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4)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우리 민족은 삼국통일에서 시작됐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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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注: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하면서 조갑제 기자가 강연한 내용이다.
[4.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신운철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계장: 지금 가시는 곳은 金庾信 장군 탄생지입니다. 진천에서 남서 방향으로 약 4㎞ 떨어져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 탄생지는 1999년 6월 11일자로 사적지로 지정됐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生後 1400년 후입니다. 그렇게 역사적 중요인물의 탄생지가 1400년이 지난 후에야 사적지로 지정될 정도로 우리가 역사의식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적지로 지정이 되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베는 것도 모두 문화재청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군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5년 동안 탄생지 정화사업을 그렇게 했어도 해놓은 게 없다. 화장실 두 개 지은 거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진천에서는 김유신 장군 탄생지를 복원하려고 합니다만 복원계획을 문화재청에서 승인을 안해주고 있습니다. 승인을 안해주는 이유가 첫째 지표조사를 해보라, 두 번째는 그 당시의 유적을 복원하는 게 가능하냐는 겁니다. 
  가다보시면 ‘왜 하고 많은 넓은 지역을 놔두고 김유신 장군 어머니인 만명부인께서-지금으로 말하자면 神的 능력이 있다는 분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과 같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터를 잡으실 때 만명부인이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판단했을 경우에-왜 거기다가 터를 잡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희 진천군에서는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역사에는 어떻게 기록돼 있냐면 ‘김유신 장군께서 계양마을 담안방에서 태어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담안방이라는 말의 의미는 큰 울타리 안쪽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보시면 저 쪽에 보이는 산이 태령산입니다. 김유신 장군의 台(태)를 묻었다고 해서 태령산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왕족들은 台(태)를 모셨고 평민들은 台(태)를 태웠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많은 태실 유적들이 남아있었는데 조선 시대에 많은 부분이 훼손됐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태실만큼은 못건드렸다고 합니다. 중부 지방에 태실이 네다섯 개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김유신 장군을 제외하고는 조선 시대 왕들의 태실이라고 합니다.
  지금 천안 연구소에 계신 곽춘근 선생님은 ‘太古史(태고사)’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환인께서 환웅에게 神市(신시)를 건설하고 홍익인간을 실천하라고 하시면서 天符印(천부인) 세 개와 삼천 무리를 내려주시고 신시를 열 때 風伯(풍백), 雲師(운사), 雨師(우사)가 다스리던 세 개의 지역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 풍백이 다스리던 신성한 고장의 중심지가 지상마을이었다고 합니다. 그 지상마을에서 김유신 장군이 태어나신 겁니다. 이런 설명의 근거가 되는 부분은 초기에 신시를 세운 위례성이 어디냐 하는 부분이 먼저 정립돼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곽춘근 선생님께서는 천안 북면이 위례성이라는 근거로 쓰신 겁니다. 풍백, 우사, 운사가 다스리던 지역이 진천, 안성, 천안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안, 진천, 안성 세 개 시군이 행정협의체를 구성해서 그런 부분에 대해 용역조사를 지금 추진 중에 있습니다. 
  지금 이 부분이 김유신 장군 생가터로 1999년 6월에 사적지로 지정된 부분입니다. 저기 보이는 부분 대략 7만 평이 사적지로 지정돼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生家(생가)는 없습니다. 생가를 복원하려고 했는데 아직 문화재청으로부터 승인을 못받은 상태구요. 그렇다면 생가는 어디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데 여기서 200~300m 떨어진 곳에 蓮寶井(연보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그 연보정이 삼국시대 때 쌓은 유적입니다. 경주에 있는 財買井(재매정)이라는 우물과 같은 양식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우물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전쟁 중이니까 먹는 우물에 적이 毒을 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물을 적들로부터 항상 보호를 해야 하기 때문에 우물을 담 안에 두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곳이 김유신 장군의 생가라고 추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가 탄생지로 지정된 게 1999년 6월 11일입니다. 너무 늦은 감이 있고 역사적 평가 같은 부분에서 우리 후손들이 너무 등한시해 죄를 지은 거 같습니다. 
  그리고 길상사는 원래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길상산에 있었습니다. 원래는 길상산으로 불렀을텐데 그 후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으면서 지금은 태령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조갑제: 이순신 생가는 역사상 성역화해 놨는데 김유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김유신과 이순신을 비교하면 재미있습니다. 김유신은 장엄한 생애고 이순신은 비장한 생애죠. 장엄하다는 건 성공 스토리고 비장하다는 것은 비극이죠.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살아남았다면 틀림없이 모함에 걸려 제 명을 다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 이순신은 국가, 임금인 선조가 지원을 잘 안해줘 독자적으로 외롭게 싸웠습니다. 게다가 나라에서는 열심히 싸우는 사람을 불러들여 곤장을 치고 백의종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순신도 나중에는 자살하는 심정으로 나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김유신의 신라는 조선과는 다르기 때문에 나라에서 지원을 해줬습니다. 김유신은 신라에 대해 아무런 유감이 없었다고 김유신 전기 마지막에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라는 김유신이 하자는대로 해줬기 때문에 거기에 틈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주고 하자는대로 하니까 통일을 하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군인을 알아주는 시대에 태어난 장군은 성공했고 조선조처럼 군인을 멸시하는 시대에 이순신이 나오니까 문제가 생긴 겁니다. 난중일기 같은 걸 읽어보시면 답답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즉, 김유신은 오래 사셨고 하고 싶은 것 다했고 하는 그런 점에서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비극적으로 죽은 분을 추앙해야 균형이 맞는 면도 있죠. 성공한 사람은 나중에 천천히 해줘도 되구요. 이 정도 보고 주변을 둘러보세요.
  
  신운철: 이것이 흥무대왕 遺墟碑(유허비)입니다. 이것은 태종무열왕의 유허비와 모양이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 유허비의 글은 육당 최남선 선생께서 지으신 겁니다. 최남선 선생은 흥무대왕 김유신 유허비와 탄금대 신립 장군 유허비의 비문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비석에는 흥무대왕 김유신 유허비라고 적혀 있습니다. 유허비란 공적을 이렇게 기린다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巨頭(거두)라고 하면 두 분이 계십니다. 한 분은 단재 신채호 선생, 한 분은 육당 최남선 선생이십니다. 
  두 분은 김유신 장군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육당 최남선 선생은 김유신 탄생비를 쓰기 위해 진천에 거의 와서 살다시피 하셨다고 합니다. 반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시대라는 상황 때문에 김유신 장군에 대해 안좋은 쪽으로 많은 글을 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독립투사로 알려져 있고 육당 최남선 선생은 친일행적 때문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까 현재 역사학계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뜻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주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큰 흐름 자체에서도 그런 부분이 약간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여기 유허비에도 그런 부분들이 나옵니다. 어떤 부분들이 나오냐 하면 ‘論者(논자)가 或(혹) 新羅(신라)의 統三(통삼)에 唐(당)의 兵威(병위)를 假(가)한 것이 民族觀念上(민족관념상) 如何(여하)하랴를 難(난)하지마는 본디 民族觀念(민족관념)은 西洋第十五世紀(서양제십오세기) 以降(이강)의 社會的(사회적) 産物(산물)로서 東洋古代(동양고대)에는 그 語句(어구)조차 發見(발견)되지 않는 것이니 저 唐(당)의 創業平難(창업평난)에 여러번 突厥回紇(돌궐회흘)의 外兵(외병)을 借用(차용)하였음이 唐(당)의 帝業(제업)의 疵類(자류)가 되지 않고 西洋中世紀(서양중세기)의 國家發達(국가발달)에 예사로 各國傭兵(각국용병)을 援用(원용)하였다 해서 그것을 貶薄(폄박)할 수 없는 것처럼 後世(후세)의 民族主義的(민족주의적) 標準(표준)으로써 古代(고대)의 自國至上的(자국지상적) 國民倫理(국민윤리)를 逆推(역추)함은 결코 平論(평론)이 아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갑제: 이 말이 아주 중요한 겁니다. 신채호는 신라가 당나라라는 외세의 힘을 빌려 고구려, 백제를 쳤기 때문에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봅니다만 그 당시 신라가 당나라에 합병된 것이 아닙니다. 또 당나라가 신라까지 침략하려고 하니까 신라가 당나라를 쫓아낸 거 아닙니까. 당시 당나라는 세계 최대의 강국이었는데도 말이죠. 그런데도 한반도를 차지하려던 당나라를 내쫓은 그 부분은 이야기를 안하고 ‘당의 힘을 빌렸다’는 부분만 강조하는 겁니다. 두 번째 삼국이 같은 민족이라고 자꾸 이야기하는데 백제, 고구려, 신라는 같은 민족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까 최남선이 민족이라는 개념이 언제 생겼느냐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이라는 것은 서양에서도 15세기에야 비로소 생긴 개념이지 6세기, 7세기에는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싸운 것 아닙니까. 즉, 통일한 다음에 민족이 생긴 겁니다. 당시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기준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민주주의가 없었던 세종대왕 시절에 세종대왕보고 ‘왜 당신은 직선제로 왕이 되지 않았느냐’ 라고 욕하는 것하고 똑같다는 말입니다. 
  
  신운철: 여기를 마무리한 다음, 보탑사에 있는 통일대탑으로 갈 겁니다. 
  이 글의 흐름을 보시면 제일 끝이 ‘統一一念(통일일념)이 千秋(천추)에 相照(상조)하나니 此碑此記(차비차기)가 한갖 一片述古(일편술고)의 文(문)에 그칠 것이 아니다’라고 마무리하셨단 말이에요.
  이곳 진천이 한반도를 몸으로 봤을 때 단전이고 기가 모인 곳인데 통일대탑이 이곳에 섰습니다. 지금 통일의 기운이 움트고 있습니다. 제가 거기에 대해서 보탑사로 가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아시겠지만 황룡사 9층 목탑이 신라 통일의 뜻을 담은 것인데 9층 목탑을 세우고 20년 만에 신라가 통일이 된 겁니다. 진천에 통일대탑이 섰는데 30년 안에 통일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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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4, 11:0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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