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취재하면 내가 모르는 것까지 알아낼 것이다" 언론 매체가 흔히 모 기관원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조갑제씨를 두고 그렇게 말했다. 이쯤 되면 기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 찬사가 되지 않을까? 그 모 기관원은 몇 해 전에 그가 쓴 기사 때문에 그를 자기 직장인 모 기관이라는 데에 불러다가 "따졌던"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조갑제가 잘 쓰면 오천만원 더 벌고, 못 쓰면 오천만원 덜 번다" 이런 말들도 요새 잡지 편집장들 사이에는 오간다. 조갑제씨가 몸 담은 <월간조선>이 그런다는 말이다. 기자도 시세가 있다면 단연코 이 시대에 가장 비싼 기자로 그를 꼽을 만 하다.

그러나 조갑제씨는 별난 사람이 아니다. 그저 구두가 유난히 크고, 보는 사람마다 어디 가냐고 물을 만큼 큰 가방을 상비하고 다니고, 양복 주머니 속이 두서없이 복잡하고, 사진으로는 판독하기 어렵겠으나 얼굴이 마른 버짐이 핀 듯이 까칠한 것 밖에 별로 볼 게 없는 껑충하게 키 큰 남자이다. 아니다. 한 가지 빠뜨렸다. 본디부터 말이 더뎌서, 뭘 물으면 더도 덜도 아니고 꼭 숨 한번 쉬고 뱉을 만큼 쉬었다가 대답하는 버릇도 있다. 깊이 사귀어도 이것 말고 조갑제 임을 증명할 큰 특징을 나열할 수 없을 듯 하다.

그러니 궁금하다. 신기하다. 명색이 기자라면 어느 구석엔가 숨겨 둔 칼이 있어야겠건만, 아무리 보아도 유순해 보이기만 한다. 교묘하고 약은 사람 에게는 아마도 어디 한 구석 빈 사람으로도 보일 만 하다. 사람을 얕잡아 보면 큰 코 다친다. 특히 조갑제씨를 어수룩하게 여겨 마음을 풀었다가는 당한다. 이미 많이 들 당했다. 당해도 속속들이 남김없이 당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끙끙거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한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조갑제씨의 칼은 바로 그 멍하게 큰 구두와 가방과 얼띤 듯이 보이게 하는 유순함이다. 잘난 철학자라면 이런 형국을 뭐라고 표현할까? 없는 칼도 칼이다? 세상에 그런 칼이 어디 있을까? 창살 없는 감옥이 아니고 칼날 없는 칼이다.

그 당한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하자면, 이런 칼 앞에 안 당할 재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것 밖에 없다. 그러니 조갑제씨는 무서운 사람이다. 그도 그건 인정한다. "저는 부끄러움을 많이 탑니다. 기자가 안 되었더라면 사회에서 탈락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기자에게는 그게 무기가 되거든요"

그는 해방되던 해에 일본에서 났다. 도꾜 북쪽에 있는 사이라마껜이 그의 태생지이다. 가난을 벗어 보려고 "내지"로 갔던 그의 부모는 그를 낳고 몇 달 뒤에 고향 땅인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청송에서 국민학교 때에 부산으로 이사하여 서른 여섯 살까지 살았다. 부산중학교에 다녔다. 중학교 이학년 때에 잭 레몬과 마릴린 몬로가 나오는 <뜨거운 것이 좋아>를 보고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마릴린 몬로가 잭 레몬과 "약 삼십분에 걸쳐서"입을 맞추었는데, 그 장면이 눈에 삼삼해서 며칠 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술, 담배 그리고 화투, 바둑 장기 같은 잡기를 배우지는 않았으나 남자들이 그 반열에서 술 다음으로 꼽는, 마릴린 몬로를 포함한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도 부산고등학교를 다녔다. 거기서도 이학년 때에 넋을 잃을 일을 하나 찾았다. 야구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얼마나 야구가 좋았던지, 야구를 잘 알려고 무턱대고 부산에서 잘 들리는 일본 방송을 밤낮으로 틀어 놓고 일본 프로 야구 중계방송을 들었다. 그러다가 삼학년 때에는 한 발 더 발전하여 단파가 잡히는 라디오를 사서 미국방송의 프로 야구 중계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두 마디 알아듣거나 말거나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듣다 보니 어느새 일본말과 영어를 알아듣는 귀가 뚫렸다. 미국 경기를 들으려면 시차 때문에 밤잠을 줄여야 했건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한때는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선수 오백명의 이름, 키, 몸무게를 꿰게 되었고, 어느새 일어와 영어를 "취재에 불편이 없을 만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 선한 놈들은 늘 꽁지한다"라는 말도 미국의 한 야구 감독이 한 말이다.

그는 이 말을 자기 직업에 비추어 이렇게 풀이하여 간직하고 있다. "기자 라는 직업은 이겨야 하고, 이기는 것이 선이다. 기사를 위해서, 특종을 위해서" 생뚱맞게도 그는 대학 입학을 부산에 있는 수산대학 제조학과에 가야 했다. 그 학교는 수산물의 가공을 공부하는 곳이니, 이를테면 바다 에서 잡은 꽁치, 고등어, 참치 같은 것들을 통조림으로 만드는 것을 "탐구하는"데 라고 하면 이해가 쉬워질 것이다. 막연히 그와 수산대학을 맞붙혀 놓고, 그가 쓴 바다에 관한 기사 곧 해저 석유 탐사, 해운업, 고래들을 다룬 기사들이 다 "전공을 살린 것"이라고 짐작했던 이들은 서둘러 그 생각을 버리길 바란다.

그는 "수산대학에 의미 없이 갔고, 중퇴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기사들은 전공과는 상관없이 순전히 기자로서 취재해서 썼다. 다만 그 기가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고, 언젠가는 선원들의 생활을 바닥까지 취재 해서 기사를 쓸 요량으로 하고 있다.

"젊었을 때는 사람을 보면 기사처럼 보였어요. 저 사람은 사회면 톱 거리, 저 사람은 일단 자리 밖에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 였습니다. 눈에는 기사 밖에 안 보이고, 기사에 독이 올라 있었지요. 그래서 인간관계가 좀 메말 랐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마릴린 몬로, 프로야구 이야기들에서 이미 낌새를 챈 사람도 있겠으나, 여기에 이르면 조갑제란 사람이 뭐에 빠지면 눈에 그것 밖에 안 보이는 사람임이 더 분명해진다. 그는 비록 과거시제로 이야기하고 있으나 그가 써내고 있는 기사들로 미루어 보아 이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으로 들어두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 그는 수산대학을 이태 다니고 군에 갔다가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부산의 국제신문 기자로 들어 갔다. 유별난 포부가 있어서 기자가 된 것이 아니고 직장으로 신문사를 선택한 것 뿐이다.

처음 네 해 동안에는 문화부에 있다가 사회부로 옮겨 경찰에 출입하게 되 었다. 그가 기자로서 "독이 오르게" 된 것은 사회부 기자로 뛰고 나서 부터의 일이다. 다 알다시피 사건기자는 자고 새면 그날 일어난 험한 꼴은 죄 보고 다니는 게 일이다. 그는 특종을 하고 싶어 다른 기자보다 한 발이라도 더 빨리 사건의 현장에 다다르려고 조바심을 치는 한편으로 앞으로 특종이 될 만한 현장을 탐색하느라고 그 큰 구두를 부지런히 닳게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야망 때문에 신문사를 쫓겨나고 말았으니 그 일의 내용은 이렇다.

칠십년대 중반에 포항에 유전이 있을 가망이 있다고 석유 탐사작업을 했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포항에서 경제성이 있는 기름이 나온다는 특종을 하고 싶어 은밀히 취재를 시작했다. 그러나 치밀한 취재를 한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기름이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때에 신문사들은 모 기관으로 부터 석유에 관한 기사를 싣지 못하도록 통제를 받고 있었던 만큼 그는 아예 <포항 석유는 경제성이 없다>는 논문을 써서 제 돈으로 찍어 중앙에 일간지를 비롯한 관계 기관에 보냈다.

그러자 일본의 산께이 신문이 칠십륙년 유월 칠일치 외신난에그 논문을 받아 기사로 내보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마침내 유월말에 신문사에서 내몰리게까지 되었다. 그대에 포항 석유탐사는 그때에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한 관심을 끄는 일이었던 만큼 그 논문은 당국을 당황시키기에 알맞았다. 그는 신문사에서 나와서도 석유 취재를 계속했다. 취재를 한들 지면이 있나? 궁리 끝에 기사를 써서 "집에서 가리방을 긁어 프린트를 해서 " 여러 신문의 경제부에 보냈다.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 <석유 화형식> 이라는 장편소설을 써 한 신문의 현상 모집에 응모하기도 했으나 낙방했다.

그는 아직 그 소설을 지니고 있으며 기회가 닿으면 출판하고 싶어한다. 이 일은 그가 여러 점에서 탄복할 만한 기자 정신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가 된다. 그가 늘 가방을 들고 다니는 버릇은 석유를 취재하면서 부터 생겼다. 그 이듬해에 국제신문이 그를 다시 불러들이기 전까지 그는 잠깐 국제상사에서 조사 계장으로 일했다. 그가 맡은 일은 자료를 조사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따금 사장 연설문을 써 주기도 했다. 그는 비록 현장과 지면이 있는 신문사로 돌아갈 수 밖에 없기는 했으나, 그 종합 상사에서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신발공장을 심층 취재를 한 기사를 쓸 수 있었을 텐데 그걸 못했다는 아쉬움을 지금도 품고 있다.

칠십칠년 시월에 국제신문에 복직하자 그는 역시 사건기자로 뛰었다. "기자가 누구한테 사랑을 받는 사람이어서는 안 되고, 사람 좋다는 말을 들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무섭고 두려운 존재여야 한다. 인간적으로 인정머리 없다는 욕을 많이 먹어야 한다" 앞에 적은 "사람이 기사로 보인다"와 같은 문맥으로 이해될 수 있을 이런 생각으로 무장하고, 그러나 타고 난 유순한 자태로 현장을 누볐다.

팔십년 오월은 우리 가슴 속에 이미 광주사태로 환치되어 살아 있다. 그는 광주사태가 나자 언론의 자유에 대한 양심 선언을 했다. "그러자 곧 신변에 불안이 느껴졌어요. 어디로 좀 사라지자 싶어서 회사에 병가 신청을 내놓고 보니까, 이럴 바에야 광주 가자는 생각이 듭디다. 바로 광주로 갔지요. 오월 이십칠일 계엄군이 광주 도청에 들어올 때, 그날 아침에 도청 앞에 있었습니다. 취재 끝내고 돌아갔더니 회사에서 왜 병가 내놓고 아픈 사람이 광주 갔느냐고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 뒀지요. 허위 사문서 작성죄, 취재한 죄지요. 그랬는데 나중에 또 정화대상자에 들어 가지고 모가지가 다시 한 번 잘렸으니 확인 사살을 당한 셈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제 눈으로 본 광주사태를 기사로 만든 적이 없다. 아직은 "경상도 사람이 본 광주사태에 할 말이 있다"고만 할 뿐이지 그 취재 보다리를 풀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보았다면 제 눈에 걸린 것은 확실히 보았을테니, 때를 기다려 볼 일이다. 참고로 말하면 그가 집에 보관 하고 있던 광주사태 자료는 그의 손에 없다. 그러께에 월간조선에 썼던 <한국내 미국 시아이에이>를 관계 기관이 문제로 삼아 그를 조사할 때에 그 자료를 가져갔다. 그리고는 여태 돌려주지 않았다. 그는 그 기사 때문에 네 달 동안 회사를 그만 두었었다.

"쓰레기통을 잘 뒤지면 특종 합니다. 각종 정보가 모이는 곳이니까요. 저는 석유 개발 취재를 할 때에 관계되는 회사 쓰레기통을 밤낮 뒤졌어요. 실제로 쓰레기통에 조각조각 찢어 버린 메모를 집에 가져와 밤새도록 복원 해서 중요한 정보를 알기도 했어요. 그걸 자꾸 하면 누가 누구랑 연애 한다는 것도 알게 되고. 지금도 그런 식으로 취재하고 싶어요. 넥타이 매고 호사한 사람 만나는 것이 안 좋아요" 이제 그가 회고조로 이야기하게 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팔십일 년에 서울로 올라와 신문 사회면의 기사가 아니라 잡지 기사를 쓰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당>이란 잡지의 편집장을 반쯤 했는데, 그때에 그 잡지에 연재했던 기사로 <김근하군 살해사건의 연구>가 있다. 아직도 못 푼 이 유명한 아이 살해사건의 수사와 보도에 얽힌 문제점을 사건기자의 처지에서 파헤친 이 기사를 실험극장이 <신화 1900>이란 연극으로 각색해 공연하여 대한민국 연극상을 받았다. <마당>에서 지금 그가 차장 자리에 있는 <월간 조선>으로 옮겨간 때는 팔십삼년 시월이다. 그때부터 그는 적어도 지금까지 잡지 기사에서 흔히 보기 어려웠던 화제를, 그것도 취재원에 바싹 다가붙어 취재한 기사를 다달이 내놓음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그 이름이 번져가게 되었다.

그가 특별히 천착하고 기사로 쓰기를 즐겨 왔던 화제는 대개 이렇게 분류 된다. 첫째로 석유개발 문제, 둘째로 박정희라는 인물, 셋째로 항공사고, 네째로 히로뽕, 다섯째로 수사.고문.재판에 관계된 것 들이다.

거기에서도 석유, 박정희, 고문, 수사 부문은 신문이나 잡지의 지면으로는 이미 취재해 둔 엄청난 자료들을 수용할 수 없어 각각 책으로 출판되었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나온 <석유 사정 좀 환히 압시다>와 다락원에서 나온 <칠광구의 도박>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유고> 일권과 이권이 그것 들이다. 한길사에서는 그의 책에 "기자 조갑제의 현대사 추적"이라는 이름을 달아 내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하여 그가 파헤치는 한국 현대사를 책으로 묶어 나갈 생각이니까. 이른바 육이구선언 뒤에 나온 <유고>는 지금 베스트 셀러에 올라 있다. 한길사 사장 김언호씨의 말로는 지난 구월초까지 사만 삼천질을 찍었다. 그리고 그는 그 책 인세로만 삼천오백만원을 받았다. 두 달 동안에 스물 다섯 평 짜리 아파트 한 채 값을 번 셈이다.

"취재를 처음 시작할 때는 언제나 불안합니다. 어떤 때는 절벽에 선 듯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정면 돌파를 시작하면 거의 다 됩니다. 기자라는 건 현장에 가깝게 갈 수 있는 한 가장 가까이 가야 합니다. 핵심의 주변은 백날 돌아도 소용없고, 핵심에 직격해야 합니다" 그가 "핵심에 직격"하기 위해 하는 일은 겉보기에 별 게 아니다. 그 큰 컨티넨탈 구두가 닳도록 발 품을 부지런히 파는 일이요. 그 더딘 말로 전화를 해대는 것이다. 그러자니 그는 <월간조선> 편집실에서 약속이 가장 많은 사람이 되어 국장조차 그와 함께 점심 한 번 같이 먹기 힘들다.

전화로 말하자면, 잡지사라고 했다가는 바른 말 안 할 정황이거나 기사의 보안이 필요할 때에 적절히 높은 데를 둘러대어 취재를 하느라고 많이 건다. 또 정직하게 취재 의도를 말하면 취재원이 위축될 가망이 있을 성 싶으면 엉뚱한 소리를 들이대서 상대방을 느슨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국산 자동차의 결함을 조사하기 위하여 그 부품을 자세히 알고 싶으면 거리낌없이 한국 자동차 개발 상황을 취재하고 있노라고 거짓말을 하는 수도 있다. 그는 취재에 필요하면 이런 "관명 사칭"이나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적인 현실에 기사가 나오게 하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잘라 말한다.

그 뿐만 아니다. 인간적인 관계보다 기자의 직분이 앞선다고 생각하고 또 그대로 행동한다. 이 점에서는 매정하기가 얼음 같다. 거기에다가 특종을 할만한 정보를 지닌 사람이면,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장기 투자를 하는 만큼 특종을 항 가능성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칼 007, 최후의 목격자>는 항로를 이탈하여 소련 미사일에 격추된 칼 007호를 마지막으로 본 칼 기장 박용만씨를 이년 동안이나 설득하여 마침내 입을 열게 하여 쓴 기사이다. 이 기사는 뉴욕 타임즈, 워싱톤 포스트, 마니니지 신문 같은 데에서 인용되어 보도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그의 아내가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한국 자동차 알고는 못 탄다>를 쓸 때에는 전화번호부에 나와 있는 서울 시내 정비공장에 깡그리 전화를 해서 그가 알고자 하는 것을 꼭 같이 물어 보았다.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일에는 무서운 사람이지요. 도무지 감정의 굴곡이 없어 보여요. 나는 남자도 월경을 한다고 보는데, 그 친구는 월경을 안 하는 모양입니다. 한 달에 오륙백 장 쓴다니 그게 아무나 할 일입니까?"

그와 가까이 지내는 한 출판인은 그렇게 말했다. "일을 통해서 인간 관계를 맺고 싶다" 그는 어느 순간에 그렇게 중얼거린 적이 있다. 이 말이 그 출판인의 말에 해답이 될 수 있을까? 하기야 한 달에 오륙백 장을 써내야 한다면, 생활 속에서 은밀하고 사적인 부분이 누구인들 부지할 수 있을까? 지난 팔월에 그가 쓴 원고의 내역은 대개 이렇다. <월간 조선>구월호를 삼십만 부나 찍게 한 기사로 알려진 <정승화 증언-십이륙과 십이십이>가 이백 장 쯤 이었고 <허삼수 인터뷰>가 육십장 쯤이었으며, 출판할 원고 이백장과 바깥에서 청탁받은 잡문을 한 스무장 쯤 썼다. 다 보태면 오백 장에 가깝다.

이렇게 많은 기사를 써내다가 그는 기사 쉽게 쓰는 방법 한 가지를 고안해 내곤 즐거워한다. 곧, 취재해 놓은 자료를 정리하여 온 방안에 벌여 놓고 앞 뒤 가리지 않고 한 부분씩 써서 모아 순열 조합하는 것이다. 그는 잡지 기자는 "객관적인 묘사를 통해 주관적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터득하고 있으 므로 주관이 끼여들 여지는 자료를 선택하는 순간과 순열조합을 하는 마당에서 큰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으로 그의 기사를 입체감이 없는 사건의 나열이라고 나무라는 이가 있는 것은 짐작컨대 그 때문이기도 하겠다.

앞에서 그가 박정희에게 관심이 많다는 말을 했다. 그는 박정희라는 인물의 생애에 대해 바로 그 사람을 다룬 <유고>의 머리말에서 "박정희란 개인 속에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모습들이 녹아 있다"고 단정해 놓았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자기는 박정희의 생애를 탐구하고 있으며 그 사람을 애정을 가지고 본다고 했다. 그는 박정희가 만 가지 실정을 저질렀을 지라도 굶주리는 사람이 존재하던 시절에 성장 정책을 택하여 부의 총량을 늘여놓은 것은 옳았고, 나누어 먹는 일은 지금 할 때라고 말한다. 박정희를 바라보는 그의 이런 시각은 구체적으로 <유고>에 흐르고 있거니와, 바로 그 때문에 그가 세상을 너무 소박하게 보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요컨대 역사에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아쉽다는 것이다. 비록 코앞에 지나간 현대사라고는 하나 지나치게 즉물적으로, 현실적으로만 해석하고 있다고 안타까와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 근면성과 뛰어난 취재력에 사회- 과학적인 사고가 덧보태지면 역사가 기억할 만한 "기자"로 남을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비록 <유고>같은 정치 기사가 베스트 셀러가 되어 있기는 하나, 수작으로는 오히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을 꼽을 만하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형수 오휘웅>이 내 체질에 맞지요. 정치 기사는 내 체질에 안 맞아요" 그리고 또 "나는 취재로 확인된 사실을 근거로 해서 이야기합니다. 사실을 근거로 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는 만큼 추리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보면 반감을 느껴요. 이데올로기에서 도 그런 걸 느끼지요. 사회가 어떻게 흘러갈 것이라고 주장하고 믿으라는 건 나하고 안 맞습니다. 뭐가 진실이라고 고집하는 놈들은 거짓말이에요. 나는 모르겠다는 게 맞는 말입니다"라고 격앙되어 말했다. 그러니까 그는 "취재로 확인된 사실을 근거로 해서" 지금 <유고>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를 쓰고 있으며, 박정희의 전기를 준비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주장이 담긴 논설을 쓰고 싶어하며, 오직 자시 목소리만 담은 잡지를 내고 싶어한다. 그 아내의 말처럼 그는 과연 "쓰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인가 보다. 그는 국제신문 문화부에 근무할 때에 그 신문사 조사부 기자였던 임귀옥씨와 혼인했다. 사내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거의 그렇기는 하나, 그들은 반드시 부산 밖에 원정을 나가 데이트를 했으므로 그들이 그런 사인줄 편집국 안에서도 청첩장을 받는 순간까지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던 사람이 대부분 이었다. 기사 보안하는 재주가 그 일에도 유효했던 것이다. 그들이 혼인하고 나서 얼마동안 살았던 셋방은 판자집이 몰려 있는 부산시 수정오동이었다. 흔히 아리랑 고개로 불리는 그 동네에서 둘이 드러눕기가 불편할 만큼 좁은 방에서 살았다.

그는 월급을 받아 양심적으로 아내에게 넘겨주고 촌지는 받아 "취재로써 사회에 환원했다" 그는 월급을 빼놓은 수입에 대해서는 <사유 재산 제도>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아내에게 주장한다. 그래서 최근에 받은 그 많은 인세도 고스란히 제 통장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그 아내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은행에 들어가 예금을 하고 찾을 줄 알게 된 것도 <월간 조선>에 온 뒤부터이다. 그 직장이 월급을 통장에 넣어서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집을 파는지, 사는지, 샛별, 빛나 자매가 학교에 입학을 하는지, 졸업을 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다. "이사사는 게 제일 싫고, 아이들은 나쁜 짓만 안 하면 그냥 둔다" 그러니 부산 아리랑 고개의 됫박 같은 셋방에서, 서울 강동구 길동의 마흔평 짜리 아파트에 살게 되기까지 그 아내는 모든 집안 일을 혼자 꾸려 왔다. 그에게 통장에 든 돈은 무얼 하겠느냐고 물으면 "마음이 참 든든하다"고 동문서답한다.

그는 한 달이면 한 두 번 밖에 집에서 저녁을 안 먹는다. 그 나머지 날 저녁은 "삽십 퍼센트는 친구 만나고, 삼십 퍼센트는 취재 목적으로, 사십 퍼센트는 내가 알아서 한다" 그렇게 늦게 들어오는 까닭을 백분비로 나누어 밝혀놓고는 덧붙이는 말이 "기자가 밤 열두시 전에 들어오면 직무 유기다" 이다. 그가 지독한 기자 근성을 허물어뜨리는 장면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제작비 오백 - 육백 정도, 녹음 제작비, 악단 기본 편성 천만원 이상 - 녹음실, 풀 악단, 한달 반에서 두 달" 요새 그가 호주머니에 구깃 구깃하게 구겨서 넣고 다니는 메모 한 장에 적힌 내용이다.

이것은 밤무대에서 서는 한 여자 가수를 음반 취입을 시켜주려고 알아 본 취입비의 내역이다. 그가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가수는 서울 영동의 한 까페에 나오고 있으며, 그는 그 집에 한 주일에 서 너번 씩 들린다. 그리고 거기 가면 어디까지나 "조금쯤" 그 유순한 듯한 매정함이 무너진다. 아마도 그 시간이 "내가 알아서 한다"에 드는 저녁인 듯 하다. "조양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얼마쯤일까? 이 미터쯤 일 것이다. 눈길과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그러나 체취를 느끼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조양은 우리에게는 이미자보다도, 심수봉보다도 조용필보다도, 최진희보다도 귀한 존재이다"

그는 최근에 <이 미터의 거리>라는 수필에 그 까페 가수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여기 "우리"는 그와 가깝고 그처럼 술을 잘 못 먹고, 유행가를 좋아하고, 자유 민주주의자인, 그 또래의 변호사, 판사, 출판사 사장, 잡지사 기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조양 팬클럽"이라고 부르며 기껏해야 진토닉이나 맥주 한 잔씩 밖에 매상을 못 올려 주면서도 조양이 부르는 김민기, 양희은의 히트곡들에 심취하여 자정이 가까운 줄도 모르고 앉아 있다. 자기의 무엇이 허물어지는 지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앉아 있다. 그 속에 조갑제씨도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글/설호정(샘이 깊은 물 편집장) <1987년 10월 샘이 깊은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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