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사보에서 남편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간접적으로 받았다. 며칠 미루고 있으니 남편은 매일 성화다. 수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사보 편집자와 짜고서 나를 등장시켜 자기 PR을 자연스럽게 해주기를 고대하는게 아닌지..." 여기에 생각이 미치니 기자남편의 기자 아내답게 춘추필법대로 해야겠다는 결의가 더욱 굳어지는 것이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겠지만 이분은 확실히 연구대상이다.

"기자를 안했으면 맞아 죽었을 사람"은 아니지만 "기자를 안했으면 굶어 죽었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도대체 잘 하는게 없다. 벽에 못 칠 줄을 아나, 전구 하나 갈아 끼울 줄을 아나. 카메라 조작도 서툴러 휴가 때 찍은 사진이 제대로 나온 게 없다. 할 수 없이 비싼 카메라를 없애고 <바보 카메라>로 바꿨더니 좀 나아졌다. 비디오 테이프를 돌릴 줄도 몰라 "샛별아!" "빛나야!" 하고 불러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현대인의 필수 조건인 운전면허도 없다. 서울서 부산까지 달리는데 운전대를 아내에게 맡겨 놓았으면 그만이지 졸지나 않을까 걱정은 많아 생음악으로 50 여곡을 메들리로 불러 젖히고는 처가에 닿자마자 날계란 찾는 사람이다.

그밖에 골프, 화투, 바둑, 당구, 담배, 자전거타기를 못한다. 이런 남편이 요사이 회사에서 컴퓨터를 배운다고 한다. 아마도 조선일보가 투자선택을 크게 잘목한 것 같다. 남편은 기계와는 사이가 아주 나쁜 사람이니까. 남편이 가장으로서 잘하는 것이 있기는 하다. 문단속, 야구방망이를 놓고 주무시는 것. 방망이가 곁에 있어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지만 나는 영 불안하다. 남편의 잠꼬대는 좀 난폭하기 때문이다. 주로 xx자로 표기해야 할 단어가 마구 튀어 나오는가 하면 발길질이 예사다. "도둑놈 뒤통수에 떨어져야 할 방망이가 혹시 내 머리에..." 이런 걱정 때문에 잠을 설칠 때도 있다.

남편은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노래를 가장 많이 부르는 사람일 것이다. 무대는 주로 화장실. "거위 소리 그만 두세요"라는 가족들의 항의가 빗발 치니까 요사이는 아예 <흘러간 옛 노래>책을 갖고 화장실행을 하면 최소한 한 시간이다. 다행히도 우리 집(아파트)엔 화장실이 두 개다. 이분의 18번은 <선구자> <상록수> <마이 웨이> <그리운 금강산> 등등으로 많다. 그 공통점은 가사가 3절 이상이란 사실이다. <그리운 금강산>에 3절이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분은 직접 물어보세요. 남편의 구내 전화번호가 6131 이라던 가?

음정. 박자가 대충이라도 긴 가사를 외웠다는 <성실성>으로써 만회하려는 속셈인 줄 내가 모를 리 없다. 한때 허술(許鉥)부국장님으로부터 <추상화 같은 노래>(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는 뜻인 모양)라는 평을 받기도 했던 남편이 요사이는 친구들로부터 <인간 승리의 한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그 <인간 승리>의 뒤안길에서 소음 공해를 참고 견뎌야 했던 우리 가족들의 고통은 승자(勝者)와 남자위주의 역사기록 속에선 묻혀버리고 말 것만 같다.

우리 부부 사이에서 화장실의 역할은 실로 크다. 보통 새벽 1 - 2시가 남편 의 귀가시간이다. "늦게 돌아오시는 건 좋은데 제발(새벽) 일찍 오지 마세 요"라고 한 마디 하면 책, 신문, 잡지를 함 보따리 싸안고 화장실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곤 함흥차사다. 나오면 한 바탕 할려고 전의를 불태우다가도 내가 먼저 지쳐 잠이 들어버리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화장실이 완충 지역인지 무장 해제지역인지 모르겠다.

키 1백76cm에 몸무게가 20여 년간 60kg 인 남편은 대식가(大食家)다. 경북 오지 출신답게 감자. 옥수수. 포도를 아주 좋아한다. 이 세 종목에 출전하면 남편은 틀림없이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이 먹는> 기록을 세울 것이다. 먹는 방법이 우선 독특하다. 감자는 삶아서 설탕. 소금을 쳐서 먹는 게 아니라 시뻘건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다. 다 뜯어먹은 옥수수를 동개동개 포개 놓는 버릇이 있는데 한 자 높이로 수북히 쌓여도 홀쭉한 배는 그대로 이다.

포도송이를 하모니카 불 듯 하는데 열 개 이상의 포도알을 한꺼번에 입에 넣고 우물우물하면 어느새 한 쪽으로 씨와 껍질들만 분리돼 나온다. 몇 번 훑으면 앙상한 포도줄기만 남게 된다. 사과, 배, 복숭아는 절대로 껍질을 깎지 않는다. 껍질 깎을 때까지 기다리기가 싫어서인지 농약오염 운운해도 완전히 부시맨式이다.

채식을 편애하는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육식은 추어탕. 나를 보고 "회사 그만 두고 추어탕 장사 하라"고 하는 것은 추어탕 끓이는 솜씨에 대한 칭찬이 아니다. 혹시 그렇게라도 하면 끼니마다 추어탕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이런 이상한 버릇의 어리숙한 남편에게서 가금 섬뜩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완전히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릴 때 남편은 무서운 사람으로 돌변한다. 국민학교 6학년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속이고는 야구장에 구경 갔다가 벤치에서 노숙하더니 부산중학교에 입학원서 내라는 부모님의 명령을 묵살하고는 야구 잘하는 경남중학교에 몰래 응시하는 식으로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는 간 큰 짓을 삼가지 않는 남편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걱정도 크고 기대도 크다. (필자 注 : 이 글은 남편의 언론검열을 받아 표현상의 제약이 다소 있었음)

임귀옥(경향신문 자료부장 직무대리. 월간조선 조갑제편집장 부인) <조선일보 사보 1991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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