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는 것은 나중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
정순태의 백제부흥전쟁(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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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순태(작가·前 『월간중앙』 主幹·前 『월간조선』 편집위원)
 사진: 박태신(내포지방고대문화연구원 원장)·전용식(홍주in뉴스 대표기자)

避城 천도를 반대한 倭將의 말:  “굶주림은 후의 일이고 망하는 것은 먼저다”

 9월2일 오전 9시에 德山(덕산)을 출발한 우리 답사팀은 12km쯤 북상해 당진시 沔川面 城上里 蒙山城(면천면 성상리 몽산성) 기슭에 도착했다. 박성홍 선생은 몽산성을 부여풍과 복신 등 부흥군의 사령부가 주류성을 떠나 2개월간 주둔했던 避城(피성)으로 比定(비정)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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避城(피성·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蒙山城)의 遠景(원경)

 

沔川(면천)의 백제시대의 명칭은 槥郡(혜군) 혹은 槥城郡(혜성군)이었다. 槥 자의 한국 음은 ‘혜’ 중국 음은 ‘훼’ 일본어 발음은 ‘헤’이다. 그래서 『일본서기』에서는 槥城을 같은 음인 避城으로 표기했다. 다음은 『일본서기』 天智(텐치) 원년(662) 條의 기록이다.

<겨울 12월 丙戌朔(1일), 백제왕 豊璋(부여풍)과 그의 신하 福信(복신)이, 狹井連(사이노무라지)와 朴市田來津(에치노다쿠쓰) 등과 의논하면서,

“이 州柔[주유·周留(주류)]는 논밭과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다. 農蠶(농잠)할 땅이 아니라 방어하고 싸울 장소다. 여기에[ 오래 있으면 백성이 굶을 것이다. 避城(박성흥 說: 沔川면 城上里 잿골)으로 옮기자. 피성은 서북에 古連旦涇水[고련단경수·沙器所川(사기소천)]가 흐르고, 동남에는 深泥巨堰[심니기언·合德池(합덕지)]이 있어 방어하기 좋다. 사방에 논이 있어 도랑이 파여 있고, 비가 잘 내린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여는 것을 보면 三韓(삼한) 중의 비옥한 곳이다. 衣食(의식)의 근원이라 할 만큼 천지가 깊이 잠겨 있는 땅이다. 토지가 낮은 곳에 있지만, 어찌 옮기지 않을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이때 朴市田來津(에치노다쿠츠)이 혼자 나아가 諫(간)하기를, “피성은 적이 있는 곳에서 하룻밤에 올 수 있을 만큼 너무 가깝습니다. 만일 不意(불의)의 일이 있으면, 뉘우쳐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굶주림은 후의 일이고, 망하는 것은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까닭은 州柔가 山險(산험)에 가려 있어서 모든 것이 방어하기에 적합합니다. 산이 험준하고 계곡이 좁으니 지키기 쉽고, 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일 낮은 곳에 있으면, 무엇으로 굳게 지켜 동요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간언을 듣지 않고 避城에 도읍하였다.>

위에서 거론된 古連旦逕水(고련단경수)는 避城의 위치를 특정하는 데 주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원래 고련단경수는 梁(양)무제의 태자 蘇統(소통)이 중국의 역대 名文(명문)을 뽑아 편찬한 『文選(문선)』에 실린 문구이다.
이 기록을 음미하면 주류성과 피성의 특성이 一目瞭然(일목요연)하고, 당시의 정세도 대번에 파악할 수 있다. 주류성과 피성 간의 거리는 36km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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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連旦涇水(고련단경수)로 예찬된 면천면 沙器所川(사기소천)

 

663년 봄 2월, 金欽純(김흠순)과 天存(천존)이 지휘하는 신라군이 內浦(내포) 지방 주위의 居列(거열), 居忽(거홀), 德安(덕안), 沙平(사평) 등 4州의 요지를 攻破(공파)했다. 특히 沙平城(사평성)은 避城 동쪽 12km에 위치한 지금의 당진시 新平面 雲井里(신평면 운정리)로 비정된다(박성흥 說). 당진군 송악읍 운정리와 아산시 仁州面 密頭里(인주면 밀두리) 사이의 揷橋湖(삽교호) 위에는 삽교防潮堤(방조제)가 건설되어 있다. 이 방조제 위로는 77번 국도가 달린다. 신라의 군항인 黨項城(당항성, 화성시 西新面 尙安里의 唐城) → (당진시) 新平面 雲井里 간의 거리는 42km 정도이다.

東아시아史의 결정적 순간―白村江 전투

663년 8월 27~28일, 문관 출신의 웅진도독 劉仁軌(유인궤)와 水軍將 杜爽(수군장 두상)이 지휘한 당 함대 170척과 廬原君臣(이호하라노기미오미)가 지휘한 왜의 함대 400척이 白村江(하쿠스키노에)에서 東아시아 최초의 국제해전을 벌였다. 일본어에서 江(에)의 뜻은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간 곳”, 즉 灣(만)이나 개(浦口)를 의미한다.

백촌강 해전은 오늘의 한·중·일의 형세와 깊은 상관관계를 지닌 東아시아史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전투에 앞선 양측의 동향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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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당)의 함대 170척이 陣(진)을 친 白村江[백촌강·唐津市 石門面 三蜂里 熊浦 (당진시 석문면 삼봉리 웅포)]

 

웅진도독부의 鎭將(진장) 유인원은, 백제부흥군을 지원하는 왜군이 한반도로 속속 진주하자(3차에 걸쳐 2만7000명) 본국에 병력 증파를 奏請(주청)했다. 그때 이미 왜군은 한반도의 남해안에 진출하여 沙鼻岐奴江[사비기노강·섬진강 東岸(동안)의 河東(하동)] 등 두 성을 공략했다.

유인원의 주청을 받은 당 고종은 좌위위장군 孫仁師(손인사)에게 출정을 명했다. 孫仁師와 別帥(별수, 水軍將) 杜爽은 山東半島(산동반도) 일대에서 징집한 육군 7000명과 170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663년 5월 말 아산만 입구인 덕적도에 기항했다가 6월 초 7000명의 육군과 함께 白江에 상륙했다. 박성흥 선생은 여기서의 ‘白江(백강)’을 牙山灣(아산만)의 仙掌港(선장항)으로 比定(비정)했다.

 오서산 서쪽과 동쪽에서 각각 발원하는 삽교천과 무한천의 강물이 합류하는 곳이 선장항 부근이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밀물 때의 무한천의 약 16km 상류에 위치한 예산군 예산읍 산성리 부근까지 바닷물을 역류시켰다. 따라서 아산만의 선장항은 백제부흥군의 중심인 주류성을 겨냥하는 절묘한 교두보였던 셈이다.
     
박성흥 옹에 따르면 摠管(총관) 손인사는, 그의 통솔로 渡海(도해)한 육군 7000명을 교두보인 선장항(백강)에 주둔시켜둔 채 본부 병력과 170척의 함대를 이끌고 금강을 통해 웅진으로 가서 유인궤와 유인원을 만나 주류성 공략 전략을 협의했다.

해군의 주력은 당군이었다. 170척의 함대를 거느린 웅진도독 劉仁軌와 수군장 杜爽, 그리고 糧船隊(양선대)를 이끈 부여융은 웅진강 하구를 거쳐 8월 10일 경에 아산만에 진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육군의 주력은 신라군이었다. 백촌강(백강구)에서 해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그 해안에서는 신라의 기병대가 왜군 함대를 엄호하던 백제부흥군의 기병대를 먼저 제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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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 석문면 삼봉리 백촌강의 장암(차돌백이)

 

(계속)

[ 2019-11-19, 21: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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