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서(16): “나는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
“나는 속세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다 맛봤다. 그러니 한 마리 짐승이 되어도 상관없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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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注: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하면서 조갑제 기자가 강연한 내용이다.

[감은사지 3층 석탑 上]
  
   이재호 향토사학자: 여기가 感恩寺(감은사)지 석탑입니다. 이건 아마도 통일을 기념하기 위한 사업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태종무열왕은 일단 백제를 제압했습니다만 고구려까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아들인 문무왕이 통일을 완성하죠.

전쟁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진 사람은 물론 더 비참할 것이고 이겼다고 해도 상처뿐인 영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 보문단지에 묵으실 기회가 있으시면 암곡동 무장사지에 들러보세요. 전쟁이라는 것은 이제 그만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무장사입니다. 거기를 가려면 개울을 건너고 하면서 10리를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 곳에 가셔야 역사 유적의 진면목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여기는 뭐냐 하면 문무왕이 왜를 진압하기 위해 짓다가 생전에 완성을 못하고 그의 아들인 신문왕이 마무리한 곳입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자, 반도는 통일했다. 그러면 이제 倭가 신경쓰인다. 그러니까 내가 護國龍(호국룡)이 되도록 해달라.’ 그래서 여기에 절을 세웁니다. 만약 백제가 통일을 했다면 아마도 군산 정도에 이런 걸 세우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과거에는 왕조를 불문하고 거의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내가 통일을 했다’ 그러면 뭔가 기념사업이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놀라는 정도의 규모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절과 탑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보시는 탑은 지금 위에 상륜부가 없는 상태인데 당시 상륜부가 있는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까무라칠 정도의 탑이었다고 합니다. 3층 석탑으로서는 가장 컸다고 합니다.

이런 예는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일례로 경기도 벽제 화장터에서 저 멀리 북쪽으로 보시면 용이리 석불이 보이실 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바로 漢城(한성)에 들어가는 입구를 표시하기 위해서 세운 겁니다. 그 다음에 안동에 가시면 제비문 석굴이 있습니다. 그건 신라로 진입해 들어오는 경계를 표시한 겁니다. 또 백제 부여 쪽으로 가시는 길에는 후백제 시대에 개태사 부근에서 왕건과 견훤이 마지막에 전투를 했지 않습니까. 그 쪽으로 보면 충남 논산 관촉사에 있는 은진 미륵이라고 아시죠. 거기 보면 불상이 큰 게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王建(왕건)이 後三國(후삼국)을 통일하고 자기 왕조를 開創(개창)하면서 백제 세력에게 내가 좀 잘났다는 것을 뽐내기도 하고 그 지역 사람들을 敎化(교화)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항상 상대적이에요. ‘내가 이렇게 잘 났다, 우리 세력이 좀 크다’ 하는 자랑과 ‘이제는 우리와 같이 하자’는 유화적 태도가 항상 같이 내포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기념 사업물들은 美的인 부분은 다음 문제고 일단 규모가 커야 합니다. 그래서 은진 미륵불상도 별로 멋이 없죠. 이 감은사지 석탑 같은 경우에는 다행히 아름다움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규모가 큰 게 최우선입니다. 그런 식으로 출발합니다. 그게 우리 시대까지 이어져 ‘동양 제일’로 나오는 겁니다. 가만 생각해 보세요. 70~80년대 보면 방송에서 ‘동양 제일’을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그러죠. 우리는 이제 큰 거 가지고 폼잡지는 않잖아요. 어떻게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느냐 이게 문제지. 옛날에는 그랬다는 겁니다. 그런 걸 보면 이런 건축물들도 하나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거죠. 이 시대는 삼국을 통일한 급박한 시기에 기념사업으로서 했다 그 정도로 아시면 됩니다.

이게 해량입니다. 불국사에도 해량이 있습니다. 해량은 國刹(국찰)에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소규모 사찰은 안되고 국가적으로 만든 사찰에만 만듭니다. 위엄있는 절에서 일반 신도들은 불당에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죠. 이건 일단 불당에 못들어간 신분이 낮은 사람을 위한 목적도 있고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도 있는 등 다용도입니다.

여기는 석탑 수리를 위해서 차량 진입로를 만든 겁니다. 여기를 한 번 볼까요. 제가 모두 설명하면 끝도 없으니까 간단하게 설명하고 저 위에서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건 아직도 학계에서 뭔지를 몰라요. 우리가 책에서 배울 때에는 박영효가 신사유람단에 갈 때 배 안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여기 태극 문양이 있습니다. 이것은 周易(주역)에 나와 있는 겁니다. 周易은 생활의 지혜입니다. 점 치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 옆에 톱니바퀴처럼 생긴 게 있죠. 제가 周易을 조금밖에 모르지만 저 톱니바퀴가 陰陽(음양)을 나타내는 게 아니겠나 생각됩니다. 陽陰陰陽陰陽(양음음양음양)이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태극기에 卦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주역의 八卦(팔괘)죠. 우리는 乾坤坎離(건곤감리) 이런 걸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라 시대에는 이게 이미 생활화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신라 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깊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탑을 보시죠. 아까 말씀드렸지만 항상 왼쪽이 높은 지위를 의미한다고 그랬죠. 여기가 동탑, 저기가 서탑입니다. 방향이 정확하지 않더라도 좌우를 동탑, 서탑으로 구분합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곳과 지는 곳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東宮(동궁) 마마는 들어봤어도 西宮(서궁) 마마는 못들어봤죠. 왜냐. 동궁은 떠오르는 태양을 의미하고 서쪽은 폐위된 것을 말합니다. 왕비가 폐위되면 서궁으로 보냅니다.

 저는 저녁 노을을 굉장히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해돋이는 금방 지나가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항상 동쪽을 중시합니다. 떠오르는 태양이니까요.

그리고 여기서 탑을 보는 것과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이 두 개의 탑은 크기가 똑같습니다. 이 雙塔(쌍탑)은 신라가 통일된 이후에 처음 만들어진 겁니다. 기중기나 장비가 없었던 옛날에 이런 탑을 만든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기록문화가 참 잘 돼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 잘 안돼서 그렇죠. 참고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성-지금은 화성이라고 하는데-은 왜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냐 하면 흔적은 없더라도 기록은 남아 있거든요.

여기는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절을 처음으로 발굴한 겁니다. 1959년일 겁니다. 그 이전에는 일제가 주로 우리 유적을 발굴했습니다. 이 절터를 발굴할 때는 민가들이 수십 채 있었는데 민가들을 다 수용하고 발굴하면서 지금처럼 됐습니다.

기록에 보면 감은사지는 문무왕이 동해 용왕이 돼 자기가 쉬어갈 곳으로 만든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문무왕이 통일을 이룬 다음에 ‘나는 죽어서 용이 되겠다’ 하자 평소에 친분이 있던 智義(지의)법사가 이렇게 묻습니다. ‘왜 하필 짐승이 되려고 하느냐’ 그러니까 문무왕은 ‘나는 이미 속세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다 맛봤다. 그러니까 한 마리 짐승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대답합니다.

자기는 속세의 모든 권세와 영화를 가져봤으니 이제는 용이 돼 倭(왜)를 진압하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문무왕이 이 절의 이름을 鎭國寺(진국사)라고 지었습니다. 鎭護國寺(진호국사)의 준말입니다. 즉 ‘나는 죽어서 倭(왜)를 진압하겠다’ 그랬는데 이 절을 짓는 도중 문무왕이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절을 완성한 후에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에서 感恩寺(감은사)로 이름을 바꿉니다.

이 위로 금당터가 돼 있었고 이 밑에 문무왕이 여기 머물다가 동해로 나가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여기와 동해가 연결돼 있지 않았겠나 하고 보는 분도 있습니다.
불국사를 보면 石壇(석단)에서 물이 나오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 아래의 소나무 숲과 연결돼 있는데 거기가 옛날에는 연못이었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 당시에 불국사를 완성했는데 그것은 만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대웅전하고 그 사이에서 물이 흘러나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렇게 만들 실력이 안되서 못만든 겁니다. 감은사 복원계획도 불교계에서는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죠.

여기를 보실 때는 하늘에서 내려다 봐야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봐야 진면목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석탑이 수리 중이라서 조금 작품이 안좋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하늘에서 봐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가 이 여행의 코스에 맞추고 있습니다만 만약 제가 직접 일정을 짠다면 저는 감은사에 올 때는 해거름에 옵니다. 이게 낮에 보면 감동이 별로 없더라구요. 그런데 해가 질 때 오면 逆光(역광)에 비친 거대한 탑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뭔가 굉장히 강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행을 다녀와서 ‘나는 어디어디 갔다왔다’라고 말씀하지 마시고 갔는데 무엇을 봤느냐, 아침에 갔느냐, 점심에 갔느냐, 비가 올 때였느냐, 눈이 올 때였느냐 이런 것을 보셔야 합니다. 가끔 어디어디 갔다왔다고만 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대화하기 싫죠. 예를 들어 불국사를 간다고 할 때 저는 몇 번이나 갔겠습니까. 수십 번이 넘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 불국사에 가면 하루 종일 둘러봐도 안지겹습니다.

저는 초급자를 데리고는 불국사에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국사의 진면목을 보지 않고 그냥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은 기회가 없어 보지 못합니다만 양동 마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회 마을은 좀 상업화돼 있는 분위기고 경주 양동 마을이 좋습니다. 거기 역시도 일반적인 기행을 하면 두 시간이면 다 봅니다만 저 혼자 가면 1박 2일 일정으로 갑니다. 그래도 다 볼 수가 없습니다. 골목골목마다 집집마다 살펴보고 저 나름대로의 느낌을 받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시인들이나 글 쓰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은 감동받은 게 없으면서 책에는 ‘사람들이여, 감동받아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감동을 받았다 해도 그걸 글로 전달하면 감동을 받을까 말까인데 말이죠. 그런 건 似而非(사이비)입니다. 

지금은 태양이 중천에 떠 있으니까 이 탑을 봐도 별 감동이 없죠. 나중에 석양이 지고 해 그림자가 넘어가고 이럴 때 보시면 그리움이 사무치면서 마음 속에서 뭔가가 올라옵니다. 다음에 그런 기회를 만드시라는 겁니다.

어쨌든 문무왕이 이 절을 짓다가 죽습니다. 저는 이 문무왕의 여러 가지를 좋아합니다만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유언입니다. 이걸 의역하면 이럴 겁니다.
‘세상에 아무리 잘난 영웅도 나중에는 무덤에 들어간다. 여우와 토끼가 굴을 뚫고 목동들이 올라가서 피리를 불고… 세상이 한낱 덧없으니까 내가 죽으면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열흘 뒤에 창고에서 나를 불태워서 뿌려라’ 이렇게 나옵니다. 기가 막히죠.

신라 시대에 火葬(화장)을 한 왕이 일곱 명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지금까지 화장한 왕은 한 명도 없습니다. 저는 앞으로 그런 걸 권하고 싶어요. 앞으로 청와대 들어가는 사람들이 공약으로 자기가 죽으면 묘를 만들지 말고 화장해서 뿌리라는, 散骨(산골)하는 사람이 나와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윗 사람이 솔선수범을 해야 아랫사람들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의 代案(대안)으로 납골당을 보급하고 있는데 그것도 차지하는 공간만 적을 뿐 또 하나의 매장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散骨(산골)을 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상관없었습니다. 땅에 비해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까. 지금은 매장한다는 게 어렵다는 걸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우리에게도 자연으로 순환시키는 문화가 필요한 겁니다.

거기 덧붙여서 2000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하나의 무덤에 여러 사람을 묻었더라구요. 처음에는 가족들이 한 사람씩 죽을 때마다 무덤을 계속 파헤치다가 나중에는 출입문을 만들어서 가족을 합장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선조들이 자연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 수 있지 만약 우리가 전부 아버지, 할아버지 묘 관리하듯이 하면 살 곳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등지가 전부 과거의 묘터입니다. 부모님 세대에서 하던 대로 묘를 관리했다면 지금 우리가 아파트를 짓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여기에 대해 風水的(풍수적)으로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왜 여기에 만들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다와 가깝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利見臺(이견대)에 가실 겁니다. 그곳이 원래 산 위였습니다만 지금은 길 밑에 있습니다. 이견대를 산 위에 만든 이유는 바다도 지켜야 되고 사람도 살아야 하니까 바다 근처의 산 위에 만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풍수적으로 ‘이 곳이 용의 송곳니다’하는 이야기를 하는데 신라 시대에는 풍수가 도입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풍수는 다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풍수를 안믿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만 하나 말씀드리고 끝내겠습니다. 정약용 선생과 관련해서 이런 기록이 나오더라구요. 조선 시대에는 풍수의 영향력이 엄청났습니다. 訟事(송사)의 대부분이 풍수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땅 싸움이죠. 당시 어떤 풍수쟁이가 정약용 선생에게 와서 그랬습니다.
   ‘영감님, 이 자리만 쓰시면 三代 동안 정승이 나옵니다. 멋진 자리입니다.’
   당시에는 이런 소리에 안넘어갈 사람이 없었다는 거죠. 그 말을 듣고 있던 정약용 선생이 딱 한 마디 한 겁니다.
   ‘야, 그렇게 좋으면 니네 아버지 써라, 왜 나한테 이야기를 하는가?’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정말 기가 막히더라구요. 그 풍수쟁이의 말이 진실이라면 정말 자기가 써야죠. 저는 이 정도로 끝내고 이어서 조갑제 선생님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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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31, 16:0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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