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문무왕의 遠謀深慮(원모심려)
정순태의 백제부흥전쟁(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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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순태(작가·前 『월간중앙』 主幹·前 『월간조선』 편집위원)
 사진: 박태신(내포지방고대문화연구원 원장)·전용식(홍주in뉴스 대표기자)

豆率城에서 구사한 文武王의 외교적 레토릭

古山子 金正浩(고산자 김정호)는 “豆率城(두솔성)은 角山(각산) 아래에 있고, 각산은 칠갑산”이라고 했다. 문무왕이 주류성을 치러가면서 중도에 칠갑산을 거쳤다는 史實(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자는 아무도 없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삼국사기』 김유신 傳의 기록이다.

 <龍朔 3년(663) 癸亥(계해)에 백제의 여러 성에서 비밀리에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다. (문무)대왕이 친히 (金)庾信, 仁問, 天存, 竹旨 등 장군들을 거느리고 7월 17일 (金城을 떠나) 토벌 길에 올랐다. 먼저 熊津州(웅진주)에 가서 (당의) 鎭守(진수)인 劉仁願(유인원)과 合兵(합병)하여 8월13일 豆率城(두솔성)에 이르렀다 백제인들은 倭人(왜인)과 함께 出陣(출진)했는데, 우리 군사들이 力戰(역전)하여 大破(대파)하니 그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당 고종 시기의 32년간 年號(연호)는 무려 14개인데, 龍朔(용삭)은 그중 하나이다. 그의 아비인 당 태종 시기의 연호는 단 1개인 貞觀(정관)이다. 당 고종 治世(치세)의 실질적 최고 통치자는 네 살 연상의 아내인 則天武后(측천무후)였는데, 그녀는 대단한 改名(개명) 마니아였다. 아무튼 백제나 고구려는 病弱(병약)한 고종 李治(이치)라기보다 당제국의 파워 제1위였던 則天武后(武照)에게 멸망했던 셈이다.

이어지는 『삼국사기』 김유신 傳의 관련 기록을 보면 문무왕은 매우 정략적이었다.

<(문무)대왕이 (항복한) 왜인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와 너희 나라가 바다를 경계로 하여 일찍이 싸운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호 관계를 맺고 서로 예방하고 교유하여 왔는데, 무슨 이유로 오늘날 백제와 악행을 함께 하여 우리나라를 치려 하는가? 이제 너희 병사들의 생명이 나의 손안에 있으나 차마 죽이지 않는 것이니, 너희들이 돌아가서 너희 국왕에게 이 말을 告(고)하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 왕은 그들 마음대로 돌아가게 했다. (後略) >

이와 관련해 훗날 古山子 김정호는 두솔성을 ‘慈悲城(자비성)’이라 命名(명명)했다. 이때 문무왕의 레토릭은 훗날을 대비해 신라와 왜국의 화해를 바라는 遠謀深慮(원모심려)가 깔려 있었다.

사실, 왜는 신라의 宿敵(숙적)이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왜는 赫居世 居西干 8년(B.C. 50) 이후 수십 차례나 신라를 침략했다. 倭寇 수준의 노략질도 적지 않았지만, 때로는 伽倻諸國(가야제국)과 연합하여 신라의 수도 金城을 포위 공격하기도 했다. 645년 왜국에서 ‘乙巳의 變’이란 宮內 쿠데타로 親백제 정권(蘇我入鹿)이 붕괴한 지 2년 후인 647년 金春秋(김춘추)의 왜국 방문외교가 전개되었다. 어떻든 그 이후 660년 7월 백제 멸망 때까지 신라와 왜국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背後(배후)의 왜는 신라에 항상 위협적인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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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성·백촌강·임존성 전투 要圖

663년 8월13일 문무왕의 신라군이 칠갑산 두솔성을 경유한 史實(사실)을 부정하는 연구자는 없다. 그러한데 칠갑산에 오르기만 하면 위의 (1), (2), (3)의 주장이 非합리적인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1)의 舒川郡 韓山面(서천군 한산면) 소재 乾芝山城(건지산성)은 칠갑산으로부터 남쪽 24km 거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백제의 수도권과 너무 가깝다. 부여군 熊浦(웅포)에서 건지산성까지가 뱃길 15km 정도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더구나 乾芝山城은 발굴조사 결과, 백제의 山城이 아니라 고려 때 축조된 산성임이 이미 확인되었다.            

(2)의 부안군 上西面(상서면) 소재 位金岩山城(위금암산성)은 칠갑산에서의 거리가 110km에 달한다. 8월 13일 칠갑산의 두솔성을 점령한 신라의 5만 대군이 불과 나흘만인 8월 17일에 錦江(금강)·萬頃江(만경강)·東津江(동진강)이란 3개의 江 하류를 건너 위금암성에 당도해 포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3개 강은 干滿(간만)의 차가 6~7m에 달하고 갯벌 지대가 넓게 분포되어 있어 渡河(도하)하기가 만만치 않다. 古代(고대)의 步兵(보병)은 遠征(원정) 시 兵站(병참)부대가 뒤따른다 할지라도 개인 무기와 攻城(공성)장비, 그리고 최소한 3일 치의 식량을 휴대해야만 했다. 
 
(3)의 ‘연기군 全義(전의)’ 說은 공산성에서 서쪽으로 24km 행군해 칠갑산에 온 신라군이 이번에는 “뒤로 돌앗!” 해서 동북쪽 42km를 행군한다는 점에서 성립되기 어렵다.

필자는 (4) 박성흥 선생의 <주류성=홍성군 長谷面 鶴城>을 합리적이라고 판단해 왔다. 칠갑산 두솔성에서 홍성군 장곡면 山城里(산성리)의 石城(석성)까지는 직선거리로 14km이다. 다시 말하지만, 문무왕이 거느린 지상군은 8월 13일 두솔성을 점령하고, 이어 8월 17일 주류성을 완전 포위했다. 나흘 걸린 작전이었다. 나흘간은 5만 병력이 개인 병기와 휴대식량을 휴대한 채 四周警戒(사주경계)까지 하면서 接敵移動(접적이동)을 수행하고 주류성을 포위하는 데 있어 최소한의 소요시간이라 할 수 있다.
 
두릉윤성과 두솔성이 문무왕에게 항복했던 8월 13일, 부여풍은 주류성을 떠나 백강구(백촌강)으로 떠났다. 군사학적으로 말하면 부흥군에게 두릉윤성은 前哨基地(전초기지)이며, 두솔성은 主防禦線(주방어선)이었다. 다음은 『일본서기』 天智(텐치) 2년(663) 8월 條의 관련 기록이다.

<가을 8월 13일, 신라는 백제왕(부여풍)이 자기의 良將(북신)을 베인 까닭으로 곧바로 백제(내포지방)로 들어가, 먼저 州柔(주류)성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에 백제(부여풍)는 적의 계략을 알고서 諸將에게 말하기를,
“지금 들으니, 大日本國(대일본국)의 救援將(구원장) 이호하라(廬原君臣)가 용사 1만 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 여러 장군들은 미리 도모함이 있기를 바란다, 나는 스스로 白村(백촌)에 기다리고 있다가 접대하리라”라고 했다. 무술(8월 17일) 적장이 州柔에 와서 그 왕성을 에워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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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鶴城(학성)에서 발견된 ‘沙羅(사라)’, ‘沙尸良(사시량)’ 銘(명)의 기와조각
뒷산03.png
제2鶴城[장곡면 大峴里(대현리) 趙換雄(조환웅) 씨 댁 뒷산]

 

(계속)

[ 2019-11-14, 15:3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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