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서(10): “원래 감춰진 것이 오묘한 겁니다”
“문화 유적들을 보실 때 앞만 보지 마시고 뒤를 돌아보시면 기막힌 모습들이 많습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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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注: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하면서 조갑제 기자가 강연한 내용이다.
[태종무열왕릉. 下]

  
  조갑제: 이재호 선생과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경주 고분이 언제부터 나타났느냐 하면 4세기부터 나타나는데 그때가 신라가 박씨, 석씨 다음에 김씨 왕조가 나타난 시대입니다. 미추왕 다음에 내물왕이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예전에 98호분-다른 이름이 대릉원입니다-을 우리가 발굴한 적이 있습니다. 98호분은 천마총 맞은편에 있습니다. 천마총은 1973년에 발굴했고 98호분은 이어서 1974년에 발굴했습니다. 그것을 내물왕릉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이 학자들 중에 많아요. 그리고 155호분은 법흥왕의 아버지인 지증왕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시기가 6세기 초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고분들의 형식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민족도 잘 안바꾸는 게 장례풍습입니다. 그러니까 장례풍습을 보면 무덤의 주인이 어떤 계통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라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장례풍습중 적석목곽분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게 어떤가 하면 나무로 관을 짜서 시신을 넣고 그 위에 자갈을 얹고 마지막에 흙을 덮는 형식입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 관이 무너지면서 그 위에 쌓은 자갈돌에 무덤이 눌려버립니다. 도굴을 안당하겠죠. 경주 고분에서 신라 유물이 많이 나오는 이유도 이런 무덤 형식 때문에 도굴이 안되서 그렇습니다. 덕분에 이 무덤들을 발굴하면 금관도 나오고 합니다.
  이런 무덤 형식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스키타이라고 하는, 이란 계통의 유목민족, 흉노족 그쪽에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 고분들이 왜 4세기부터 나왔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 무렵에 북쪽에서 흉노의 기마민족 일단이 들어와 여기의 토착 왕조를 누르고 김씨 왕조를 세운 게 아닌가 하는 게 저의 가설이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연구를 해야 할 부분입니다.
  아마 이 무덤은 적석목곽분이 아닐 겁니다. 적석목곽분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없어집니다. 중국의 영향을 바로 받기 시작하는 게 법흥왕 때로 추정됩니다. 법흥왕이 신라를 개혁하죠. 법흥왕이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법흥왕이 불교과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가지고 일종의 유신을 합니다. 그때부터 신라가 강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적석목곽분같은 유목민족 계통의 무덤이 사라지고 석실묘가 생기는 시기입니다. 석실묘는 100% 도굴됩니다. 뚫기 편하지 않습니까.
  
  이재호(향토사학자): 제가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묘 형식이 이렇게 둥글지 않습니까. 이게 원형봉두분이라는 겁니다. 신라 시대의 묘 중에서 석실분 이전의 적석목곽분들은 현재 함몰된 게 많습니다. 그게 왜냐하면 목곽을 넣은 다음 머리만한 돌들을 쌓은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이건 목곽이 썩으면 돌이 눌러 함몰됐다는 설도 있고 경주 사람들이 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은 청춘남녀들이 그 위에서 사랑을 나누다 함몰돼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제 위로 한 번 올라가 보시죠.
  
태종무열왕릉의 입구에서는 왕릉이 모두 보이지 않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하나씩 드러나는 왕릉의 모습이 신비롭다


 

 아까 저기서는 세 개밖에 안보였는데 지금은 숨어있던 것들이 보입니다. 오묘하지 않습니까. 원래 감춰진 것이 오묘한 겁니다. 보이는 건 별 게 아닙니다. 
  옛날에는 여행가면 속리산 법주사에 다녀왔으면 됐고 경주 불국사에 다녀왔으면 됐지 뭐가 필요하냐 했습니다만 지금은 불국사에 갔다오면 내가 뭘 봤고 뭘 느꼈다고 하는 게 필요합니다. 불국사도 앞만 보면서 구경하면 별다른 게 없습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기가 막힌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인생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앞만 보다 한 번쯤은 뒤를 한 번 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펼쳐집니다. 이런 유물을 보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뒤를 돌아보면 유물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때로는 뒤를 돌아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저와 인연을 맺은 학생들만이라도 앞만 볼 것이 아니라 좀 더 폭넓게 뒤도 앞도 봤으면 좋겠습니다.
  

태종무열왕릉 유적지의 맨 안쪽에서 뒤돌아본 왕릉의 全景


  이곳에서 입구 맨 앞쪽의 것이 태종무열왕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것들은 뭔가. 여러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틀린데 김씨의 것이 위에 것이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 우리가 조상을 숭배하던 풍습을 기초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신라 시대에도 과연 그랬을까 생각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조선시대나 지금처럼 할아버지 묘 밑에 아버지 묘를 쓰고 하는, 그런 개념으로 태종무열왕릉 위의 능은 그 윗대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그건 우리시대의 생각일 뿐이고 신라 시대는 근친혼에서부터 해서 가족 관계가 지금과 전혀 다릅니다. 姓도 지금과 다르고 자식이 여자의 姓을 따르는 등 지금과는 가족제도가 달랐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해드리겠습니다.
  
  조갑제: 경주 사람들은 어떤 산업에 종사하면서 생활합니까.
  
  이재호: 경주는 산업 조건이 별로 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합니다. 경주에는 공장도 없고 큰 관공서도 없습니다. 경주 인구가 13만 명입니다. 서울의 작은 규모의 洞만 합니다. 그런 작은 곳에서 어떤 산업이 있어 잘 살겠습니까. 살기가 어렵죠. 최근에 방폐장 건립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는데 경주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는 좀 안맞습니다. 제가 며칠 전 서울 CBS에서 생방송을 하고 왔는데 방폐장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그 부분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방폐장은 경주와는 이미지가 안맞기 때문에 방폐장이 들어선다는 행정구역이 양남이라는 지역이니까 양남 방폐장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로마 방폐장, 아테네 방폐장이라는 게 있다면 우리가 그 도시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름이라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 태종무열왕릉은 다 보셨습니다. 다음 코스로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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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16, 11:5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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