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서(8): 삼국통일의 단초가 된 관산성 전투
백제 성왕은 아들 여창을 문병하러 심야에 50명의 기병대만 데리고 가다 이곳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참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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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옥천 관산성 터]
  
  조일권 충북 옥천문화원 이사·향토사학자: 안녕하십니까 조일권입니다. 저는 현재 옥천문화원 이사로써 향토사 중 山城(산성) 분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 제가 짧게나마 옥천의 역사와 관산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지역은 아시다시피 충청북도 옥천군입니다. 삼국시대 때는 신라의 古尸山郡(고시산군)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때 관성郡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 이후에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 때 옥천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것은 백제 성왕의 죽음 때문입니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지역을 차지하면서 신라와 백제의 羅濟 동맹이 깨지고 그 이후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관산성을 침공한 신라군과 싸우다 잡혀 죽음으로써 백제는 중흥의 기틀을 빼앗기고 신라는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그런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날씨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는데 11시 방향으로 보시면 약간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있습니다. 저 산에 성벽 자체는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둘레 약 900미터 정도의 성터가 있습니다. 1500년 전에 큰 전투가 있을 당시에는 성벽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무너진 돌들만 남아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올라가시면 막상 볼 게 별로 없습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 성왕이 구천에서 신라 장수 도도에게 잡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저희 옥천의 관산성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구진벼루라는 절벽이 있습니다. 벼루라는 말은 벼랑의 사투리입니다. 지금 현재 학계에서는 거기에 나오는 구천과 이 지역에 있는 구진벼루라는 지명을 유추해 백제 성왕이 전사한 장소가 그곳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현지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저기 도로공사를 하면서 파놓은 곳들을 보셨는데 저 도로공사가 끝나면 저희 옥천군에서 성왕 戰死碑(전사비)와 그에 대한 안내판을 만든다고 합니다. 3년 정도 뒤에 오시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아무런 안내판도 없어서 정말 죄송스럽습니다.
  우선 이 동네가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입니다. 저 마을이 양지마을, 이쪽이 음지마을입니다. 이 부근의 지명은 전쟁과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분전이라는 마을이 저쪽에 있고 지금 산을 깎고 있는 저 부분은 말무덤 고개라고 부릅니다. 말무덤 고개라는 것은 말이라는 것을 크다는 의미로 써서 큰 무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전쟁에서 말이 많이 죽어서 묻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전쟁과 관련된 지명입니다. 또 저쪽에 보면 殮葬(염장)이라는 지명도 있습니다. 염장이라면 일종의 시체와 관련된 지명입니다. 또 군대가 진을 쳤다는 진터벌 등 전쟁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습니다.
  원래는 여러분들께서 마주보는 저 부분에 가셔야 하는데 길이 험하고 막상 올라가도 성벽이 남아있지 않아서 볼 것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 1600년 전 이곳은 큰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라서 성벽도 대단했을 텐데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돌무덤밖에 없습니다. 상당히 많은 돌이 있는 걸로 봐서는 꽤나 큰 성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성은 삼국이 통일이 되고 나서는 전략적 가치가 없어 써먹지 않았습니다. 다른 지역처럼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요충지였다면 계속 사용해서 성벽이 남아있을 텐데 그렇지 않다보니까 관리가 안되고 전부 다 무너져서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여기서 보시면 저 절벽을 구진벼랑이라고 합니다. 여기 현지에서는 구진벼루라고 부릅니다. 벼루라는 말은 벼랑의 사투리입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성왕이 구천에서 신라군에게 잡혀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여기서 구천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학계에서는 관산성이 이 부근이니까 구천을 구진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관산성 전투는 서기 554년 신라의 침공으로 羅濟 동맹이 깨지고 성왕이 이 지역을 침공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역사적 사실로 보면 첫 번째 전투에서는 백제군이 관산성을 거의 차지했는데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신라의 김무력 장군이 한강 유역에 주둔하고 있던 정예군을 끌고오면서 전세가 혼전이 됐습니다. 그 상태에서 성왕의 아들, 여청이 이 성에 주둔하면서 신라군과 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병에 걸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왕이 다른 곳에 있다가 아들을 문병하러 밤에 5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다가 신라장수 도도의 매복에 걸려 잡혔습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본다면 저 부분이 상당히 협곡인데 아마 저쪽에서 매복에 걸려 가지고 이쪽으로 도망오다가 이 부근에서 잡혔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조갑제: 지난 주에 사전답사를 와서 저 성에 올라갔다 왔거든요. 저 산의 높이가 303미터인데 올라가보니까 성터가 있기는 있습니다. 있기는 있는데 모두 흙에 파묻혀 있고 돌만 조금 남아있습니다. 유적은 삼태기처럼 비대칭형 타원형으로 남아있습니다. 그쪽까지 올라가려면 굉장히 힘드실 것 같아서 저희가 대표로 올라갔다 왔다고 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지방에는 그런 성이 산꼭대기 곳곳마다 있다고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여기가 삼국의 최전선, 요즘으로 치면 DMZ(비무장지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전쟁 당시 성왕의 아들인 여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위덕왕이 됩니다. 이 사람이 부대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3만 명을 이끌고 왔다고 합니다.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요즘의 인구로 비교한다면 그때 백제 인구가 많이 잡으면 300~40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니까 요즘으로 치면 몇 십만 명을 동원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신라 진흥왕도 그 정도 병력을 동원했을 테니까 이 주변 골짜기마다 군인들이 꽉 메우고 있었을 겁니다.
  초전에는 성왕이 좀 유리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왕자인 여창이 아팠습니다. 기록에는 여창과 아버지 성왕의 관계가 좀 서먹한 것처럼 나와있어요. 여창이 아프니까 성왕은 그게 마음에 걸린 겁니다. 그래서 혼자 50명의 기병대를 데리고 가다가 매복을 당해서 잡혀 죽었습니다. 신라에서는 성왕의 목을 치는 사람으로 누구를 뽑았느냐 하면 아주 비천한 사람으로 하여금 목을 치도록 했다고 합니다. 상대방의 왕을 노예 출신 장군이 목을 치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 백제군의 기를 완전히 꺾기 위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성왕의 목을 친 곳이 이 근방일지도 모르죠. 하여튼 매복에 걸린 장소가 이 근방이라는 겁니다.
  전번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저 쪽에서 다 내려다보고 있었을 텐데 자기편이 도망가고 잡히고 하는 것을 모두 보면서도 왜 가만히 있었을까 생각했었는데 그 때는 핸드폰이 없었잖아요. 멀리서 내려다보면 누구 편인지도 잘 모릅니다.
  전쟁이라는 건 참 우습습니다. 전쟁에서는 아군끼리 서로 싸워서 죽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게 混戰(혼전)이라는 겁니다. 전쟁이라는 게 원래 혼란 상태거든요. 경계선 그어놓고 이쪽은 아군, 저쪽은 적군 이런 게 아닙니다. 전부 뒤섞여버리는 게 전쟁입니다. 그래가지고 서로 막 비벼대다가 어느 한 쪽이 유리해지는 것이 전쟁입니다. 전쟁은 원래 아수라장입니다.
  예컨대 광주사태의 경우에도 보면 진압군이 30여 명이 죽었습니다. 그 중 10여 명은 자기네들끼리 오인사격으로 죽은 것입니다. 시민군 200여 명 사망자 중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하여튼 백제는 다 이겨버린 전쟁에서 왕이 이런 식으로 죽으면서 패배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군 2만여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나옵니다. 백제 군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당시 백제군에는 백제만 온 것이 아니고 가야군대가 오고, 일본군대가 여기까지 와서 도와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판이 나면서 그 뒤에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기록을 하나 뽑아왔습니다. 이상하게 이 관산성 전투는 굉장히 큰 전투고 삼국통일을 준비하게 된 전쟁인데도 삼국사기에는 아주 간단하게 나와있어요. 한두 줄 정도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에 제일 자세하게 나와있습니다. 일본서기라는 것은 730년에 만든 역사서입니다. 삼국사기보다 400여 년이 빠른 일본의 正史입니다. 우리의 삼국사기와 같은 책입니다. 거기서는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산성 전투는 주로 그 기록에 의한 겁니다. 삼국사기하고 맞춰보면 대충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때 일본의 천황은 헌명 천황이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가야군대가 1만 명 정도 잃고 난 8년 뒤 대가야가 망합니다. 즉 일본 왕족의 고향이 망해버린 겁니다. 그 소식을 들은 헌명 천황이 뭐라고 말했냐는 게 적혀 있습니다. 전부 신라 욕입니다. 신라 때문에 고향이 망했으니까요.

  <신라는 서쪽 보잘것 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황가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郡縣(군현)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우리 신공 황후가 신령의 뜻을 밝히고 천하를 두루 살피시어 만백성을 돌보셨다. 그때 신라가 천운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애걸함을 가엾게 여기사 신라왕의 목숨을 살려 있을 곳을 베풀어 번성하도록 하여주었다. 생각해보아라.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를 푸대접한 일이 있는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미마나-이 미마나가 가야입니다-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간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시신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하늘 아래의 어느 백성이 이 말을 전해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않겠는고. 하물며 황태자를 비롯하여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그 자손들과의 情懷(정회)를 회상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이건 완전히 원한이 사무친 말 아닙니까.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게 뭐냐하면 신라가 그 뒤에 한반도의 주인이 돼버렸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가야 사람들은 일본의 주인이 된 거 아닙니까. 또 백제가 망한 다음에 백제 사람들이 일본으로 많이 갔습니다. 즉 오늘날의 한일 감정의 뿌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일본 서기의 역사관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관점입니다. 그러니까 가야, 백제가 신라에게 가졌던 감정이 그 뒤에는 어떻게 됐느냐 하면 한일간의 감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일본이 한국에게 가지는 감정, 자기 고향을 망하게 한 그것을 여기서 잘 느낄 수 있습니다. 헌명 천황이 죽을 때의 유언을 소개해 드립니다.

  <천황이 마침 대궐 밖으로 나가있던 황태자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불러들이고 병상 가까이 오게 하여 그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내 병이 무거우니 너에게 뒷일을 당부하여 둔다. 너는 신라를 쳐서 미마나, 옛 가야를 재건하라. 그리하여 옛날과 같이 사이좋게 지내게 된다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다.”
  천황이 이 달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이 전투가 단순하게 여기서 싸운 게 아니라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도록 만드는 그 중간단계였습니다. 그 다음에 가야가 무너져버리고 그 뒤에는 백제까지 같이 멸망하니까 일본으로써는 충격이었던 겁니다. 이 사건은 한일 관계에서 아주 재미있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지금 여기에는 아무 것도 없지만 이렇게 현장에서 보시면 뭔가 이렇게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백제 성왕은 살아있을 때 수도를 옮깁니다. 성왕이 공주에 있던 수도를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바꿉니다. 遷都(천도)를 잘못하면 큰일 난다는 게 백제의 경우입니다. 백제는 천도를 세 번 했죠. 처음의 수도는 위례성입니다. 지금 강동구 천호동 근방에 있던 위례성이었는데 고구려가 쳐들어오니까 공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공주가 좁잖아요? 그래서 다시 부여로 옮겼는데 이렇게 수도를 옮길 때마다 亂이 일어나거나 쿠데타가 나든지 해가지고 정권운영이 잘 안됐습니다.
  반면 신라는 경주에 터를 잡은 다음에 망할 때까지 한 번도 옮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서울 하면 지금의 서울과 경주를 말합니다. 서울의 어원이 서라벌입니다. 서라벌이 변해서 서울이 된 겁니다.
  아무튼 백제는 성왕이 죽은 뒤에 원수를 갚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기회를 잡은 게 의자왕 때입니다. 의자왕은 초창기에는 상당히 영명한 왕이었습니다. 의자왕의 백제는 계속 신라를 쳐서 합천-당시는 대야성이라고 했는데-을 함락시킵니다. 그때가 642년인데 합천을 함락시킬 때 성을 지키던 김춘추의 사위와 며느리가 항복을 해요. 항복한 이후에는 여기와 비슷하죠. 의자왕은 항복한 사람들을 모두 목을 쳐 죽여버립니다. 그 소식을 들은 김춘추의 반응에 대해서 삼국사기에 잘 나와있어요.
  김춘추가 그날 사위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둥에 머리를 박고 멀뚱멀뚱하게 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모르게 있으면서 하루동안 가만히 있더라는 거에요. 그러더니 반드시 내가 이 복수를 해야 되겠다 하면서 삼국통일의 결심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삼국통일이라는 것이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겠다는 계획보다는 살아남기 위해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 후에 김춘추는 일본에 건너갑니다. 일본과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잘 안됩니다. 그 다음에 고구려를 찾아가 연개소문을 만납니다. 김춘추를 만난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에 있는 땅, 신라 진흥왕 때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땅을 다 돌려주면 니네 편 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고구려와도 연합이 안됩니다. 결국 김춘추는 648년 당나라를 찾아가서 당태종과 만납니다. 거기서 신라와 당나라 연합이 만들어집니다. 이 연합을 통해서 당나라는 신라 손을 잡고 고구려를 치려고 하고 신라는 당의 힘을 빌려 백제를 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양쪽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진 거죠.
  그때 국제사회에서는 백제, 고구려, 倭가 한 편이 된 남북 동맹이 있었고 당나라 신라가 연합한 동서 동맹이 있었습니다. 나당 연합군과 고구려, 백제, 倭가 전쟁을 벌인 결과, 나당이 이겼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망하고 倭는 중립화돼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200~300년 동안 동아시아 평화를 가져왔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참, 여기 문화원 부원장 전순표 선생님이십니다. 일부러 또 오셨네요.
  
  전순표 옥천문화원 부원장: 저희 옥천을 방문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저희 옥천은 삼국시대 산성 유적이 사십여 군데나 됩니다. 이 곳 구진벼루를 빙 둘러서 모두 산성터입니다. 조 기자님께서 말씀해주시겠습니다만 여기가 삼국시대의 격전지였습니다. 관산성이죠. 또 삼국의 구분을 가로지르는 그런 사적지가 여기 있다고 합니다만 저희가 몇 년간 찾으려고 해도 못찾고 있습니다.
  관산성 전투 당시 백제의 군사가 이곳 접경지역에 주둔해 있었습니다. 여기 10리 내에는 전부 백제 땅이었습니다. 백제 군사가 여기 있었고 백제 성왕은 저쪽에 고리산이라고 있습니다. 그곳에 오셔가지고 성왕의 아들 여창, 나중에 위덕왕이 되신 여창이 여기 넘어가 탄현이라는 곳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성왕은 아들이 최전선에 나가서 고생을 하고 있고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니까 격려차 이곳으로 왔어요. 성왕은 친위대 기마병 50여 명을 데리고 저쪽으로 갔습니다. 마침 보은 삼년산성에는 신라군 사단급 규모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김유신 장군이 주둔하던 진천은 군사령부, 여기는 사단급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신라군이 여기 와서 매복을 하고 백제 성왕의 움직임을 봤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마 여기서 붙잡아서 이쪽으로 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여기서 백제 성왕을 처단을 해서 경주로 목을 보냈습니다. 북청 계단이라고 해서 왕궁에 가면 계단이 있잖아요. 계단 아래에 놔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이 그랬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저희 옥천을 관산군이라고 했었고 그 다음에 북한산성에 성을 지키는 사람을 관성장이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관성군이라고 했습니다. 그 뒤에 조선 태종 시대부터 옥천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600여년간 이르고 있습니다.
  옥천에는 백촌 김문기 선생, 그리고 조원 선생이 원래는 김포 분입니다만 이 곳에서 활약하신 분입니다. 그 분께서는 일찍이 임진왜란을 예견하셨습니다. 보은 현감도 하셨어요. 그 외에 전라도 道使(도사)도 하신 분입니다. 그 분의 전기를 잘 보세요. 조원 선생은 토정 선생에게 배운 역술로 앞으로 전쟁이 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李珥(이이) 선생이 10만 양병설을 이야기했을 때 ‘아, 우리도 군사를 많이 비축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상소를 경복궁 앞에 도끼를 들고 가서 ‘왕께서는 군사를 많이 기르십시오’하고 몇 년 동안 수 차례에 걸쳐 상소하면서 귀양도 가고 그랬던 분입니다.
  그 분께서 보은 현감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내놓고서 옥천 안내면으로 오셔가지고 그곳에 후율정사라는 정사를 지어서 후학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이 선생이 율곡이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후율이다. 율곡 선생의 제자라고 자처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열흘만에 상주를 점령했어요. 그러니까 경상中路, 경상西路, 경상東路를 따라서 상주까지 왔어요. 상주에는 서울에서 보낸 군사와 자체적인 군사들이 있었지만 점령당했습니다. 일본이 침공한 지 열흘 만에 상주가 점령당하고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서울이 점령당했죠. 그당시 올라가는 적군에 대항해서 임진왜란 3대 의병장인 조원 선생께서 이 옥천에서 제자들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서 보은에서 청주로 가는 차림이란 곳에서 전투를 벌여 처음 승리를 했습니다. 그 후 금산 전투에서도 승리를 했던 그런 고장입니다.
  다른 유명한 분이 계십니다. 조선왕조실록에 함자가 삼천 번 나오는 분이 송시열 선생입니다. 송시열 선생이 옥천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래는 그 가문이 대전 회덕에 있었지만 우암 선생께서 이 옥천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이후에는 정지용 시인이 태어나셨죠. 정지용 축제가 올해로 열일곱 돌이 됐습니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육영수 여사가 이 옥천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마침 오늘이 육영수 여사 생가 상량식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제가 늦었습니다.
  
  조갑제: 육영수 여사 生家(생가)는 이제 다 지었습니까.
  
  전순표: 안채를 열두 채 짓는데 오늘 나무로 상량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2006년 5월이나 6월 중에 안채 준공식을 하고 2007년까지 70억을 들여서 한 3년 뒤에 완성할 예정입니다. 郡費(군비) 4억, 충북도비 4억, 국비 4억 이렇게 12억을 들여서 우선 안채부터 짓고 앞으로 3년간 50억 원을 더 들여서 완성할 계획입니다.
  
  조갑제: 그럼 堂號(당호)는 뭐라고 합니까.
  
  전순표: 육영수 여사 생가라고 합니다.
  
  조갑제: 그럼 육 여사 생가가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보다 먼저 서는 거네요.
  
  전순표: 그렇네요. 그리고 여기 주변에 있는 나무들이 모두 복숭아 묘목들입니다. 1970년대, 80년대부터 옥천은 복숭아 묘목으로 유명합니다. 옥천은 묘목의 고장입니다. 전국 묘목의 60%를 공급합니다. 복숭아, 포도, 사과, 밤, 대추 묘목의 60%를 옥천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또 비닐하우스 포도도 전국적으로 유명합니다. 포도연구소가 전국 유일하게 옥천에 있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조갑제: 감사합니다. 좋은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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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12, 10:2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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