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서(9): 베일에 싸인 경주 고분群
"지금 경주에서 보이는 왕릉은 155개에 달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것인가 정확하게 알려진 건 28개에 불과합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편집자 注: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하면서 조갑제 기자가 강연한 내용이다.
[태종무열왕릉. 上]
    
  반갑습니다. 저는 경주의 향토 사학자 이재호입니다. 상미회와의 인연이 지난 번에도 있었습니다. 여기 지명이 경북 경주시 서악동입니다. 이곳이 서악동 고분群입니다. 여기가 태종무열왕릉입니다. 저기 써놓은 걸 보고 저희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 왕릉이 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돌로 만든 거북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동감이 있는 돌거북이 보셨습니까. 실제 거북이보다 더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특히 목을 보십시오. 방금 목을 쑥 뺀 거 같지 않습니까. 발톱도 한 번 보십시오. 이런 형식으로 조각하는 것은 신라 때 당나라에서 도입된 것인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산소를 쓰면서 거북이를 만들 때 이 형식으로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재벌들이 산소를 쓸 때 거북이 만드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요즘 거북이像은 발에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형물에 힘이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 정신적인 것에서 비롯됩니다. 지금 사람들은 단가로만 생각하죠. 돌값 얼마, 石手(석수) 임금 얼마 등으로만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단가대로만 하기 때문에 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북이像에 생동감이 없는 거죠. 옛날에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정신과 혼을 담았다는 겁니다. 그랬을 때 이런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제 생각에는 거북이를 만들 때 선조들이 어떻게 새길까 제일 고민했던 것이 꼬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유적을 보면 거북이 꼬리가 위로 올라간 것도 있고 밑으로 내려간 것도 있고 다양한 것이 있습니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이 거북이가 살 것인가, 저는 이 보이지 않는 것, 어떻게 보면 별 중요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서 조형물의 생동감이 좌우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저 위에 보면 이걸 龍首(용수)라고 안하고 '733;首(이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용이 되기 전 이무기일 때 '733;(교룡 이)를 써서 '733;首라고 하죠. 그러니까 용되기 직전, 용이 되면 승천해버리니까 용을 쓰지 않고 이자를 사용합니다. 조갑제 선생님?
  
  조갑제: 네. 저는 경주에 오면 여기가 제일 좋아요. 여기서 올려다보면 꼭 이발소 그림 같지 않습니까. 좌청룡 우백호도 균형이 딱 맞습니다. 이 위로 고분이 다섯 개가 있는데 느낌이 꼭 항공모함같아요. 저는 태종무열왕릉이 있는 이 곳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명당중 하나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역사에서 제일 인물 중 하나니까요. 태종무열왕의 외교력, 목숨을 건 외교력이 삼국통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분이 신라에서 살았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인이었습니다. 642년 자신의 사위와 딸이 대야성에서 백제군에게 죽고 난 다음 복수를 결심했습니다. 그후 먼저 일본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1년 동안 일본으로 갔다고 『일본서기』에 나옵니다. 그 책에 굉장히 말을 잘하고 잘 생겼다고 나옵니다. 원래 일본서기라는 책은 신라를 비난하기 위해서 쓴 책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돌아와서 647년에는 고구려와 동맹을 하기 위해서 연개소문과 만납니다.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면 신라와 동맹을 해주겠다고 합니다. 그건 안된다고 하니까 붙잡힙니다. 태종무열왕이 연개소문에게 붙잡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유신 장군이 결사대를 조직해 쳐들어간다고 하자 풀어줍니다.
  그 1년 뒤에 이번에는 당 태종을 찾아 당나라 서안으로 갑니다. 거기서 羅唐(나당) 동맹을 맺습니다. 당은 신라의 힘을 빌어 고구려를 치고 신라는 당의 힘을 빌어 백제를 치기로 합의합니다. 그때도 태종무열왕이 身言書判(신언서판)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태종도 당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서로 알아본다고 당 태종은 태종무열왕의 인물됨을 알아본 것 같습니다.
  그 후 당나라에서 돌아오다가 서해안에서 고구려 경비정에 걸렸습니다. 잘못하면 죽을 판인데 부하가 태종무열왕의 옷을 입고 대신 죽습니다. 그런 우여곡절끝에 660년 당나라에서 13만 군대가 오고 여기에 김유신 장군의 5만 군대가 합세해 백제를 멸망시킵니다.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정벌한 다음해인 661년에 돌아가십니다. 상당히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태종무열왕보다 김유신 장군이 여덟 살이 많습니다. 태종무열왕의 어머니가 진평왕의 딸이고 김유신 장군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여동생입니다. 나중에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이 태종무열왕의 부인이 되는 건 잘 아실 겁니다. 복잡한 혼인관계로 양 집안이 묶여가지고 삼국을 통일합니다. 삼국을 통일하려면 먼저 권력이 확고해야 됩니다. 권력이 분열되면 안됩니다. 신라부터 권력을 확실하게 잡아야죠. 이렇게 김유신 장군이 뒷받침하고 태종무열왕이 왕이 되고 그 다음에 문무왕, 이 세 분을 신라통일의 三勳(삼훈)이라고 합니다. 태종무열왕은 외교와 왕권, 김유신 장군은 병권과 전략을 담당했습니다. 통일은 문무왕 때 결국 해냈습니다.
  문무왕의 遺書(유서)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만 문무왕은 사람이 아주 담백했던 것 같습니다. 담백하고 결단력이 있고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저는 문무왕에 대해 알수록 점점 좋아지더라구요.
  이 문무왕의 제일 중요한 결단은 당나라와의 싸움입니다. 문무왕은 당나라와 싸워 한반도를 지켜낼 결심을 한 사람입니다. 문무왕이 마지막에 6년을 싸워 당나라를 쫓아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우리말을 쓰면서 한민족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문무왕도 50대에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 당나라의 힘을 빌린 것만 생각하는데 당나라를 쫓아낸 그 위대함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재호(향토사학자): 조갑제 선생님께서 좋은 말씀을 다 하셔가지고 제가 할 말이 없네요. 저는 참고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어르신들께 존대만 하면 공부가 제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편의상 제 이야기를 들으실 동안만 학생으로 대우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서울로 가실 때는 환원시켜 드리겠습니다. 학생 때가 제일 좋은 거 아시죠.
  조금 전에 조갑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저는 김춘추를 요즘으로 따진다면 아마 미국의 CIA 국장 정도라고 봅니다. 외교와 국제관계에서 완벽하게 행동했습니다. 신라 당시의 당나라는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국제적인 국가였습니다. 그때 비단길이라든지 다 개척했으니까요.
  그런 당나라와 대결한 신라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첨단인 나라와 외교 전쟁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미국과 외교 전쟁을 벌인 겁니다. 그러니까 김춘추가 美CIA 국장 정도의 국제 감각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고구려, 당나라와 담판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국제정세를 한눈에 읽었다는 겁니다. 일단 이 곳을 둘러보면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왼쪽으로 돌도록 하겠습니다. 왼쪽은 연장자, 높은 지위의 방향입니다. 우리가 서원에 들어가면 東齋(동재), 西齋(서재)가 있는데 동재는 나이 많은 학생들을 가리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요즘은 학생들 사이에 나이 차이가 안나는데 과거에는 열 살 이상 차이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때 나이 많는 서원의 학생들은 동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할 때도 우의정보다 좌의정이 더 높습니다. 영의정이 국무총리라면 좌의정, 우의정이런 식으로 서열을 매깁니다.
  원래 정상적으로 돌아보시려면 저기 보이는 산까지 가야 하는데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이야기만 해드립니다.
  저기에 서악동 고분이 있습니다. 황룡사에서 보이겠지만 경주에서 황룡사를 중심으로 잡았을 때 가장 서쪽에 있습니다. 남산은 남쪽, 이곳은 서쪽, 동쪽은 토함산과 불국사입니다. 북쪽은 틔여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떨어진 곳의 小금강산을 北岳으로 봅니다. 거기서 확대하면 계룡산, 태백산, 지리산 등을 봤습니다. 중앙은 팔공산으로 봤습니다. 신라는 이런 식으로 몇 겹으로 동서남북의 위치를 잡아 발전해 나갔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하고 학생들하고 인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몇 년에 어땠니 하는, 그렇게 책에 있는 것은 생략합니다. 저는 이런 유물을 어떻게 보는가 방법을 알려드리려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역사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드리려 합니다.
  역사유물을 보면서 느끼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많이 알아서 느끼는 방법이 첫 번째입니다만 세상 모든 것을 언제 다 알겠습니까. 몰라도 느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두 번째인, 유물에 대해서 몰라도 느낄 수 있는 법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평지에서 하나의 왕릉을 보느냐 아니면 측면에서 겹으로 보느냐, 건물을 바라보면서 이 왕릉들을 보느냐에 따라 굉장히 달라집니다. 이런 아름다움도 계속 봐야지 자기 것이 되지 안보다가 보면 좋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보는 방법을 달리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美的(미적)으로 보는 방법도 계속 익혀야 합니다. 저는 그런 쪽으로 감각을 실어드리려 합니다.
  
  조갑제: 이게 왕릉은 확실한가요.
  
  이재호: 기왕에 왕릉에 왔으니까 설명드리겠습니다. 신라는 56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지금 경주에 보이는 능은 엄청 많습니다. 크기로 봐서 왕릉에 준하는 것들을 일제 시대에 고유번호를 매겼던 적이 있는데 역대 왕의 세 배 정도입니다. 155개나 됩니다. 그 번호의 마지막이 우리가 들어봤던 천마총입니다. 천마총도 원래 이름은 墳(분)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덤들을 발굴하기 전에는 분이라고 합니다.
  발굴해보니까 왕릉은 왕릉인데 누구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천마도가 있어 천마총이라고 부르게 된 겁니다. 왕릉은 왕릉인데 누구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을 때는 총을 붙입니다. 발굴하지 않은 것은 총을 붙이지 않습니다. 왕이나 왕비의 무덤은 陵(릉), 왕세자의 무덤은 園(원)이라고 붙입니다.
  그리고 김유신 장군처럼 국가를 위해 아무리 많은 공을 세웠더라도 왕으로 재임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墓(묘)가 됩니다. 크기는 왕릉보다 큽니다만 신분이 다르기 때문에 묘입니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도 묘가 되는 거죠.
  아무튼 그 크기에 따라 왕릉에 준한다 하는 것이 155개라는 겁니다. 그것이 진짜 왕릉인가 아닌가는 1730년을 기준으로 엄청나게 달라지는 게 있습니다. 당시는 조상숭배가 엄청 강했을 때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라 왕릉 11기를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알았냐 하면 삼국사기에 따른 것입니다. 기록에 보면 지금같이 어디서 몇 미터와 같이 정확하게 위치를 표현한 게 아니라 어떤 절이 있다고 하면 어느 절 남쪽 방향 이런 식으로 위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려진 것이 11기입니다. 이것이 1730년부터 바뀝니다.
  당시 경주군수였던 김시행이라는 사람이 박씨 문중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우리 왕릉을 한 번 정비해보자’ ‘그래, 그럼 박혁거세의 무덤이 저 부근이니까 박혁거세 무덤이 있는 쪽 부근은 박씨일 거다’ 이런 식으로 구분을 하게 됩니다.
  저기 보시면 남산 서쪽편입니다. 저기에 있는 왕릉은 전부 다 박씨입니다. 봅시다. 三陵(삼릉)에 가면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그곳에 있는 왕릉은 전부 박씨입니다. 그리고 동쪽에는 김씨 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1730년 17개가 추가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28개입니다.
  앞으로 신라 왕릉에 대해 연구할 것이 많습니다. 문제는 발굴하는 겁니다. 천마총의 경우에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다보니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만 지금은 발굴하려면 문중에서 데모하고 난리가 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원래 묘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때도 많은 반대를 걱정해서 주인이 알려지지 않은 릉 중에서 크기가 조금 작은 것을 일종의 연습으로 발굴했는데 바로 천마총입니다. 그걸 발굴하니까 유물이 엄청 나왔었죠.
  일단 왕릉은 발굴을 안해봤기 때문에 뭐가 어떤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에 누구누구의 왕릉이라고 써놓지를 않았습니다. 백제의 경우에는 무녕왕릉에는 삼화왕이라고 써놨으니까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라는 아무 것도 안써놨습니다. 누구의 무덤인가에 대해 써놓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유추해보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는 웬만하면 자신의 조상 묘를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처럼 당시 신라 사람들도 조상 묘를 가족들이 다 알고 있는데 굳이 표시할 필요가 있나하고 생각한 게 아닐까 합니다. 거기에다 신라는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도 했던 거 같구요.
  일단 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조갑제 선생님 말씀을 듣겠습니다.  

관련기사

[ 2018-10-15, 14:4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  뉴포커스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