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에 눈먼 검사가 만든 地獄圖(지옥도)
[實錄연재]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8)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편집자注―‘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는 1981~1982년에 걸쳐 월간 〈마당〉에 연재 후, 1987년 한길사에서 나온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 포함되었다가 2011년 조갑제닷컴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현재는 절판)되었다. 조갑제 기자가 가장 애착 가는 기사로 꼽은 이 글을 조갑제닷컴에 재연재한다.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2장 인형극 ④

  
  
   ‘불법 출소’ 싸고 공방전
  
   현장검증이 진행된 그날 대구發 통신 및 신문기자들은 김금식 씨의 감방 동료들 말을 인용, “김 씨가 범행 당일 출소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드러나 근하 사건 수사에 혼선을 가져오게 됐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를 물고 들어가면서 부산 신문과는 달리 ‘파문 속의 현장검증’이란 제목으로 짙어가는 의혹을 부각시켰다. 대구교도소 측에선 이날 여광석 교도는 정문 교도였고 기결수 감방은 홍원식 교도가 맡고 있었으므로 기결수를 여 교도가 불러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검찰을 반박했다.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검찰 측 견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던 부산 신문들까지도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국제신보>는 6월13일 사회면 머리기사로 ‘확대되는 파문, 김금식의 출소 여부’를 취급하고 엇갈리는 양쪽 견해를 대등하게 소개했다.
  
   이제 사태는 하나의 작은 드라마를 만들고 있었다. 검찰의 논리는 김금식 씨의 1일 불법 출소에 그 바탕을 두고 전개되고 있었다. 불법 출소는 말하자면 논리의 구조물을 떠받들고 있는 주춧돌이었다. 이 주춧돌이 뽑혀버리면 범인 입증의 논리구조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게 돼 있었다. 검찰로서는 이 위기를 어떻게 하든지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4일 김태현 검사 팀은 김금식, 정대범, 최형욱 씨를 데리고 대구교도소로 올라갔다. 현장검증을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김금식 씨는 한몫을 톡톡히 했다. 불법 출소의 과정을 훌륭하게 솔선해서 ‘재연’한 것이었다. 그 연기는 너무나 완벽하여 취재 기자들의 의혹까지 풀어줄 정도였다. 부산 두 신문의 의심스러워하던 태도도 바뀌고 말았다. <국제신보>와 <부산일보>는 다음날 이번엔 화살을 대구교도소로 돌렸다. “김금식의 불법 술소 사실은 재확인되고 대구교도소 측의 알리바이 조작이 탄로났다”는 것이었다. 金 검사는 “대구교도소의 알리바이 조작이 드러난 이상 관계자를 전원 입건, 조사하겠다”고 밝였다. 며칠 뒤 金 검사는 대구교도소의 교도관 두 명을 추가로 구속했다. 당시 부산문화방송 기자로 이 사건을 취재했던 강남주 씨(뒤에 부산 수산대학교 교수·국문학)는 이렇게 말했다.
  
   “부산의 현장검증에서 피의자들끼리 ‘했다’, ‘안 했다’ 하면서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대구교도소 측에서 불법 출소를 시킨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오자 이 느낌은 의혹으로 변했다. 그러나 김금식 씨가 대구에서 제 발로 불법 출소를 ‘재연’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했다. 사형을 각오하고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는데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김금식 씨는 행동으로써뿐 아니라 신념에 찬 대사로 검찰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나는 약한 교도관을 위해 불법 출소 사건만은 완강히 부인했으나 증거가 드러난 이상 발뺌할 수도 없다.”
   “나는 이제 생에 애착이 없는 사람이다. 근하와 그 가족에게 죄송할 뿐이다. 무고한 전 씨가 잡혀 고문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다. 죄를 뉘우치고 짧은 시간이나마 사람답게 살고 가고 싶다.”
   “지금 심정은 후련하기만 하다. 교도소에 들어온 뒤부터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마태복음>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정대범 씨도 김금식 씨에 못지않게 초연하게 말했다. “의심받을 정도로 범행을 순순히 자백하고 있는데…”라고 설영우 기자가 묻자 명언들을 쏟아놓았다.
   “나는 이미 죄를 뉘우치고 있다.”
   “사형도 각오하고 있다.”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보니 이제는 웃을 수 있다.”
   “이번 사건의 관련자들이 무죄가 되는 경우, 두 번 다시 이런 사건이 안 나도록 나는 그들(형욱, 기철 씨)을 죽이겠다.”
   “그들은 어린 나를 이용해 요 꼴로 만들어놓고 자기들만 발뺌하려 하고 있다.”
  
   이런 소리를 옆에서 맨정신으로 듣고 있어야 했던 최형욱 씨는 대구행 열차 안에서 <부산일보>의 검찰 담당 안병규 기자(뒤에 민정당 국회의원)와 이런 문답을 주고받았다.
  
   문: 왜 범행을 부인하는가?
   답: 외삼촌인 내가 근하를 죽일 리 없다.
   문: 그래도 자백을 했다는데.
   답: 검찰이 아닌 모 처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는데 그 문초에 못 이겨 자백했다.
   문: 다른 범인들을 아는가?
   답: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근하 아버지와 나 사이가 좀 미묘하니까 얽어두는 것 같은데 공판정에 가서 모든 걸 밝히겠다. 내가 무죄라는 알리바이가 다 있다. 법이 살아 있으니 무죄 될 줄 믿는다.
   문: 금식이와 대범이가 왜 당신을 끌고 들어갈까?
   답: 제 놈들이 죽을 죄를 지었으면 저들이나 죽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피살자 아버지에겐 밀수꾼 누명
  
   대구 달성동의 술집 ‘부엉이집’ 현장검증에선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崔 씨가 ‘연기’를 거부하고 “살인 모의를 이런 술집에서 할 수 있나?”고 냅다 소리쳤다. 그러나 아들 뻘 되는 대범 씨가 “조그만 새끼들을 꾀어 살인을 저지르게 한 놈이 무슨 거짓말이냐”고 대들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崔 씨는 수갑 찬 손으로 신발을 벗어 그를 후려쳤다.
  
   김금식 씨의 진술이나 검찰의 발표를 종합하면 근하 살해 조직의 괴수는 박영태 씨로 돼 있었다. 박 씨는 김금식 씨를 불법 출소시킨 장본인이며 범행 계획의 주모자이고 계획에서 실행까지 모든 편의를 제공한 막후 실력자였다. 그렇다면 모든 의문은 박 씨를 붙잡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었다. 불법 출소 與否(여부)의 시비가 검찰 측의 승리로 일단락되자 기자들은 박영태 씨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법무부가 ‘물의를 빚었다’하여 대구교도소 소장을 전주교도소장으로 좌천시킴으로써 일반인들에게까지 불법 출소의 진실성을 확인시켜주는 듯했으나 부산지검 출입기자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개운하진 못했던 것 같다.
  
   6월18일 <부산일보>는 박영태 씨가 밀수품 운반책으로 부산에서 암약하고 있다고 크게 보도했다. 그는 무기를 갖고 다니며 수십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이 신문은 사회면 머리에 또 근하 사건 관계기사를 올렸다. 김윤근 차장검사가 근하 살해의 동기를 발표했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의 요지는 이러했다.
   ‘박영태와 김기철은 밀수 특공대원으로 근하 아버지와 한패였으며 근하 아버지가 몫을 나눠주지 않아 이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 박, 김, 최 등 세 범인들은 정대범이 범행에 실패할 경우, 살인범으로 몰아 죽일 계획도 짰다.’
   다음날 검찰은 공소장을 발표했다. 이 공소장에서도 검찰은 기철 씨와 박영태 씨가 김용선 씨(注-근하 아버지)의 밀수품을 몇 차례 운반해주었으나 배신당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다고 했다.
  
   김용선 씨는 <부산일보>에 문제의 기사가 난 그날 검찰을 찾아가 이 범행 동기에 납득이 안 간다고 밝히고 “최형욱 씨가 아들을 죽일 만한 이유가 없다”고 했다(<국제신보> 1968년 6월20일). 이 문제는 피살자 가족의 명예와 관련되는 만큼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뒤에 밝혀지겠지만 박영태 씨와 김기철 씨는 김용선 씨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사람이다. 물론 두 사람은 밀수에 손댄 적도 없었다. 김용선 씨가 밀수했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다. 서윤학 변호사는 “그런 말이 공판 중에도 자꾸 나와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했으나 아무도 증거를 대지 못했다”고 말하고 범죄 피해자에 대한 무지막지한 명예손상이었다고 했다.
  
   아들을 잃고 ‘밀수꾼’의 누명까지 뒤집어쓴 김용선 씨나 그 가족의 원통함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만약 <부산일보> 기사가 사실이라면 그 범행 동기를 공판 청구 전에 공표한 검찰 간부는 형법 126조의 ‘피의 사실 공표죄’를 지은 셈이 된다.
   <형법 제126조: 검찰, 경찰, 기차 범죄 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지득한 피의 사실을 공판 청구 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 정지에 처한다.>
  
   물론 이 조항은 예나 지금이나 死文化(사문화)된 지 오래지만 김용선 씨의 경우에는 진실이 아닌 허위사실의 공개로 평생 씻을 수 없는 명예훼손을 당한 극단의 사례로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김윤근 차장검사는 <부산일보>에 문제의 기사가 난 다음날 “일부 신문에서 김용선 씨가 과거에 밀수를 했다고 공소장에서 단정한 것처럼 보도한 것은 사실과 다르며 아들마저 잃은 그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행위라고 검찰 입장을 해명했다”고 보도됐다(<국제신보>). 따라서 이 허위사실 유포의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는 가리기가 어렵다.
  
   ‘主犯’ 나타났지만…
  
   6월19일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검사와 기자들이 그토록 찾고 있던 박영태 씨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검찰청이 아니라 <국제신보>의 사회부 자리로 불쑥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대뜸 “나는 억울하다. 근하 사건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고 말했다.
  
   “나는 1967년 2월2일 장물 취득죄로 구속돼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에서 복역 중 김금식 씨를 알게 됐다. 나는 1967년 10월13일에 출소했다. 나오고 나서도 같이 고생한 정을 못 잊어 세 차례에 걸쳐 김금식 씨를 면회 갔었다. 면회 신청할 때는 전과자임을 숨기려고 나의 본명이 ‘박태형’인데도 ‘박영태’라고 기록했다(필자注-검찰이 이름을 잘못 알게 된 것도 이 면회부 기록 때문이었다).
   나는 김금식 씨가 만기 출소하는 1967년 11월17일에 교도소로 마중 나가 그를 나의 셋방에 데리고 와서 아침밥을 먹였다. 내가 잠시 나갔다가 오니 그는 아내에게서 1500원을 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만난 적이 없다. 1967년 9월 중순 범인들이 나의 집에서 범행을 모의했다고 하는데 그때 나는 감방 안에 있었고 나의 아내는 삯바느질을 하여 방을 비운 적이 없었으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김금식 씨가 불법 출소한 날(1967년 10월17일)에 나의 집에서 팬티를 갈아입었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그가 만기 출소한 11월17일에 갈아입은 것이다. 검찰이 나를 찾고 있다는 것도 며칠 전 신문을 보고 알았으며 나는 지금 대구에서 고물장사를 하고 있다.”
  
   이것은 검찰이나 다른 신문사의 기자들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돌발사였고 <국제신보>엔 굴러들어온 특종이었다. 마침 검찰은 바로 그날 박영태 씨를 主犯으로 서술한 공소장을 공개하면서 관련자 일곱 명(군인 정대범 씨는 軍裁로 돌려짐)을 기소했었다. 그 박영태가 홀연히 나타났으니 검찰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셈이었다. 거꾸로 기자들은 이 사건 수사결과를 완전히 뒤엎을 수 있는 결정적인 실마리를 붙든 것이었다. 박영태 아닌 박태형 씨의 말대로라면 김금식 씨의 불법 출소나 범행 모의는 거짓이며 김금식 씨가 불법 출소한 날에 했다는 행동의 상당 부분은 그가 출소한 11월17일의 행동을 옮겨다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었다.
  
   이 두 번째 위기에서 김태현 검사를 구한 것은 기자들이었다. 엄청난 특종을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빼앗긴 <부산일보>는 다음날 “박태형이 억울하다고 나선 것은 알리바이 조작극에 불과하다”는 검찰 측 견해를 소개하면서 오히려 검찰 대신 박태형 씨를 치고 나왔다. “검찰은 잠적한 박영태가 박태형을 시켜 박영태로 가장하여 나타나도록 꾸민 알리바이 조작극으로 밝혀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검찰은 박태형 씨를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하고 그를 통해 진짜 박영태의 거처를 알아내어 속히 主犯을 붙잡아 들여야 했다. 검찰은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포기하고 엉뚱하게도 절도 혐의로 박태형 씨를 구속해버렸다.
  
  ‘傳家(전가)의 寶刀(보도)’를 쥐게 된 <국제신보>도 어찌된 영문인지 그 미스터리를 더 추적하지 않고 주저앉아버렸다. 이렇게 하여 검찰의 기소 사실을 그 밑뿌리에서부터 뒤엎어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기자들은 스스로 팽개쳐버리고 말았다. “박영태의 검거만이 모든 의문을 풀어줄 것이다”고 썼던 기자들이 막상 그 사람이 나타났을 땐 왜 의문을 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부산의 기자들이 제대로 이 사건을 추적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는 결코 능력의 결함이 아니었다. 그때 이 사건을 맡은 기자들은 사건이 많이 나는 부산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고참들이었다. 그들 가운데서 나중에 교수, 국회의원, 실업가들이 많이 배출된 것만 봐도 ‘무능’을 탓할 수는 없다는 것을 示唆(시사)하게 한다. 근본 이유는 아마도 한국 언론의 구조적 문제점이나 부산의 특수 여건 및 기자들의 常軌(상궤)를 벗어난 경쟁 심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이 사건의 취재를 맡았던 한 기자는 “검찰이기에 그러한 무리 많은 수사가 가능했다. 경찰이었으면 기소도 못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기자들이 경찰을 대하는 태도로 검찰을 대할 수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경찰이 전경렬 씨 수사에서 실수를 하자 신문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우격다짐 수사를 비판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고통을 당한 검찰 수사에 대해선 비교적 얌전했던 사실이 언론과 검찰 사이의 미묘한 역학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부산은 비록 한국 제2의 대도시이지만 행정권이나 사법권의 측면에서 보면 ‘지방성’을 벗어나지 못한 점이 많다. 권력이 집중된 서울에서 서울지검이 차지하는 비중과 차관급이 행정공무원 중 우두머리인 부산에서 부산지검이 차지하는 무게는 같을 수 없었고 중앙지의 영향력과 부산 지방지의 영향력 또한 같지 않았다. 두 차례의 근하 사건 수사에서 그래도 날카롭게 의문을 제기하고 나온 것이 부산에서의 취재력이 <부산일보>나 <국제신보>에 비해 훨씬 약한 중앙지였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엿보게 하는 일이었다.
  
   이런 구조적 문제점과 함께 ‘박영태 출현’의 보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기자들이 경쟁지를 너무 의식하여 상대가 특종한 기사는 될 수 있는 대로 묵살하려 하는 태도도 진상을 파헤치는 데 장애가 됐을 것이다. 큰 사건이 터지면 기자와 수사관들의 力學(역학) 관계가 逆轉(역전)되어 수사관들이 優位(우위)에 서게 되고 기자들을 ‘갖고 노는’ 사태도 자주 빚어진다. 사건기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落種(낙종)’이다. 이 落種과 特種(특종)을 좌우하는 것이 정보를 쥔 수사관들이므로 이때만은 기자들도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기 어렵게 된다.
  
   근하 사건 수사에서 수사권도 없으면서 수사를 하고 있던 구영근 씨의 행각은 기자들이 마땅히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당시의 취재 기자 ㄱ 씨는 “우리는 속으로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가끔 그가 값진 정보를 흘려주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친한 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자백과 否認의 정면대결
  
   기자들이 포기하다시피 한 진실 확인의 책임은 이제 판사들에게 넘어갔다. 1968년 7월22일 오전 10시쯤 부산지법 제1호 법정에서 근하 살해사건의 첫 공판이 열렸다.
   재판장은 박정표 부장판사, 배석에 남용희, 정지형 판사, 네 교도소 직원들의 변호인엔 서윤학 씨, 최형욱 씨 변호인은 한봉세 씨, 김금식 및 김기철 씨엔 國選(국선) 변호인 이영호 씨, 관여 검찰관은 김태현, 이원형, 정경식 검사.
  
   첫 공판은 인정신문으로 간단하게 끝냈다. 섭씨 30도를 넘는 무더위 속에서도 수많은 방청객들과 기자들이 법정을 꽉 메웠다. 이 법정의 열기는 하나의 드라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의 사회부 기자들이 강력사건의 재판과정에 이처럼 집착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갖가지 의혹과 미스터리가 풀릴 곳은 바로 이 ‘正義(정의)의 법정’ 밖에 달리 없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고 있었다. 검찰이 진상을 가리려 아무리 애써도 변호인들의 공격 앞에선 될 일이 아니란 믿음을 그들은 갖고 있었을 것이다. 법의 공방전이 공평하게 펼쳐지기만 한다면 진실은 밝혀질 것이란 기대감과 법정에서 오가는 말들을 이제는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그들의 직업의식을 자극하였다.
  
   두 번째 공판은 8월12일에 열렸다. 이날엔 전경렬 씨 부자도 방청석에 나타났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그는 “저 악랄한 범인들 때문에 억울하게 매를 맞았다”고 원망했다는 것이다.
   이날 김태현 검사는 직접 김금식 씨를 신문했다. 김금식 씨는 범행모의, 불법 출소, 범행 경위를 청산유수로 시인했다. 그는 교도소에서 불법 출소한 날에는 근하를 죽이지 않고 유인하여 돈만 빼내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박영태와 김기철이 海流(해류)를 이용하면 시체를 감쪽같이 없애버릴 수 있다고 하여 완전범죄를 꾀하게 됐다”(<국제신보>)면서 두 사람을 극악한 살인자로 부각시켰다. 오후에 金 검사는 김기철 씨와 맞닥쳤다. 기철 씨는 검사가 ‘피고인’이라고 부르자 화를 냈다.
   “피고인, 피고인 하는데 그 말을 빼시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검사가 기철 씨의 직업을 無職(무직)이라고 하자 자신은 무직이 아니며 버스회사에서 일했다고 반박했다. 평소 남들 앞에선 말 한번 제대로 못하던 그는 검사들에게 소리치며 대들기도 했다.
   “이곳을 나가면 당신들과 금식이, 대범이를 무고죄로 고소하겠소!”
   기철 씨는 “모른다”, “그런 일 없다”, “상식 밖의 일이다”를 되풀이하며 검사의 공소사실 일체를 부인했다. 기철 씨에 이어 검찰 신문에 올려진 최형욱 씨는 더욱 거세게 반발했다. <국제신보>는 이렇게 썼다.
   <기철에 비해 최형욱은 더 발악적이었다. 평양 사투리를 속사포처럼 써가면서 검사의 질문과도 거리가 먼 설명조의 답변을 하다가 검사의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그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재판장 앞에서 바지를 걷어 올리고는 조사받을 때 고문을 당한 자리라고 흉터를 가리키면서 울상으로 호소했다.>
  
   이 취재 기자는 기철 씨와 형욱 씨의 이름 밑에서 존칭을 빼고는 형욱씨의 ‘항변’을 ‘발악’이라고 했고 ‘미친 사람’에 비유했으며 검사의 말은 ‘꾸지람’이라 했다. 기자가 어떤 관점에서 재판을 지켜보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용어 선택이었다. 이날 김금식 씨는 다음과 같은 회개의 심정을 밝혔다.
   “내가 죽어서 근하 군이 살아난다면 백 번이라도 죽어 근하를 살리고 싶다.”-‘2장 인형극’ 끝
  
  (계속)
  
[ 2020-07-16, 09: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이중건     2020-07-16 오전 11:51
누구나 죽어도 살아도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뼈저린 교훈을 주네요.
잘 읽었고 이런 기사를 취재하여 쓰심에 이사회를 건강하게하는데 큰 역활을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