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계 100년 논쟁, ‘石城’은 어디인가?
정순태의 백제부흥전쟁(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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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순태(작가·前 『월간중앙』 主幹·前 『월간조선』 편집위원)
 사진: 박태신(내포지방고대문화연구원 원장)·전용식(홍주in뉴스 대표기자)

주류성은 이제 무성한 숲속에 파묻혀 있다

 우리 답사팀은 두솔성에서 내려와 長谷寺(장곡사)를 끼고 도는 지천구곡로→610번 지방도로→619번 지방도로 등을 거쳐 홍성군 장곡면 山城里(산성리)에 도착했다. 신라군의 進軍路(진군로)로 추정되는 行路(행로)이다. 산성리의 석성에 오르기는 했지만, 숲이 우거져 視界 0(zero)의 상태였다. 다음은 『月刊中央』 1996년 11월호에 보도된 필자의 답사기사 <주류성은 韓山(한산) 아닌 홍성군 長谷(장곡)> 중 일부이다.

< … (산성리의) 陽成(양성)중학교 담벼락을 따라 小路(소로)가 나 있는데, 이 소로를 따라 올라가면 ‘뒷골 遡流池(소류지)’가 나오고, 이 저수지 옆으로 500m쯤 오르면 石城山城(석성산성)에 도달한다. 산 높이가 255m라지만, 꽤 가파르고 험한 편이다. 석축산성의 둘레가 1300m쯤인데, 곳곳이 폐허화했다. 남문→서문 일대가 비교적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여기서 굳이 23년 전의 기사를 인용하는 것은 지금 石城(석성)이 우거진 숲에 파묻혀 그 안의 건물지와 우물지 등에 접근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때는 視界(시계)가 양호했다. 당시의 양성중학교는 벌써 폐교되었다. 다음은 이어지는 필자의 1996년 기사이다.

<서쪽 성벽 옆의 小路를 따라 北門(북문)터로 가면 도중에 절묘한 전망이 전개된다. 바로 옆의 태봉산성·소구니산성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12km 북쪽엔 任存城(임존성)이 위치해있다. 軍號(군호) 전달 및 협동작전에 지극히 유리한 지형이다. 남북으로 일렬종대로 뻗은 5개 산성은 兵法(병법)에서 말하는 이른바 ‘掎角之勢(기각지세)’를 이루고 있다. 더욱이 牙山灣(아산만)으로 北流(북류)하면서 禮唐(예당)평야를 적시는 無限川(무한천)은 적의 공격로인 5개 산성의 동쪽을 [垓字(해자)처럼] 가로막는다. 북문 일대는 자연암벽으로 되어 있다. 암벽 안쪽으로 난 ‘길 없는 길’을 타고 동문 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유격훈련보다 더 어렵다. 우리나라의 산들은 이제 가시나무와 칡넝쿨이 진로를 막고 있어 게릴라부대가 침투하려 해도 어렵게 되어 있다.>  

이번 답사에서도 북문 쪽으로 다가가 90도로 直立(직립)한 자연암벽을 관찰하려 했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울창한 숲이 가로막고 있어 풀숲을 헤치고 바라보기만 했다. 이 자연암벽을 관찰하려 했던 것은 石城의 위치를 둘러싼 연구자들의 異見(이견)이 있기 때문이다.

『日本書紀』에서 주류성을 石城(샤쿠사시)이라고도 표현한 것은 犬上君(이누우에노기미)가 이곳 자연암벽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동문 쪽으로 내려와 보니 무처럼 남북으로 비스듬히 놓인 모습을 한 성내의 면적이 생각보다 넓다. 모두 2만8000평이라 한다. 60대의 농부가 논일을 하고 있었는데, (중략) 논배미 바로 위에는 古色蒼然(고색창연)한 우물 하나가 있는데, 이곳 논밭의 水源(수원)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석성산성은 물이 많아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肉山(육산)이다. 建物址(건물지) 3개가 백제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西門(서문) 밑에 있는 건물지는 300평은 될 것 같다. 상명여대 박물관의 地表(지표)조사(1994~1997) 때 네모반듯한 礎石(초석, 가로·세로 각 50~60cm) 8개를 확인했는데, 그 배치상황으로 보아 모두 44개의 초석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이 遺構(유구) 위에 축조된 건물의 ‘주인’은 상당한 VIP라고 해도 좋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필자의 1996년 답사 때만 해도 건물지 한켠에는 백제시대의 토기·기와 파편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석성에서 하산해 아랫동네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을 때 산성에서 빼내온 문초석 등이 눈에 띄기도 했었다. 


부여군의 石城은 犬上君이 올 수 없었던 곳   

이제, 앞에서 거론한 부흥전쟁 때의 ‘石城(석성)’에 대해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石城’이란 지명은 엄청 많다. 그런데 백제 부흥전쟁 당시의 石城 소재지를 일본학계에는 물론 한국학계에서도 부여군 石城面(석성면)에 소재한 옛 石築山城(석축산성, 사적 98호)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건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大田(대전)지방까지 진출하여 金城(경주)과 熊津(웅진) 간의 兵站路(병참로)까지 차단했던 백제부흥군은 662년 8월 이후 금강 右岸(우안), 즉 초기의 본거지인 내포지방으로 후퇴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부여군 석성면 石城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1969년 늦가을의 어느 일요일, 논산(제2)훈련소 교관이던 필자가 부여 관광을 마치고 귀대하던 중 부여군 석성면 용머리산(170.7m) 앞 4번 국도 上에서 ‘엎드려 쏴!’ 자세의 헌병 1개 분대의 불심검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석성면의 석성은 용머리산 동남쪽 기슭에 있다. 

그 전날인 토요일 오후, 필자와 金錫容(김석용) 중위는 부여에 관광하러 갔다가 식당에서 반주를 곁들인 저녁밥을 먹고 숙소를 구하려 했지만. 마침 수학여행 시즌이라 빈 객실이 없었다. 그래서 民泊(민박)을 위해 좀 번듯하게 생긴 집의 초인종을 눌렀지만, 2층 창가에서 중년의 남자가 힐끗 아래로 내려다보기만 할 뿐 대문을 따주지도 않았다. 

이어 인근 국민(초등)학교 숙직실을 찾아가서 숙직 교사에게 재워달라고 부탁했지만, “규정상 곤란하다”고 했다. 이어 학교 주변 농가(초가집)에 들어가서 老부부에게 사정을 얘기했더니 대번에 “날씨도 추운데, 군불을 땐 이 방에서 함께 자자”며 환대했다. 좁은 방이었지만, 포근하게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우리 둘은 階伯(계백) 장군의 동상에 참배하고, 인근 定林寺址(정림사지)에 가서 국보 제8호 5층석탑 등을 잠시 살핀 다음, 택시를 타고 官北里(관북리)의 왕궁터를 거쳐 王城(왕성)의 뒤를 받치는 부소산성의 일주도로를 한 바퀴 돌았다. 이어 군가 “백제의 옛 터전에 階伯의 精氣(정기) 맑고~”를 흥얼거리며 鍊武臺(연무대)로 향해 10여 km를 달리다가 조준사격의 자세를 취하는 헌병 1개 분대에 의해 下車(하차)당했던 것이다. 

 헌병 지휘자는 “간밤에 부여군 교육장 사택으로부터 ‘군복 차림의 괴한이 출몰했다’는 신고를 받았다”고 했다. 어떻든 그 기회에 필자는 석성면의 석성산성을 실컷 관찰할 수 있었다. 주류성(石城)에 대한 史書(사서)들의 표현과는 달리 석성면의 석성의 주변 환경은 험준한 地勢(지세)는 아니었다. 

 ‘石城’의 위치는 백제부흥전쟁사를 살펴보는 데 매우 중요하다.

 663년 여름 5월, 왜국의 犬上君(이누우에노기미)가 군사사절로 고구려에 갔다가 귀로에 石城(석성)에 들러 (부여) 豊王(풍왕)을 만났다. 이때 豊王은 犬上君에게 “福信(복신)이 모반하려고 한다”고 귀띔했다. 그 직전에 복신은 라이벌인 僧將(승장) 도침을 죽이고 도침의 병력까지 차지해버렸다. 풍왕은 祭祀(제사)나 주관하는 처지가 되었다. 백제부흥군의 심각한 내부 분열이었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662년 8월, 금강 左岸(좌안)의 백제부흥군은 패퇴해 금강 서북쪽 內浦(내포)지방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663년 5월에 犬上君이 들렸던 石城은 부여군 석성면 소재 석성산성일 수 없다. 

犬上君의 귀로는 평양성→대동강→서해안→아산만→주류성(石城·샤쿠사시)→왜국으로 이어지는 水路(수로)와 海路(해로)였을 것이다. 기록에는 없지만, 그는 海路로 아산만을 거쳐 無限川(무한천)의 水路를 타고 주류성(石城)에 왔던 것으로 보인다. 석성산성 동쪽 무한천에는 밀물 때 이곳까지 바닷물이 역류해 왔고, 이곳 반계교 밑에는 ‘당나루’라는 선착장도 있었다고 한다. 박성흥 옹은 부흥군의 장병 3만 명이 주둔했던 주류성을 ‘(홍성군 장곡면의) 山城里(산성리)와 大峴里(대현리)에 걸친 ‘鶴城山城[학성산성, 乻方城(얼방성)=石城] + 大釜洞 盆地(대부동 분지)’로 比定(비정)했다.      

석성산성건물지.png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소재 석성산성의 건물지. 석성산성은 백제부흥군의 중심인 주류성으로 比定되며, 이 건물址에 부흥군의 총사령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 

[ 2019-11-15, 12:4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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