 참말 하겠소”
  
   9월16일의 5회 공판에서는 김기철 씨의 알리바이 문제가 주로 거론되었다. 서윤학 변호사는 근하 군이 살해된 10월17일 아침에 김 씨는 여느 때처럼 개금동 동일교통 주차장에서 배차일을 했다고 말하고 그 증거로 김 씨가 써넣은 배차표와 그 근방 식당의 외상 장부를 내보였다. 검찰 측의 기록에는 기철 씨가 17일 아침 대구로 올라가 불법 출소하는 금식 씨를 마중하는 걸로 돼 있었다.
  
   徐 변호사의 증거 제시에 대해 검사들은 조작된 장부라고 맞섰고 변호사는 “필적을 보면 알 것이다”고 반박했다. 이날엔 근하 군 시체가 든 마분지 상자를 들고 탄 범인을 시청 뒤 바닷가까지 실어다 주었던 택시 운전사 장태룡 씨(가명)가 증인으로 나왔다. 검찰은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있던 정대범 씨를 불러내 장 씨와 대질시켰다. 장 씨는 “정 씨가 그때 그 범인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徐 변호사의 반대신문에서도 같은 대답을 하자 서윤학 씨는 화를 버럭 냈다.
   “야, 이 새끼야! 너의 말 한 마디에 사람 목숨이 달려 있다. 너는 전에도 범인과 비슷하다고 해서 여러 사람들을 골탕 먹이더니 오늘은 누구를 죽이려 하느냐!”
   성격이 느긋한 徐 변호사도 이때만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장 씨는 이미 근하 살해 사건 뒤 18일 동안 경찰에 끌려 다니면서 전과자 사진 150여 장과 용의자 100여 명과 대면하는 바람에 한때 정신 상태에 혼란을 겪기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그쯤 되면 진짜 범인이 나타나더라도 못 알아보기가 십상이다. 장 씨는 어찌된 영문인지 근 1년이 흐른 이날 법정에서는 정대범 씨가 범인임에 틀림없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이날 공판엔 박태형 씨도 증인으로 나왔다. 그는 출소하는 금식 씨를 마중 나가 목욕을 시키고 팬티를 갈아입게 한 것은 1967년 10월17일(검찰 주장)이 아니라 그해 11월17일이었다고 말했다. 김금식 씨는 이 말에 화를 내더니 “끝까지 거짓말을 한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고 朴 씨를 타이르기도 했다. 1심 재판은 이제 김금식 씨의 불법 출소 여부를 가리는 데 초점을 굳히고 있었다.
  
   재판부는 10월11일 대구교도소에서 현장검증을 했다. 이 자리에서 변호인단은 몇 가지 날카로운 반론을 제기했다. 검찰 조서에 따르면 여광석 교도는 운동장에서 목욕 대기 중이던 김금식 씨를 불러내 교도소 바깥으로 빼돌린 것으로 돼 있었다.
   徐 변호사는 “그렇다면 김 씨는 팬티만 입고 불법 출소했다는 말이 아닌가?”고 따졌다. 목욕 대기중일 때는 죄수들을 겉옷을 벗게 돼 있음이 현장 검증에서 드러난 것이다. 이에 대해 김금식 씨는 지금까지의 진술을 고쳐 “여 교도가 불러서 1사 14방에 다시 들어가 죄수복을 입고 나왔다”고 말해다. 변호인단에선 또 교도관이 색안경에 私服(사복) 차림으로 근무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검찰 조서에 나타난 김금식 씨의 진술을 반박했다.
  
   정대범 씨도 변호인단의 공격을 받았다. “여 교도의 손에 있는 흉터까지 기억할 수 있는 정 씨의 기억력을 시험해보자”고 변호인단에서 걸고 들어간 것이다. 변호사들은 먼저 정 씨에게 “대구역에서 부엉이집(범행모의 장소)까지 찾아가 보라”고 했다. 鄭 피고인은 머뭇거렸다. “그러면 달성공원에서 부엉이집까지 찾아가 보라”고 했다. 鄭씨는 할 수 없이 찾아가는 시늉을 했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길을 잡아, 보는 이들을 실소케 했다.
   검사들은 궁지에 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김금식 씨가 나서 그들을 곤경에서 건져주었다. 변호사들이 뭐라 하든 김 씨는 자신의 불법 출소 과정을 거침없이 재연해보였다. 徐 변호사가 꼬치꼬치 따지자 “아무 것도 모르면서 억보소리 하지 마소!”라고 대들기까지 했다.
  
   김금식 씨는 장판교를 지키는 장비처럼 완강하게 변호사들의 화살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는 일류 변호사들의 예리한 공격이 뚫을 수 없는 방패요 난공불락의 성벽이었다. 그가 버티고 있는 한 검사들은 그 성채에서 안주할 수 있으며 변호사들이 찾아내려는 진실 확인의 길은 차단될 터였다. 재판은 질질 끌었다. 9회 공판이 열린 것은 10월21일, 1심 재판이 시작된 지 만 석 달이 흘렀다.
  
   신문들은 재판 기사를 3, 4단으로 작게 취급, 이 재판에 흥미를 잃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기자들이나 독자들이 워낙 ‘출소했다’, ‘안 했다’란 엇갈린 얘기를 많이 듣고 있었으므로 근하 사건이라면 ‘알쏭달쏭’이란 낱말이 연상 작용으로 떠오를 지경이었다. 9회 공판에선 김금식 씨와 같은 감방에 있었던 백 모 씨가 증인으로 나타났다. 그는 1967년 10월17일 밤 김 씨와 함께 감방에서 잔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증언, 불법 출소 주장을 부정했다.
  
   이제 김금식 씨 혼자만을 빼놓고는 모든 사건 담당자나 관계자들이 김 씨의 불법 출소 주장을 부정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본인이 불법 출소 했다는 데야…. 더구나 그렇게 말하면 자신이 사형을 당할 것임을 알고도 그러는 데야…. 제가 죽을 자백을 기꺼이 하는데 그 자백이 설마 거짓일 리가 있겠는가. 아무래도 범행을 부인하는 피고보다는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는 피고를 더 믿게 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때문에 金 씨가 계속 자신의 불법 출소를 고백하는 한 아무리 反證(반증)이 많이 나타나도 결정적인 타격은 줄 수 없는 법이었다. 9회 공판에서 金 씨는 지나가는 말처럼 기자들에게 말했다.
   “다음 공판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하겠소.”
  
  
  (계속)
  
[ 2020-07-17, 11:0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