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가 唐 太宗 李世民의 등장
(4) 백제 부흥전쟁의 이해를 위한 東아시아 핵심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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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순태(작가·前 『월간중앙』 主幹·前 『월간조선』 편집위원)
 사진: 박태신(내포지방고대문화연구원 원장)·전용식(홍주in뉴스 대표기자)

연재/ 정순태의 백제 부흥전쟁(4)

고구려-隋의 4차례 전쟁과 隋의 敗亡

그렇다면 당시 東(동)아시아의 정세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東아시아 史上(사상)의 백제 부흥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필수적인 과정이다.

589년 1월, 鮮卑族(선비족)과 漢族(한족)의 混血(혼혈)인 隋(수) 문제 楊堅(양견)이 南朝(남조)의 漢族왕조인 陳(진)을 멸하고 3세기 만에 중국대륙을 통일했다. 양견의 조부는 원래 선비族의 3자 復姓(복성)인 普六茹(보육여) 씨로 행세했다. 중국대륙에서 강력한 통일왕조의 출현은 언제나 주변국들의 存立(존립)을 위협했다.     

598년 6월에 隋(수)의 30만 대군은 고구려 침공을 개시했지만, 兵站(병참) 실패로 인한 飢餓(기아)와 전염병 발생으로 그해 7월에 遼河(요하) 동부 전선에서 퇴각했다. 이후 隋의 위협이 더욱 노골화되자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남쪽의 백제·왜와 연결하는 연합세력을 구축해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다. 文帝(문제)는 恐妻家(공처가)이긴 했지만, 均田制(균전제) 등의 경제정책에 성공해 중국 史上 최대의 國富(국부)를 축적한 君主(군주)였다.

文帝의 뒤를 이은 煬帝 楊廣(양제 양광)은 文史(문사)에 能(능)하기는 했지만, 2중 인격자이고 虛榮(허영) 덩어리였다. 612년 1월, 전국에 동원령을 내려 涿郡(탁군, 지금의 北京)에 113만 3800명의 고구려 원정군을 집결시켰다. 古代(고대) 東아시아 戰史上(전사상) 최대의 병력 동원이었다.

隋 煬帝의 원정군은 요하를 건너 고구려의 遼東城(요동성)을 포위했다. 隋軍의 별동부대 30만은 于仲文(우중문)과 宇文述(우문술)의 지휘 아래 압록강을 건너 平壤(평양) 근교까지 진출했지만, 乙支文德(을지문덕)의 堅壁淸野(견벽청야) 전술에 걸려 철수하던 중 살수(청천강)를 도하하다가 고려군의 水攻(수공)으로 섬멸적 타격을 받았다. 생존병력은 2500명 정도였다. 8월, 양제는 全軍(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煬帝는 613년에도 30만 정예병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동성 등을 포위했으나, 大運河(대운하)의 요충인 黎陽(여양: 洛陽 인근에 위치)에서 戰線(전선)으로 군량을 추진하던 예부상서 楊玄感(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양현감의 절친인 병부시랑 斛斯政(곡사정)도 전선에서 양현감의 반란 소식을 접하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양제는 바로 回軍(회군)하여 楊玄感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런 국내 사정에도 불구하고 煬帝는 고구려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煬帝의 제3차 고구려 원정은 바로 다음 해인 614년 3월에 강행되었다. 양제는 탁군까지 진출했을 때 華北(화북) 곳곳에서 소위 “中原(중원)의 사슴을 쫓는 반란군”이 동시다발적으로 봉기했다. 그래도 隋의 水路軍(수로군)은 卑奢城(비사성, 지금의 旅順) 앞바다에 진입하여 공격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때 고구려 영양왕은 사신 편으로 곡사정을 포박하여 煬帝의 軍門(군문)에 바치면서 곧 入朝(입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궁지에 몰린 양제에게 철군의 名分(명분)을 제공했던 셈이다. 回軍 후 양제는 반란군 집단을 제압하지 못하고 616년 7월 長江(장강) 북안의 江都(강도, 지금의 揚州)로 내려가 酒色(주색)에 빠져 버렸다. 중국 천하는 더욱 혼란해졌다.

 야심가 唐 太宗 李世民의 등장

 617년, 太原(山西省) 유수 李淵(이연)이 거병하여 수도 大興(장안)을 점령하고, 煬帝의 손자 하나를 황제(恭帝)로 옹립하고 자신은 大승상 겸 唐王(당왕)이 되었다. 618년 4월, 江都에서 酒色에 빠져있던 煬帝가 경호실장이던 宇文化及(우문화급)에게 피살되었다. 이 소식이 長安에 전해지자 李淵은 즉각 恭帝를 밀어내고 唐을 창업했다. 그가 바로 당의 高祖(고조)이다. 그의 조부는 선비족의 復姓인 大野(대야) 씨라 일컬었다.

唐 고조 李淵도 수 양제처럼 胡漢雜種(선비족+漢族)이다. 또한 둘은 姨從 4촌간이기도 하다. 수 양제의 어머니는 선비족의 명문 獨孤信(독고신)의 4女, 당 고조 李淵의 어머니도 獨孤信의 9女였다.

동방 3국은 모두 國使(국사)를 보내 새 왕조인 唐에 朝貢(조공)하고 冊封(책봉)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의 내란상태는 수습되지 않고 있었다. 隋末(수말)에 봉기해 ‘中原의 사슴을 쫓던 群雄(군웅)들’이 아직도 건재했던 것이다. 이들을 진압하는 데 제1공을 세운 인물이 高祖의 차남인 秦王 李世民(진왕 이세민)이었다. 그런 이세민을 형제들이 질투했다.

 626년 6월, 李世民은 그를 謀害(모해)하려던 태자 李建成(이건성)과 동생인 齊王 李元吉(제왕 이원길)을 궁궐의 北門(북문)에서 기습 공격해 살해했다. 이것이 이른바 ‘玄武門의 變(현무문의 변)’이다. 이 쿠데타에 의해 집권한 李世民은 두 달 후 父皇(부황)인 고조 李淵을 上皇(상황)으로 밀어내고 스스로 즉위했다. 그가 당 태종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동방의 3국에 대해 군사 개입할 처지가 아니었다.

당 태종의 즉위 12일 후 북방 草原(초원)지대의 최강 東돌궐의 頡利可汗(힐리가한)이 長安에서 70km 떨어진 渭水(위수) 다리까지 남하한 다음에 당 태종을 불러내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太原 擧兵(태원 거병) 당시 頡利可汗에게 騎兵(기병) 3000기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그에 대한 보답이 신통치 못했기 때문인 듯했다. 당 태종은 長安의 府庫(부고)를 탈탈 털어서 頡利可汗에게 조공품을 바쳤다. 이후 10여 년간 당 태종은 東돌궐을 비롯한 기마민족 국가들과의 패권전쟁에 들어가 동방 3국에 대한 군사 개입은 거의 불가능했다.
    
630년, 당 태종은 병법가 李靖(이청)과 싸움꾼 蘇定方(소정방)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파견, 草原(초원)의 패자이던 東돌궐의 頡利可汗을 생포했다. 또 당의 장수 侯君集(후군집)은 638년 서쪽 변경으로 침입해온 吐藩(토번)을 松州(공주)전투에서 격파했고, 640년에는 사막지대를 건너 西域(서역)의 高昌國(고창국, 지금의 투르판)을 멸망시켰다. (계속)

[ 2019-11-07, 12:4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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