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고문, 물고문, 구타… 자백할 것도 없어 미칠 지경”
[實錄연재]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6)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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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注―‘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는 1981~1982년에 걸쳐 월간 〈마당〉에 연재 후, 1987년 한길사에서 나온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 포함되었다가 2011년 조갑제닷컴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현재는 절판)되었다. 조갑제 기자가 가장 애착 가는 기사로 꼽은 이 글을 조갑제닷컴에 재연재한다.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2장 인형극 ②

  
  
  고문, 또 고문
  
   김금식, 정대범, 김기철 씨 등 세 ‘범인’을 확보한 金 검사 팀(金 검사 이외에 이원형, 정경식 두 검사가 이 수사에 합류했다)은 이제 이들을 조종한 主犯(주범)을 찾아 나섰다. 강력사건이 나면 피해자의 주변, 특히 친족들을 일단 의심해보는 것은 수사의 定石(정석)처럼 돼 있다. 근하 사건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에 경찰은 근하의 외삼촌, 그러니 근하 어머니의 오빠 되는 최형욱 씨(가명·당시 40세)를 용의선상에 올려놓았었다. 형욱 씨는 1·4후퇴 때 고향인 함경남도에서 월남했다. 먼저 내려왔던 여동생(근하 어머니)을 부산에서 만났는데 얼마 뒤 여동생은 같은 월남민인 김용선 씨와 결혼했다. 형욱 씨는 부두 노무자, 破紙(파지) 수집상으로 일하면서 여동생 집안과 가깝게 지냈고 김용선 씨로부터는 약간의 금전적 도움을 받기도 했다. 1962년 형욱 씨는 중매결혼을 했으나 곧 이혼을 했고 근하 사건이 났을 때는 초량3동에서 재혼한 아내 및 젖먹이 딸과 함께 어렵게 살고 있었다.
  
   1967년 10월 경찰 수사본부에서 파견 근무를 하던 한일민 주임은 형욱 씨를 의심하면서도 동향이란 연고로 해서 인간적으로 가까워졌다. 韓 주임은 “이왕 자수할 바엔 동향 사람에게 하여 특진시켜달라”고 농담 반 진담 반의 부탁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韓 주임은 형욱 씨를 모 수사기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 있던 거짓말 탐지기에 형욱 씨를 걸어본 것이었다. 거짓말 탐지기는 ‘형욱 씨의 결백’을 나타냈다. 끈질긴 韓 주임은 탐지기가 보여준 결과에 대해선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난 자네가 그래도 한 고향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이젠 할 수 없게 됐네. 이 기계가 자네의 진술이 거짓말이라고 탐지해내고 말았단 말이야. 기계가 설마 거짓말하겠는가?”
  
   형욱 씨는 펄쩍 뛰었다.
   “형님 한 번만 더 해봅시다. 혹시 기계가 고장 난 것 아닙니까?”
   형욱 씨는 韓 주임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한일민 씨는 그제야 형욱 씨의 결백을 확신하게 됐다. 거짓말 탐지기에 그토록 자신 있게 대들 수 있는 사람이 범인일 수는 없다는 육감을 믿은 것이었다. 그러나 김태현 검사는 韓 주임이 훑고 내버린 형욱 씨를 일곱 달 뒤 다시 주워 올린 것이었다.
  
   <김 검사는 최형욱 씨를 끌어넣었다. 이에는 특수한 방법을 썼다. 나(김금식)는 범행 동기를 추궁당했다. ‘돈이다’고 대답했다. 김 검사는 또 다른 동기가 있을 것이라면서 ‘공산당이 관련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깜짝 놀랐으나 최 씨의 혐의 중에 그런 것도 있구나 싶어 ‘그런 모양이다’고 대답을 얼버무렸다.>(<국제신보> 1969년 12월10일 김금식 씨 수기)
  
   검찰은 최 씨를 먼저 폭력 혐의로 5월15일에 구속했다.
   “문제가 된 폭행사건은 1년 전에 같은 집에 사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이미 서로 화해했으며 상처도 별로 없었다. 그들은 수사 시간을 벌기 위해 이 사건을 뒤늦게 캐내어 날 잡아넣은 것이다.”(형욱 씨의 말)
   김태현 검사는 형욱 씨를 먼저 다른 공안 수사기관에 보내 근하 사건에 공산당의 개입 여부를 조사하게 했다.
  
   “붙들려 와서 난생 처음으로 대범이와 금식이를 만났다. 생판 모르는 남자들이 신문을 받고 있는 나를 번갈아 힐끗 쳐다보더니 방을 나가버렸다. 둘은 검사에게 가서는 나를 알겠다고 말한 모양이었다. 한번은 빵모자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뒤에 금식인 줄 알았다)가 나타나더니 대뜸 ‘최 선생, 오랜만입니다’고 아는 체하는 것이었다. 나는 술 냄새와 마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오는 그의 입을 올려다보며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엔 자다가 끌려 나와 컴컴한 방으로 인도됐다. 근하의 제단이 모셔져 있었고 근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아저씨 놀러 가고 싶어, 응’
   ‘아저씨는 내가 미워? 왜 죽이지?’
   애원과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어리벙벙한 속에서 나는 ‘근하야 빨리 원수를 잡아 날 살려 달라’고 통곡했다.”(형욱 씨의 말)
  
   최 씨는 항소이유서에서 모 기관에서의 수사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피고인은 1968년 5월15일 부산 지방검찰청에서 폭행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 폭행도 1년 전에 있었던 사실을 갖고 구속당한 것입니다. 그 후 약 2주일이 지나서 검찰에서 소환하기에 오후 6시경에 나갔습니다. 검찰에 도착하니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지프차에 모르는 사람 2명과 함께 태웠습니다. 車內(차내)에 들어가니 무조건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어디인지 가더니 下車(하차)하라기에 하차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수건으로 눈을 가리운 채 계단으로 내려가면서 하는 말이 솔직히 말하라 하기에, 무슨 말을 할까 하니, 모르느냐 하기에, 모른다고 하였더니, 그냥 어디인지 몰라도 문소리가 나더니, 들어가라기에 들어갔습니다. 무조건 공산당에게서 갖고 온 암호문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여 나는 그런 사실 없다고 말하니 무조건 내가 생각하기에 5, 6명이 나를 고문하기에 나는 그런 사실 없다고 수차 말했습니다만 고문은 더 심해가기만 하고 그래서 기절하고 일어나서 있으니 그제야 수건을 풀고 좀 있다가 지금 보니 정대범이란 아이를 지하실까지 데리고 와서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야 이 새끼야, 서면 300번지에서 배우라고 보인 암호문을 내놓으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냥 데리고 나가더니 또 고문을 시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그런 사실 없으니 없다고 하니, 왜 저 아이는 있다고 하고 너는 거짓말한다고 무조건 고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아이를 다시 대질시킬 것을 요구하였으나 나의 말은 아무 소용없고 그 아이 말만 믿고, 고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 고문이 심해서 의복에다가 똥까지 싸고 있으니 냄새가 풍겼는지 고문을 중지하고 또 수건으로 눈을 가리더니 어딘가 데려가더니 의복을 갈아입히고, 어느 사무실에 가니 그곳에 좀 앉으니 지금 보니 김금식이가 들어오더니 아무 말 없이 보고 1초도 안 되어서 밖으로 나가더니 저 사람 아느냐고 묻기에 모른다고 하니, 저 사람 너를 안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너는 왜 거짓말하느냐고 또 잠을 재우지도 않은 채 밤을 새워가면서 조사하고, 날이 새면 또 지하에 가서 고문하고 무조건 암호문하고 무전기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대질시킬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무려 4일간 고문을 당하고 하루 있으니 검사가 지하실까지 와서 데리고 가기에 따라가니 조서 작성하자고 하기에 저는 지금 몸이 아파서 지금 조서 작성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니 그것도 무조건 시간과 시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거부하였습니다. 검사가 하는 말이 여기는 검찰보다 더 높은 곳이다, 내가 너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지만 내가 마음대로 데리고 가지 못하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 할 수 없이 조서 작성한 것입니다.
  
   조서 작성하는 것을 보니 공산당에 대한 조서 작성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부인하였습니다. 내가 공산당도 아닌 사람을 무슨 이유로 공산당 조서 작성합니까 하니 무조건 가만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검사는 부르고 書記(서기)는 기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당으로 몰아서 이 사건에 결부된 것입니다. 바로 이 공산당으로 나를 몬 사람이 정대범하고 김금식이란 사람입니다. 그러면 공산당 두목, 윤 모니 황 씨란 사람, 박영태란 사람, 김기철이란 사람들은 누구의 입에서 나온 사람들입니까. 모두 검사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검사는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물론 조서 기입되어 있습니다만.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람을 공산당으로 가담시켜서 지금에 와서 내가 말한 것처럼 하니, 나로서 답답할 뿐입니다. … 나는 지금 정대범의 정신감정을 하여보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모르는 사람을 아무 곳에나 물고 들어가니 말입니다.>
  
   뒤에 <부산일보>는 근하의 목소리를 흉내 낸 방송국 아나운서의 擬聲(의성)을 녹음했다가 틀어주었더니 ‘눈물을 흘리며 자백했다’고 과학 수사의 성과를 소개하게 된다.
  
   崔 씨는 또 나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전기고문, 물고문, 구타 등 갖가지 고문을 당했습니다. 잠을 못자 정신이 없고, 자백할 것도 없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한번은 수사간부가 오더니 권총을 내 머리에 갖다 대고 이 빨갱이 새끼 쏴 죽여 버리겠다고 했어요. 나는, 쏴 죽이시오 라고 대답했지요. 나흘쯤 지나서는 그들도 내가 공산당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에요. 주사도 놔주고 잠도 재우면서, 미안하게 되었다고 달래더군요. 지금도 그들에겐 별 유감이 없어요. 나를 고문할 때 양심이 괴로웠던지 소주를 마셔가며 고문합디다.
   그 기관에서 김태현 검사로부터 조서를 받았는데 나를 고문한 사람을 입회시켜놓고 신문을 합디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손도장을 찍어주고 말았지요. 金 검사가 나간 뒤, 나를 고문했던 그 사람이, 왜 도장 찍어주었느냐고 나무라요. 그러면서 한 1년은 고생해야겠다고 합니다.”
  
   崔 씨가 도장을 찍어준 조서는 1968년 5월28일에 작성된 피의자 신문조서다. 崔 씨는 “황 선생의 권유로 북괴노동당에 가입하고 황 씨로부터 김용선의 아들 근하 군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아 김기철에게 살해지시를 내렸다”고 자백한 것처럼 적혀 있다.
   공안기관에서 이미 崔 씨의 북괴 관련설을 부정해버렸으므로 이 진술은 고문에 의한 허위진술이란 증거의 가치만 지니게 되었다. 형욱 씨도 기철 씨처럼 감방에서 가죽 수갑을 차고 있어야 했다. 같은 살인 피의자였지만 금식씨와 대범씨에 대한 대접과 기철 씨와 형욱 씨에 대한 대접은 사뭇 달랐던 것이다.
  
   공산당으로 몰아 허위자백 유도
  
   김금식 씨는 1968년 5월9일의 검찰 진술조서에서 자신이 1967년 10월16일에 대구교도소를 滿期(만기) 출소하여 그 다음날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금식 씨는 1967년에도 역시 폭행죄로 징역을 선고받아 대구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그러니 그는 대구교도소를 나오자 곧 또 폭행죄로 구속돼 1968년 2월에 부산교도소에 수감된 셈인데 그가 법을 우롱해보기로 결심한 것은 부산교도소에서였다.)
  
   금식 씨는 1968년 5월26일 진술 조서에선 대구교도소 만기 출소일을 1967년 11월17일로 고쳐 잡아 진술했다. 그렇다면 근하 군이 살해된 1967년 10월17일엔 대구교도소 안에 있었다는 얘기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검찰 측의 깜짝 놀람을 김금식 씨는 이렇게 다독거려주었다.
  
   “1967년 10월17일 오전 9시20분께 박영태를 면회하고 기결 1사 14방에 돌아오니 교도관으로 보이는 마흔 살가량의 선글라스 낀 남자가 나를 부르기에 그 사람을 따라 접견실과 정문을 차례로 빠져 바깥으로 나왔다. 신사는 사라지고 정문 앞에는 기철이와 박영태 씨가 갈아 입을 옷과 신발을 갖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오후 완행열차로 부산으로 내려와서 부산진역에서 정대범과 합류, 그날 밤 범행을 저지르고 나는 다음날(10월18일) 오전 8시에 다시 대구교도소로 돌아왔다.”
  
   이것은 기막힌 얘기였다.
   ‘국가가 보장하는 알리바이’를 얻기 위해 범인 일당이 김금식 씨를 범행 당일 하루만 교도소에서 빼내 사용했다는 그의 진술을 검사들이 정말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진술에 따라 곧바로 대구교도소로 그들은 손을 뻗쳤다.
  
   “1968년 5월25일 오전 11시쯤(김금식 씨는 26일에 불법 출소관계를 진술했는데 그전에 이미 이 일을 검사에게 귀띔한 듯) 나는 근무 중에 所長(소장)에게 불려갔다. 검찰청에 갔다가 와야겠다고 하기에 열차 편으로 부산에 도착, 부산지검으로 곧장 갔다. 검사는 나에게 선글라스를 끼고 따라오라고 했다. 검사는 어떤 사나이(김금식)에게 나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맞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맞다’고 했다. 이어 검사가 ‘김금식을 출소 시킬 때 간첩 사건에 박영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을 알았는가?’라고 물어 나는 간첩 사건 때문에 끌려온 것으로 알았다.
  
   ‘너는 자손 대대로 누명을 벗을 수 없다. 그러나 너의 신세를 망칠 생각은 없다’고 검사는 어르며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 저녁이라도 석방시켜주겠다. 이 기회가 마지막이다’라고 위협했다. 나는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체념하게 되어 검사가 시키는 대로 말을 했다. ‘간첩을 내어주었으면 돈을 안 받고 내어줄 리가 없는데?’라고 검사가 말하기에 나는 이때부터 정신을 잃고 ‘1만 원을 받기로 약속했으나 현금은 받지 못했다’고 말해버렸다.”(<조선일보> 1969년 3월29일 여광석 교도·당시 32세 면담 기사)
  
   공안검사 출신인 김태현 씨는 최형욱 씨를 공산당으로 몰았을 뿐 아니라 교도소 간부인 여광석 씨까지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공산당과 연루시켜 손쉽게 자백이란 걸 받아냈다. 여 씨는 교도소에 근무했으므로 한번 공산당으로 낙인 되면 어떤 신세가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金 검사는 그것을 약점으로 이용한 듯하다. 여광석 씨는 이즈음의 상황을 그 뒤 항소 이유서에서 자세히 썼다.
  
   <그날부터 ‘너는 박영태라는 對南(대남)간첩과 접선하여 대구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금식을 불법 출소시킨 자이니 너는 공산당과 접선하여 활약하는 간첩임이 틀림없다’고 하여 그날부터 갖은 협박으로써 취조당한 것입니다.
   그러던 중 잠깐의 대기시간이 있으면 부산교도소 교무과 직원이며 당시 김태현 부장검사 곁에서 김금식을 계호해서 다닌 권영택, 박학율이란 사람들이 옆에 와서는 “당신은 對南(대남)간첩인 박영태와 접선하여 공산당으로 활약하니 중앙정보부에 가서 취조를 받아야 한다. 중앙정보부라는 곳은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 시체가 되어 나오는 곳이다. 보안법으로 한번 처벌되면 당신의 자손 대대로 빨갱이 취급을 받아야 하며 마지막 절망인 것이다”라는 등으로 갖은 협박으로써 나에게 공포를 주며 “우리들은 검사들과 잘 알고 있으니 당신은 박영태라는 자가 對南(대남)간첩인 줄은 모르고 김금식을 불법 출소시켰다고 하면 당신은 최고 직무유기밖에는 되지 않으니 그 정도는 우리들이 이야기하면 기소유예 혹은 불구속 기소 정도로써 충분하다”는 등으로 공포의 분위기를 조장하여 이를 이용 기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사건이 어떤 사건인 것조차 알 수 없었으며 어떤 사람의 조작으로 빨갱이 취급을 당하고 있구나 생각할 때 극도의 공포에 떨고 있었으며 검사 취조에서도 한결같이 對南(대남)간첩인 박영태와의 접선 여부와 김금식을 불법 출소시킨 사실을 추궁하면서 “너는 공산당으로는 보지 않으니 일시적인 실수로써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하면 나도 같은 법무부 직원으로서 기소유예처분으로 출소시켜준다”고 하면서 너가 살길은 이 길밖에는 없다고 협박과 기만으로써 취조에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사실이 무근한 일이므로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이니 이 시간이 지나면 중앙정보부로 취조하기 위해 가니 마지막 기회를 잘 생각해서 너의 장래를 잘 생각하라”는 등의 협박으로 취조함으로써 공산당이란 죽는 것이구나 생각하며 양심에 없는 허위 시인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허위 시인이라 앞뒤의 일관성이 없는 것인데 이 前後(전후) 사실을 권영택, 박학율이란 사람들이 가르쳐줌으로써 사건을 연관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 부산교도소 보안과장님실에서 증거보전신청을 하게 되었을 시 본 피고인이 사건 자체를 부인하니 검찰 측에서는 너는 대학 시절에도 공산주의 서적을 많이 탐독하여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자이니 기소유예의 처분이나 집행유예의 처분을 받을 수 없게 공산당으로 처벌한다는 등으로 판사님 앞에서까지도 협박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
  
   이러한 협박적인 공포 분위기 속에서 본 피고인의 심정은 앞으로야 어떻게 되든 단 몇 분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인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검찰에서와 같이 양심에 없는 허위 시인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 교도에 이어 교도보 이석연 씨(당시 41세)도 간수자 도주원조 혐의로 구속됐다, 김금식 씨의 각본은 이제 여섯 사람의 배우들을 만들어냈다. 남은 것은 이들에게 어떤 역할을 나눠주는가 하는 문제였다.
  
  
  (계속)
  
[ 2020-07-14, 09: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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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건     2020-07-14 오전 11:16
낮은 수준이지만 법치사회이고 언론이 비교적 자유로운 세상에서도 이런 억압과 조작이 가능한데 저 북한에서는 말도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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