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서(14): 통일염원을 담았던 名作, 황룡사지 9층목탑
못 하나 안쓰고 20층 건물 높이의 목탑을 세운 신라의 건축기술은 현재의 대한민국도 따라갈 수 없는 수준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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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注: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하면서 조갑제 기자가 강연한 내용이다.

 [황룡사지 9층 목탑터]
  
  이재호 향토사학자: 자, 여기가 황룡사터입니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게 다르죠. 여기 잔디가 있는데 잔디가 겨울에 죽어갈 때는 굉장히 미끄러우니까 조심하세요.

  여기를 볼 때 핵심은 이겁니다. 당시 신라가 황룡사를 짓는 데 93년 걸렸습니다. 황룡사는 진흥왕 때부터 지었고 목탑은 선덕여왕 때부터 세웠습니다. 절 전체를 짓는 데는 553년부터 93년이 걸립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9층 목탑터가 바로 저깁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건 황룡사 9층 목탑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높은 목탑이라는 정도입니다. 탑의 높이가 80미터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20층 건물 높이죠. 그 탑을 못 하나 쓰지 않고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건축 실력으로 할 수 있느냐. 그게 안됩니다. 5공화국 당시에 시멘트로 한 번 만들려고 시도하다 안했고 지금도 문화재청 등에서는 이 황룡사지 목탑을 어떻게든 복원해보려고 하는데도 할 수가 없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목수들을 다 동원해도 탑을 복원할 실력이 안된답니다. 할 수 없대요.

  우리가 착각하는 게 신라시대에는 컴퓨터도 없고 비행기도 없고 그런데 뭐가 대단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문명의 利器(이기)가 없으면 사람이 더 지혜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옛날에 시골에서 살 때, 텔레비전이 없을 때는 하늘의 별을 보고 상상력을 키우며 살았습니다. 지금은 하늘을 안보고 삽니다. 텔레비전에서 정해진 시간대로 방송해주는 프로그램만 머리에 입력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그 시대보다 상상력도 부족하고 사고력도 없는 편이라고 봅니다. 문명도 지금이 더 발달한 거 같지만 지금은 흉내만 낼 뿐이지 그대로 만들지 못하잖습니까.

  옛날에는 오히려 더 문명의 속도가 빨랐습니다. 왜 빨랐냐 하면 어떤 민족이 이동하면 그 문명을 그대로 가지고 이동하죠. 신라도 저 북방에서 온 민족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이동하면 자기들의 문명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이 자리가 어디냐 하면 丈六尊像(장육존상)이라고 해서 1丈 6尺짜리 불상이 있던 곳입니다. 1丈이 3미터니까 불상의 높이는 4미터 80센티미터 정도됐을 겁니다. 요게 立像(입상)이 있던 자리입니다. 참고로 불상의 뒤편을 光背(광배)라고 합니다. 뒤편 전체를 그렇게 부릅니다. 그리고 몸에서 나는 빛을 身光(신광), 머리에서 나는 빛을 後光(후광)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게 불상을 세우는 받침대 자리입니다.

  여기 보시면 홈이 파여있죠. 이게 본존이 서있던 자리고 여기에 협시가 서게 돼 있었죠. 본존과 좌우 협시입니다. 여기가 절의 가장 중심이 되는 금당터이고 금당터 앞이 목탑이 있던 터입니다.

  지금 문화재청에서는 레이저 홀로그램을 가지고 밤에만 가상의 황룡사 9층 목탑을 보이도록 하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레이저가 잘 보이게 하려면 배경 스크린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이 과연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지, 그게 또 다른 흉물이 되는 게 아닌지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즉 실제 목탑은 세울 수 없으니까 레이저로 하는 걸로 추진하고 있다는 겁니다. 황룡사와 9층 목탑이 계속 이어져 오다가 완전히 불타 사라진 것은 몽고의 3차 침입 때입니다. 고려 고종 때인 1238년에 불타 사라졌습니다.

  저게 뭔지 현장을 한 번 보시죠. 황룡사 9층목탑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통일을 염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적인 목적입니다. 신라의 서라벌은 분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먼 곳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80미터 높이의 전망대를 만들어 주변을 감시하는 역할도 했던 겁니다. 

 이 황룡사 목탑은 서라벌의 중앙에 위치합니다. 여기서 동서남북을 보세요. 동쪽에는 토함산, 서쪽에는 우리가 금방 다녀왔던 西岳(서악), 선도산이라고 합니다. 남쪽에는 남산, 뒤에는 조금 허전하지만 동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있는 소금강산이 있습니다. 소금강산을 北岳(북악)으로 봤습니다. 이렇게 동서남북의 가장 중앙에 세운 것이 황룡사입니다. 여기에 세운 탑 위에서 주변을 보면서 外敵(외적)이 오나 안오나 감시했던 것입니다.

  아까 선덕여왕 당시 일어났던 반란 이야기를 드렸죠. 정부군은 저기 半月城(반월성)에 있었고 반란군은 明活山城(명활산성)에 있었습니다. 보문단지 가는 길에서 우측에 있는 산이 바로 명활산입니다.
  참고로 그 당시 전투는 지금처럼 전면적으로 전투하는 게 아닙니다. 각 진영의 대표들이 한 명씩 나와서 싸웁니다. 거기서 이기거나 지는 겁니다. 제가 볼 때는 김유신이 대단한 전략전술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신라는 5만 명의 군사로 최소한의 피해만 보면서 백제를 점령해야 하는 반면 백제는 계백이 5000명의 결사대로 죽을 각오로 싸우는 거였습니다. 계백의 부대는 어차피 죽을 거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고 백제를 사수하자는 거였습니다.

  이러면 아무리 10 대 1의 싸움이라 하더라도 신라의 입장에서는 싸움이 제대로 안되는 겁니다. 한 쪽은 피해를 적게 보면서 싸워야 되고 한 쪽은 죽기살기로 달려드니까 신라가 수적으로는 많아도 심리적인 면에서 이미 열세였던 거죠. 그래서 심리적인 면 때문에 처음에는 밀리죠. 그래서 필요했던 게 화랑입니다.

  이때 그 유명한 관창이 등장합니다. 관창이 나와서 ‘제가 나가겠습니다’ 이러면서 나갑니다. 나갔다가 계백에게 잡혀 살아서 돌아옵니다. 돌아오니까 아버지가 ‘니가 전투를 하러 갔다가 창피하게 살아서 오냐’ 그럽니다. 관창은 다시 계백에게 도전합니다. 결국 계백은 관창의 목을 쳐서 돌려보냅니다. 이 모습을 본 신라군들이 분노하면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에는 결국 역사대로 된 거 아닙니까. 저는 이런 게 대단한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이쪽으로 오십시오. 요것만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이제 점심 맛있게 드실 거니까 마지막 공부해야 됩니다. 여기 돌이 보이시죠. 이것이 기둥을 세우던 터입니다. 여기가 탑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지금 바람이 많이 불죠. 이런 바람 속에서도 버티는 80미터 높이의 목탑을 세웠다는 겁니다. 지금도 세울 수 없다는 탑을 못 하나 쓰지 않고 만들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지금보다 건축실력이 더 뛰어났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아래에 보면 원래 사리가 있었습니다. 보통 불탑은 사리를 모십니다. 일반적으로 사리는 2층 탑신이나 3층 탑신에 주로 보존합니다. 그런데 황룡사 9층 목탑의 사리는 이 돌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불타고 흔적만 남았어도 사리는 누가 가져가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나중에 이 아래에서 꺼낸 겁니다. 사리장엄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큰 구멍은 중심을 잡기 위해 쇠를 사용했던 자리죠. 그렇게 중심을 세워서 80미터 높이로 쌓은 거에요. 상상해 보세요. 탑의 규모는 주변에 보이는 주춧돌의 범위만 했을 겁니다. 불국사도 임진왜란 이후에 다 불타버린 것을 새로 지은 겁니다. 불국사가 燒失(소실)된 후 그 후의 조선 왕들이 복구를 하고 영정조 시대로 이어지다가 박정희 때 완성한 겁니다. 그게 옛날 불국사의 10분의 1입니다. 돌은 불이 나도 안 상하죠. 그러니까 주춧돌 흔적을 가지고 대충 계산해서 새로 복원한 겁니다. 불국사도 하나도 흔적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하나 복원한 것이었습니다.

  황룡사지 9층 목탑을 지금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는 건 원래 복원하려면 그나마 옛날과 유사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의 기술로는 옛날 방식대로 복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박물관에 가보면 대강 모형만 만들어져 있습니다만 그건 추정이고 원형을 알 수도 없습니다. 또 이 정도의 유물 복원이면 돈도 수 조원이 듭니다. 요즘같이 살기 힘든 상황에서 국민들 중 누가 이걸 수 조원을 들여서 복원하자고 하겠습니까. 아직까지는 대한민국 상황에서 힘들죠. 저는 일단 여기까지만 하고 조갑제 선생님 말씀을 듣겠습니다.
 
  조갑제: 여기가 통일의 염원을 담아서 만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돌(심초석)을 한 번 만져보세요. 그럼 통일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고구려에서 오신 분들 있잖습니까.

  자, 여기를 보면 다들 9층목탑을 복원했으면 싶으시죠. 그런데 저는 이걸 복원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불국사도 박 대통령 시절에 안짓는 게 나았을 거 같아요. 그 터에 가서 느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역사인데 말이죠. 박 대통령 당시의 불국사 복원, 그건 복원이 아니라 새로 만든 거 아닙니까.

  아까 陵(능)을 보시면서 그 속에 뭐가 들었느냐 하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싶으니까 왜 안파느냐고 물으시는데 그건 안파고 놔두는 게 낫습니다. 우리가 유적지를 다 파버리면 나중에 후손들은 뭘 연구하겠습니까.

  발굴을 흔히 파괴라고 합니다. 무턱대고 발굴을 하면 어떤 것은 보존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상하게 됩니다. 지금 天馬圖(천마도)도 보존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처음 발굴 때보다 많이 상했습니다. 그러니까 발굴은 보존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처리기술이 있을 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진시황릉의 위치를 알면서도 발굴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속에 굉장한 유물들이 많을텐데도 말이죠.

  제가 도굴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적석목곽분은 도굴하기 어렵다고 아까 말씀드렸죠. 그런데 그 적석목곽분을 도굴한 사람이 있습니다. 경주 교동에 가면 1972년에 발견된 작은 아기금관이 있습니다. 그 도굴꾼이 그걸 팔다가 잡혔습니다. 결국 추적을 해서 도굴꾼을 잡았습니다. 어떻게 도굴했느냐 물으니까 집에서 했답니다. 대체 어떻게 도굴을 했는지 궁금해서 제가 그 집에 찾아가봤습니다. 그 집에는 도굴꾼이 그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도굴했는지 좀 더 상세히 물어봤습니다.

  이 도굴꾼이 그 주변을 지나가다 보니까 무너진 돌벼락같은 게 있더랍니다. 그래서 보니까 이게 왕릉급 고분이었다는 겁니다. 도굴꾼이 주변을 살펴보니까 고분 옆에 집이 있었답니다. 도굴꾼은 나중에 그 집에 전세를 들었습니다. 그 집에 살게 된 후에는 부장품이 있을만한 곳을 향해서 땅굴을 뚫었습니다. 몇 달 동안 밤에만 작업을 했답니다. 그 땅굴이 부장품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맞췄던 겁니다.

  이 사람 말이 그 무덤에서 귀걸이, 금관 등의 유물이 300점 이상 나왔답니다. 그래서 유물들을 와르르 끌고 나왔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건 이런 전문도굴꾼들은 물건을 제 값 받고 팔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나까마’라고 부르는 중간상인들을 통해 유물들을 박물관에도 팔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아기금관을 모 그룹 회장에게 유물을 팔려고 했다가 그룹 회장이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걸린 겁니다.

  제가 가보니까 무척 가난하게 생활하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선물로 계란을 사가지고 갔습니다. 당시에는 계란이 선물이니까요. 그 사람은 유명한 도굴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또 다른 이야기가 이 곳 황룡사지를 도굴했답니다. 밤에 자동차용 工具(공구)를 가지고 와서 했답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여기인 것 같습니다. 황룡사 금동사리함이라고 하니까. 이걸 도굴한 다음 단순한 금조각으로 보고는 뜯어서 조각조각 팔아버렸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황수경이라고 박물관장을 하던 사람이 이걸 다시 조각조각 사모았습니다. 하여튼 그 일이 떠오릅니다. 참, 이 탑은 백제 사람인 아비지가 감독을 했다고 하죠?
 
  이재호: 맞습니다. 그 당시에 백제와 신라가 적대 관계에 있었다 하더라도 문화적으로는 같이 교류를 하지 않았었나 생각됩니다.

  아까 신라는 철학이 발전했다고 했는데 백제는 공예가 발전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백제 지역은 비옥하지 않습니까.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공업이 발전합니다. 무엇을 만들고 그러면서 손재주가 발달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굉장히 전투적인 성격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넓은 황야에서 언제나 外敵과 싸워야 하는 생활입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고구려는 전투적이었고 백제는 비옥한 환경 덕분에 예술적이었습니다. 백제는 지금도 판소리부터 예술적인 부분이 뛰어나지 않습니까.

  경상도는 산골이죠. 출세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안동같은 곳은 주로 시험보러 서울로 갔던 겁니다. 안동 지역이나 다른 경상도 지역에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많은 것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 우리가 할 이야기는 많지만 이제 식사하러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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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25, 12:4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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