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절대로 범인이 아닙니다”
[實錄연재]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7)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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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注―‘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는 1981~1982년에 걸쳐 월간 〈마당〉에 연재 후, 1987년 한길사에서 나온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 포함되었다가 2011년 조갑제닷컴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현재는 절판)되었다. 조갑제 기자가 가장 애착 가는 기사로 꼽은 이 글을 조갑제닷컴에 재연재한다.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2장 인형극 ③

  
  
  金 검사의 심리
  
   ‘희대의 민완 검사’로 세상에 알려진 김태현 검사 팀이 어떻게 하여 초등학교 졸업생 김금식 씨의 각본에 그토록 쉽게 말려들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김금식 씨와 정대범 씨를 뺀 나머지 네 피의자는 처음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들 중 세 피의자는 나중에 ‘이상 분위기’ 속에서 허위 자백을 했지만 김기철 씨는 모진 신문에도 굽히지 않고 시종일관 범행을 잡아떼고 믿을 만한 알리바이까지 제시했다. 金 검사 팀은 이들 다수의 ‘범행 부인’은 묵살하고 오로지 김금식 씨의 좌충우돌 횡설수설하는 자백만을 굳게 믿고 그에 따라 움직였다. 김금식 씨가 ‘아!’ 하면 검사들은 ‘어!’ 하는 식으로 협조 분위기 속에서 범인들을 얽어갔다.
  
   검찰이 확보한 네 명의 ‘살인범’은 서로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금식 씨와 기철 씨 사이만은 친구). 그런 사실을 검사들은 대질 신문에서 알았을 텐데 그것도 묵살해버렸다.
   김금식 씨의 각본은 결코 치밀하지 못했다. 그는 검찰 진술에서 스무 번도 넘게 범행의 핵심 사실을 번복하거나 추가하고 수정했다. 대구교도소 출소 날짜, 범행 동기, 범행 도구의 구입 장소 따위 결정적인 부분에서 그의 진술은 오락가락 갈팡질팡했다. 그래도 엘리트 검사들은 이 김금식 씨를 믿으면서 순덕이 김기철 씨를 믿지 않으려 했다(혹은 그런 것처럼 행동했다).
  
   金 검사의 심리상태에 대해 김금식 씨는 뒤에 이런 평을 했다.
   “우리가 자백한 뒤의 수사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범인일 수 없다는 確證(확증)이 몇 번이나 있었으나 金 검사는 그때마다 억지 해석으로 범인으로 맞추어 들어가는 인상이었다. 너무 지나치게 우리를 범인으로 믿은 나머지 일종의 자기최면에 걸린 듯했다. 그러자니 그의 수사도 자연히 하나의 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 金 검사는 숱한 실수를 저질렀다. 자질구레한 지엽적인 문제에 너무 연연한 것도 그 하나였다. 나의 됨됨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면 처음부터 내가 범인이 아니란 것을 알았을 것이다. 나는 군 복무 당시를 합해 네 번의 前科(전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거기엔 계획된 범죄라곤 한 번도 없었다. 나의 전과는 모두 술에 취해 저지른 우발적인 범죄였다. 폭행에는 한 번도 흉기를 사용한 일이 없었다. 그런 내가 그렇게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범죄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국제신보> 1969년 12월10일, 15일)
  
   이즘, 그러니 金 검사의 수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인 1968년 5월 중순 부산지검 출입 기자들은 냄새를 맡았다. 부산지검엔 열대여섯 명의 기자들이 출입하고 있었다. 거의가 사건기자 경력 십 년 이상의 고참들이었다. 수사 진행 상황을 눈치 채기는 했으나 기자들은 깊게 파고들지 못했다.
  
   그때 <국제신보> 기자였던 설영우 씨(뒤에 신발 수출 회사 대표)는 “검찰 측에서 대외비 사건이라고 하는 바람에 본격적인 취재를 할 수 없었고 상세한 보도도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런 수사의 중간보도는 기자들 사회에선 금기로 돼 있었다. 기자들은 그러나 수사 진행상황을 지켜보며 공식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경렬 씨 수사로 곤혹을 치렀던 한일민 경위는 5월 말 어느 날 정석모 부산시경국장의 부름을 받았다. 정 국장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서는 “검찰이 근하 사건을 해결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 국장은 ‘근하 살해범 일망타진’의 발표가 임박했다는 정보를 검찰 아닌 다른 수사기관에서 듣고 이 사건에 가장 밝은 韓 주임을 불러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韓 주임은 형욱 씨가 구속됐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로 해서 검찰 수사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韓 주임은 형욱 씨 등을 다루었던 기관의 수사요원들을 만나보았다. 주로 韓 주임이 범행과 관계된 여러 가지 세부적인 질문들을 꼼꼼하게 던졌다. 그런 뒤 그는 높은 사람들 앞에서 거침없이 장담했다.
   “이들은 절대로 범인이 아닙니다.”
   며칠 뒤인 5월29일 드디어 뚜껑이 열렸다. 석 달 동안 은밀히 수사한 전모가 발표된 것이었다. 공식발표는 김태현 부장검사가 했다.
  
  영웅이 된 검사, 장단 맞춘 언론
  
   <국제신보>와 <부산일보>는 ‘근하 군 살해범 일망타진’ 기사를 1면 및 사회면 머리기사로 다루었고 대부분의 중앙지도 사회면 머리기사로 취급했다.
   <국제신보>는 검찰이 최형욱, 김기철, 정대범, 김금식 등 네 명을 붙들고 박영태는 수배 중이라고 보도한 뒤 이렇게 써나갔다.
  
   <이 사건의 主犯(주범)은 한때 용의선상에 떠오르기도 했던 최형욱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두 번 다시 실패를 범하지 않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김금식 씨의 신병을 확보, 수사를 전개하다가 지난 5일 김기철을 절도 혐의로, 지난 15일엔 최형욱을 폭력 혐의로 구속 수감하는 한편, 16일엔 정대범을 체포, 수사에 개가를 올렸다. 수사진은 밀양에 있는 정대범의 집에서 범행 때 입었던 밤색 잠바와 바지 및 티셔츠를 증거물로 압수했다. 사건 당일 범인을 봤다는 파출소 순경, 사환 등 증인들과의 대질 신문도 끝났다. 이들의 범행 동기는 돈이었다. 이들은 시체를 버린 뒤 협박장을 박영태가 근하 집으로 보내면 主犯 최가 근하 집에서 100만 원을 내주도록 사주할 계획이었다.
  
  범행 당일 금식과 기철이는 범일동 시장 안에 있는 고물상에 가서 30원 주고 볼 박스를 구입(칼과 노끈의 출처는 자백을 안 했다), 범천2동 기철의 집에 운반해두었다가 정대범을 먼저 근하 집 근처로 보낸 다음 오후 늦게까지 구름다리 아래 돼지 국밥집에서 술을 마셨다. 금식과 기철이는 칼, 노끈, 볼 박스를 코로나 택시에 싣고 오후 9시20분께 보수동 검정다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들은 대범에게 칼 등을 건네주었다. 기철은 대범에게 피를 흘리지 않도록 두 번 찌른 뒤에 칼을 뽑지 말고 그냥 꽂아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는 두 명은 달아났다.
  
   대범은 집으로 돌아오는 근하 군을 발견, 오른손으로 목을 조르고 왼손으로 가슴을 찔렀다. 이들은 潮流(조류)의 시간까지 계산, 시체를 영도다리 및 하수구 속에 버리면 밤 12시쯤 5노트 속도의 해류가 시체를 휘감아 대마도까지 흘려보낼 것으로 예상, 완전범죄를 꾀했다.>
  
   <국제신보>는 또 <검찰이 이들의 점조직을 푸는 데 진땀을 흘렸다>고 보도했다. 범인들끼리 가명을 사용했고 서로 얼굴도 모른다고 했다. <박영태와 최형욱이 主犯(주범) 그룹을 이루었고 하수인 정대범의 위에 김기철과 김금식이 붙어 있었다. 대범은 범행 당시 ‘기영’이란 이름을 썼고 기철은 ‘한영식’이란 가명을 썼다.>
  
   신문들은 검찰 발표문을 그대로 보도한 다음엔 화살을 최형욱 씨에게 돌렸다.
   “외삼촌은 비정했다. 죄짓고는 못 사는 세상인 것을…”(<국제신보> 사회면 머리기사 제목)
   “외삼촌이 그럴 수가… ‘돈이 그리 아쉽던가’”(<부산일보> 사회면 머리기사 제목)
  
  두 신문은 최 씨의 사생활과 매부와의 관계를 한참 과장한 다음 “거짓말 탐지기에도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을 만큼 그의 심장은 대담했다”느니 “진주에서 철근 군 유괴사건의 범인이 잡혔을 때는 본사 기자를 찾아와 진주 범인이 근하 살해범이 아니냐고 묻기까지 했다”(<국제신보>)면서 그의 철면피(?)를 비꼬고 근하 어머니를 등장시켜 오빠를 매도하게도 했다.(<부산일보>)
  
   <부산일보>에 실린 ‘나는 오빠를 저주한다’는 제목의 ‘근하 어머니 崔 여사 수기’는 최형욱 씨 규탄극의 압권이었다. ‘手記’라고 해놓고 글의 끝에는 ‘文責在 記者’(문책재 기자)라고 써붙이는 모순을 드러낸 이 수기는 아마도 기자가 근하 어머니의 말을 재구성하여 엮은 것 같다. 따라서 얼마나 崔 여사의 말을 진실되게 전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최형욱 씨의 부인에 따르면 근하의 부모는 공식발표 이전에 수사 진행과정을 대강 전해 듣고 있었으며 형욱 씨가 범인이란 검찰 측 주장을 크게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문에도 그런 흔적이 군데군데 엿보인다.
  
   <근하 군 아버지와 어머니는 범인이 잡혔다는 말을 기자들로부터 전해 듣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반신반의의 표정을 지었다. …근하 어머니는 ‘왜 범인들이 우리 애를 택했을까요?’라고 반문하기도 했다.>(<국제신보>)
  
   최형욱 씨 다음으로 과장과 왜곡의 祭壇(제단)에 올려진 속죄양은 순진한 김기철 씨였다. 남에게 손찌검 한 번 한 적이 없는 그는 “교통부 로터리 근방에서 노는 깡패”에다가 “國卒(국졸)의 실업자”로 소개됐고 “해병대 시절의 특수 교육 경험을 살려 살인 방법과 시체유기 방법을 하수인에게 가르쳐준” 악질 교사범으로 묘사됐다.
  
   신문들은 또 검찰 수사관들이 기철 씨를 연행하려다가 역습을 당해 위기일발의 상황이 벌어졌었다고 전하는가 하면 기철 씨를 하수인 포섭 책임자로 그리면서 완전범죄를 위해 정대범 씨까지 죽이려 했었다고 보도했다. 정대범 씨는 ‘여자 같은 손, 목소리, 얼굴 생김’으로 하여 냉혹한 살인마로 지탄을 받았다.
   악당이 있으면 영웅 또한 있는 법. 신문들은 김태현 검사를 한껏 추어올렸다. <국제신보>는 “흉악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 김 검사의 아들이 “범인들의 일당으로 보이는 괴한들로부터 유괴를 당할 뻔했다”고 보도했고 구영근 씨의 아이들도 같은 위협을 받았다고 전했다. 구 씨는 ‘미친 사람’이란 욕까지 들어가며 밤낮 없이 수사에 열중했다고 쓰기도 했다.
  
   현장검증과 흥분한 군중
  
   ‘刻苦(각고)의 영광’이란 수사 秘話(비화) 소개기사의 제목은 기자들도 이들 ‘2대 진범’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런 보도 태도는 한국 언론의 사실 인식과 진실확인의 수준과 도덕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기자들은 확정 판결 훨씬 이전의 ‘무죄 추정인’들을 ‘범인’이라고 불러 스스로의 언론 재판에서 有罪(유죄)를 확정 시켜버린 다음 그들이 범인이란 전제 아래서 기사들을 써갔다.
  
   최형욱 씨 등을 ‘범인’이라고 보고 있는 것은 검찰의 견해인데 기자들은 자신의 판단 기능을 일단 정지시키고 이 검찰의 견해에 그대로 편승한 것이었다. 이것은 언론이 스스로 진실확인 의무를 내버리고 그 의무를 검찰의 판단기능에 양도한 것과 같은 자세였다. 검찰의 판단에 잘못이 생기면 그것과 합치돼 있는 언론의 보도 방향도 뒤죽박죽될 터였다. 기자들이 검찰 발표내용을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 있긴 했다. 수사 과정의 취재가 부실했고 피의자나 그 가족들에 접근하지 못해 검찰 발표내용의 진실성을 검증할 만한 자료와 잣대를 미리 갖고 있지 못했다. 이와 함께 사회부 기자들이 갖고 있는 검찰에 대한 상대적인(경찰과 비교하여) 높은 신뢰도가 또한 그런 방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엔 확정 판결 이전에 형사 피의자를 어떻게 보도해야 하느냐에 대한 지침이나 기준이 한국 언론엔 확립돼 있지 않다는 점도 근하 사건 보도에서 착오를 빚게 한 요인이 됐다.
  
   몇몇 기자들이 의심을 갖기는 했다. 그때 합동통신의 검찰 출입기자였던 신상욱 씨는 “김금식 씨의 불법 출소 문제는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었다”고 했다.
   “아무리 교도 행정이 썩었다고 해도 그 정도로 부패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구나 만 원을 받기로 하고 그것도 외상으로 해서 하루를 외출 보내주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범행 내용이 너무나 정교하게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내용대로라면 범인들은 모두 천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뿐 아니라 다른 기자들도 의혹을 갖기 시작했으나 그것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못했습니다.”
  
   기자들보다 변호사들은 훨씬 자신 있게 이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최형욱 씨의 고모부는 부산의 한봉세 변호사를, 대구의 교도관 가족들은 대구의 박찬 변호사와 부산의 서윤학 변호사를 각각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최형욱 씨에 따르면 韓 변호사는 자기를 면회한 그 자리에서 바로 “공산당으로 몰았구나. 걱정할 건 없지만 1년은 고생해야 될 것 같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서윤학 변호사도 “기록을 검토해보니 단박에 피고인들이 무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더라”고 했다. 박찬 변호사(9대 국회의원 역임)는 녹음기를 들고 대구교도소로 찾아가 결정적인 반증을 확보했다. 그는 김금식 씨와 같은 감방에 있었던 세 복역수를 만났다. 세 사람은 한결같이 금식 씨가 외출했다는 1967년 10월17일에 그가 감방 안에 있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특히 서 모 씨는 김금식 씨가 감방 정리원이었기 때문에 더욱 똑똑히 기억한다고 했다.
  
  6월8일 <조선일보>가 처음으로 근하 사건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왔다. 검찰 발표 열흘 뒤의 일이었다. <조선일보>는 대구교도소 이원호 소장이 자체 조사를 실시, 불법 출소는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오히려 법무부 장관에게 항의했다고 보도했다. 이틀 뒤 김태현 검사는 대구교도소의 조사 결과는 행정책임을 면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의혹의 꼬리가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할 때 검찰은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6월12일 오전 6시부터. 현장검증이 범인 검거 발표 보름 뒤에나 이루어진 것도 퍽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날 부산의 두 신문은 또다시 처절할 정도로 흥분해 마지않았다. 사회면의 거의 4분의 3을 다 바쳐 ‘살해 장면’과 ‘군중의 저주’를 스냅 사진들을 곁들여 극명하게 소개했다. 사회면 제목들은 춤추고 있었다.
  
   ‘근하 군을 이렇게 죽였다’
   ‘흥분한 군중, 저놈들을 죽여라’
   ‘살해 장면 등 태연하게 再演’
   ‘바른대로 말하자고 서로 타일러’
   ‘사나이답게 바로 대라―발뺌하려 들자 하수인이 주범을 면박’
  
  칼질의 모순
  
   <부산일보>는 구경꾼들이 “짐승 같은 저놈들을 저렇게 데리고 다닐 것이 아니라 코를 꿰어 끌고 다녀야 한다”고 저주했다고 썼다. 또 정대범 씨를 ‘살인귀’라고 표현했다.
   이런 흥분, 저주, 분노의 소용돌이에 시선을 빼앗긴 기자들이 현장검증의 실상을 정확히 관찰할 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기사에는 그런 티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 현장검증 날은 피의자들이 처음으로 백일하에 공개된 날이었다. 기자들이 처음으로 ‘검사들의 통역’을 거치지 않고 바로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날 현장검증의 우등생은 정대범 씨였다. 그는 자신의 ‘범행’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김기철 씨가 ‘연극’을 거부하고 우두커니 서 있으면 대범 씨는 “네가 시킨 게 아니냐? 사나이답게 바로 해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대범 씨는 살해 장면과 시체유기 장면을 ‘얼굴 빛 하나 안변하고 태연히’ 연기했다. 그는 ‘자학적인 태도’까지 보이며 김금식 씨에게 “이왕 죄를 지은 몸이니 바른대로 말하라”고 타이를 정도였다.
  
   김금식 씨는 웬일인지 이날 몸을 도사렸다. 얼굴을 신문으로 가리고 사진기자들에게 욕을 퍼붓다가 대범 씨가 살해 장면을 연기할 땐 “담벼락에 붙어 서서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부산일보>)
  
   그는 ‘피둥피둥 살이 찐 건강한 모습’이었다. 감방에서도 수갑을 차고 있어야 했던 기철 씨나 형욱 씨와는 달리 그는 감방 안에서 好衣好食(호의호식)했던 것이다. 그는 부산진역에서 기철 씨 및 대범 씨와 만나는 장면에 와선 연기를 거부했다. 그가 공개적으로 검찰에 협조를 거부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현장검증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최형욱 씨가 현장검증에 끌려나온 것은 밤중이었다. 네 명의 연기자들은 두 패―꼭두각시와 사람―로 갈라졌다. 기철 씨와 형욱 씨는 “와본 적이 없다” “그런 건 모른다”고 현장검증을 끝까지 거부했다. 검사들의 노리개가 된 대범 씨와 금식 씨는 이런 기철 씨와 형욱 씨에게 욕설을 퍼붓고 빈정대기도 했다. 낮에 현장검증을 거부했던 금식 씨는 밤에 와선 다시 적극협조자로 돌변해 있었다.
   그는 “낮에는 아는 사람들이 많아 그랬었다”고 했다.
  
   이 현장검증에서 서윤학 변호사는 主演(주연) 배우의 중요한 실수를 발견,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왼손잡이인 정대범 씨는 근하군의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은 다음 뒤에서 오른팔로 목을 조르고 왼손에 쥔 칼로 근하의 왼쪽 가슴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이 연기대로라면 칼자국은 왼쪽 가슴에서 오른쪽으로 뚫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근하 군 시체의 부검 결과, 칼이 오른쪽 가슴으로 들어가 왼쪽 아래 방향으로 꽂히면서 그 칼끝은 왼쪽 심장 벽을 뚫었음이 밝혀져 있었다. 곧, 정대범 씨의 현장검증 때의 칼질과는 반대 방향이었던 것이다.
   徐 변호사는 또 鄭 씨가 범행 때 입었다는 옷에서 핏자국이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 더욱 자신감을 굳혔다.
  
  
  (계속)
  
[ 2020-07-15, 09:4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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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건     2020-07-15 오후 11:42
엉터리 검사와 언론의 짝짝꿍이 저런 정도로 되네요.
인간의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다시 한번 느낍니다.
그래서 사실주의에 철저히 충실해야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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