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이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사보 편집자에게 우선 유감의 뜻을 한 사발 바치는 바이다. 춘추필법에 의한 우리 가족사(史)는 이렇다. 내가 임귀옥양을 처음 본 것은 1971년 2월2일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국제신보 수숩기자로 입사한 다음날 나는 조사부 수습을 명받아 임양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보다는 물론 훨씬 더 청순한 얼굴이었으나 코의 높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다. <임양은 언젠가 나에게 국민학교 재학때의 별명이 '미제코(Nose Made in U.S.A) '였다고 고백한 바 있음>.

나는 첫 상면에서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선키와 앉은키가 거의 같지 않은가. 맞은편 자리에서 보면 서서 일하는지 앉아서 일하는지 도무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아 나는 자꾸만 책상 밑을 기웃거려야 했다. 발이 땅에 닿아 있는지 의자에 걸쳐져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이렇게 해서 신장 176cm의 남자는 150cm의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됐다.

두서너달 지나자 그 관심은 다시 연민의 정으로 일보전진, 파국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일요일만 되면 사내 직원들의 눈을 피해 시외로 원정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임양의 통계에 따르면 그 1년동안의 나들이 횟수가 결혼 13년동안의 그것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물론 데이트의 제안, 경비 조달, 음식장만등 일체의 이니셔티브를 취한 것은 임양이었고 나는 '마지못해' 따라가는 형식을 취했다. 그해 9월쯤 됐을까 임양의 입에서 먼저 '결혼'이란 말이 나왔다.
나는 "망했구나"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으나 "같이 있을 땐 흐뭇하고 떨어져 있을 땐 약간 그리운" 사이가 돼 있었으니 그 명제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기로 했다.

72년 4월8일에 결혼식을 올린다는 청첩장을 사내에 돌렸더니 약98%의 직원들이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감쪽같은 보안(保安)을 "난 기자이니까..."란 말로 해명하긴 했지만 우리 둘의 사이를 알고 있었던 2%의 '무거운 입'에 대해서는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결혼해서도 둘은 편집국에 계속 남았다. 나는 외근, 아내는 내근이니 회사안에서 얼굴이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신문사와 직원들의 너그러운 이해와 따뜻한 배려가 없었더라면 10년 동안이나 같은 회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사에 있어서 나의 두 번째 용단(첫번째는 27세 노처녀와의 결혼 결심)은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국가시책의 실천이었다. 장남의 몸으로 아내가 '샛별' '빛나'란 두 딸을 낳자마자 단산수술을 시킨 것은 "나의 행복은 국가의 행복이다"는 불타는 주인의식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내릴 수 없는 결단이었다. 아들을 낳아 '밤에' ( '새별'이 '빛나'는 밤에...)라고 이름지으라는 유혹도 뿌리치고 나는 둘째 애기를 받아낼 산부인과 의사에게 "남자든 여자든 상관 말고 수술을 하라!"고 엄명을 내렸었다.

제왕절개 수술로 아기를 낳았는데 두번째도 딸이 나오자 그 의사는 나의 의지를 재확인하려고 유괴사건 취재중이던 나를 1시간 동안이나 수배하고 다녔으나 끝내 연락이 닿지 않자 수술을 감행했다는 뒷 얘기가 있다. 그렇게 태어난 요놈들인데 아빠에게는 통 겁이 없다. 촌지를 정기적으로 하납하지 않는다고 나를 '조일성'이라고 부르는가하면 '옛시인의 노래'를 부드럽게 뽑으면 "거위소리 좀 그만 내라"는 코멘트가 날아온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지만 나의 대중가요 실력은 어떤 가요집이라도 아무데나 척 펼쳤을 때 두곡 가운데 한곡을 부를 수 있을 정도인데도 말이다.

나는 요즈음 환경이 정신을 바꿔 놓는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아내는 직장 생활, 자식은 두 딸, 이렇게 되니 극우보수주의자였던 내가 저절로 남녀 평등주의자가 된 것이었다. '남녀 평등'만이 두 딸의 살길이자 내가 편하게 되는 길이니까.

우리 가족사에 있어서 두 번의 위기는 나에 의해서 저질러졌다. 첫 번째 위기는 76년 6월에 왔다. "포항 석유는 경제성이 없다"고 했다가 졸지에 실직자가 됐다. 반년동안 우리 가족 여섯명(부모를 모시고 있음)의 생계를 아내가 책임지게 되었다. 그 뒤 나는 국제상사에 취직했다가 1년뒤 복직, 다시 그 3년 뒤 두번째 실직이 됐었다.

약1년의 실직 기간뒤에 어떻게 되어서 나는 서울의 어느 잡지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근 두해동안 나는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하게 되었다.
10년동안 아내의 감시망 속에 있다가 서울이란 신천지로 탈출한 나는 그러나(맹세코)금욕 생활로 일관했다. (여기에 이의가 있는 분은 물증을 제시할 것). 잠실 주공아파트에 방하나를 달세로 얻었는데 원래 나는 게으르기 짝이 없어 이불과 빗자루, 그리고 쓰레기통이 가구의 전부였다. 그래도 아무 불편이 없었는데 아내가 주말에 올라오더니커피포트를 하나 사주고 내려갔다.
커피포트를 이용하자니 숟가락, 컵, 설탕, 커피, 때로는 사발면까지 비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좀 편해 보자고 기계를 가져다 놓았는데 그 기계가 되려 나를 구속하고 번거롭게 만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서울 하숙생활 2년의 최대 수확이었다.

 2년간의 이산 가족 생활을 면하게 해준 것은 경향신문사였다. 경향신문 앞을 지날 때마다 별다른 느낌을 갖게 되는 것 도 나에겐 그곳이 '고마운 처가'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또 국제신보에서 사회부장으로, 또 편집국장으로 모셨던 이철호님, 대한민국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기자인 유진오님, 그리고 손광호. 송영자. 강성보. 김운산님등 '만나면 반가운' 부산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다.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이 티격태격해도, '공해신문' '무공해신문'이 격돌해도 경향신문에 대한 나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야 한강물이 소주가 되지 않는 한 변함이 없을 것이다. 아내와 나는 지난 13년간 주거뿐 아니라 직장생활의 무대까지도 거의 공유하여 왔다. 그런 뜻에서 나는 아내에게 손바닥에서 노는 손오공으로 비칠지 모른다. 보너스를 얼마 받았고, 봉급이 얼마나 올랐는지도 환히 알고 있고 "오늘 서건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간다"는 더듬수가 통할리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아내는 괜히 내 옆을 왔다 갔다 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기자의 양심상 차마 "검열하겠다"는 소리는 못하고 "알아서 써라"는 암시를 던지고 있는 거다. 독자들은 이 글이 그런 무언의 위협 속에서 쓰여진 것임을 감안하여 읽어야 할 것이다.

"이게 누구죠?"

아내는 글쓰고 있는 나에게 사진을 한 당 슬쩍 보여 준다. 아내는 "만지지 말고 보라"고 한다. 증거 인멸을 겁내는 것이다. 그 사진은 79년 5월에 경주 석굴암 앞에서 찍은 것인데 묘령의 처녀가 조 갑제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처녀는 부산시청 여직원이고 그때는 여러기자, 공무원들이 함께 '그냥' 놀러갔었고 아무런 스캔들이 없었는데도 아내는 나의 호주머니에서 압수한 그 물증을 기회있을때마다 효과적으로 써먹는다. 나에겐 그 사건이 큰 약점으로 돼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여자문제에 있어선 결백하고 설사 '범법행위'를 저질렀다해도 사회부기자출신인 내가 물증을 남길리도 없지만 그 사진 한 장은 그야말로 천려일실(千慮一失)이었다.

우리 가족의 권력구조는 2원집정제로 되어있다. 치안과 국방은 대통령격인 내가, 외교.주택.건강.재정등 기타의 내정일체는 국부총리격인 아내가 쥐고 흔든다. 못 하나 바로 박지 못하는 나의 하는 일은 문단속과 잠자리 옆에다가 야구방망이를 방범용으로 눕혀 놓는 것 정도다. 실권없는 나는 아마도 영원한 손님일 것이다. 그래도 친위 쿠데타를 획책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은 10년전 한여름 우리가 해발 2백m나 되는 부산고지대 산동네에 살 때 시부모를 모신 임신한 아내가 배불뚝이의 모습으로 비지땀을 흘리며 헉헉 숨찬 소리를 내가면서 비탈길을 오르내리던 장면이 가끔 눈앞에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사보 198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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