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서(13): 삼국통일 삼총사의 콤비네이션
한 신라史 연구학자에게 왜 고구려가 신라에 망했냐 물으니 ‘태종무열왕과 연개소문의 인간성을 비교해보면 안다’고 했습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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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注: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하면서 조갑제 기자가 강연한 내용이다.

[김유신 장군묘 下]  
  
  조갑제: 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게 핵심입니다. 이번 여행을 오기 전에 누가 제 사이트(www.chogabje.com)에 이런 말을 적어놨습니다. ‘신라같은 북한, 백제같은 대한민국.’ 
  이 말이 뭐냐 하면 북한이 마치 과거의 신라처럼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핵개발과 대남공작 등을 벌이면서 힘을 키우는데 반해 대한민국은 잘 먹고 잘 살다보니까 과거의 백제처럼 나태해져 북한에게 당할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바로 신라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가 삼국통일을 했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신라가 처음부터 거대한 뜻을 가지고 삼국통일을 추진해 나갔다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까 통일을 이룩했다는 겁니다.


  저는 김유신이라는 인물을 우리 역사의 第一(제일)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민족이라는 것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우리가 만났던 진천 군수께서는 조금 앞서나간 이야기를 하시던데 민족에 대한 이야기가 단군까지 올라가면 좀 복잡합니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한민족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바로 삼국통일에 의해서 한민족이라는 단위가 만들어졌습니다. 신라통일이 우리 민족을 만든 것이기 때문에 곧 신라통일의 제일 元勳(원훈)인 김유신이 우리 민족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분에 대해서 이어령씨가 옛날에 쓴 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유신이 천관녀와 사랑을 하다 자신의 잘못을 비겁하게 말한테 돌려서 말의 목을 쳐버렸다며 김유신을 비겁한 사람이라면서 서양의 유명한 사람들과 비교해서 쓴 글이 있습니다만 그건 권력의 속성을 잘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가야 출신이지만 신라의 왕족과 결혼함으로써 권력을 향한 1단계에 진입합니다. 그 다음에 김유신은 자기의 여동생을 김춘추와 결혼하게 만듦으로써 권력의 한복판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권력을 만들었기 때문에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김유신은 전략, 정략, 모략 이런 것의 名手(명수)였던 것입니다. 


  김유신을 평가할 때는 정직한 사람 뭐 이런 일반적인 도덕 기준으로 보면 안됩니다. 김유신이라는 인물은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뤄낸 사람이다보니까 필요에 따라 나쁜 짓도 할 줄 알고 좋은 일도 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지킨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그런 표현을 썼는데 김유신은 장엄한 생애, 이순신을 비장한 세계라고 했었습니다. 


  김유신은 굉장히 大器晩成(대기만성)했습니다. 우선 권력관계를 보면 647년 선덕여왕 때 毗曇(비담)의 난이라는 쿠데타 음모가 일어났습니다. 왜냐. 선덕여왕이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왕이 여자니까 당시 上大等(상대등)이던 毗曇(비담)이라는 귀족이 우습게 보고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또 당나라의 부추김도 한 원인이 됐습니다. 
  그때 누가 당나라에 갔다왔는데 당 태종이 ‘아, 거기 신라는 여자가 왕이던데 그 여자 가지고 되겠나’라는 말을 듣고 옵니다. 
  이런 말까지 전해지자 비담은 선덕여왕을 여자라고 얕보고, 당나라를 믿고선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 쿠데타는 김유신이 진압을 합니다. 진압하는 과정에서 선덕여왕이 죽어요. 그 다음에 또 여자가 왕이 됩니다. 바로 진덕여왕입니다. 진덕여왕이 즉위 8년 만에 죽은 다음에 새로운 왕을 뽑게 됩니다. 


  그때는 왕을 추천으로 뽑았습니다. 누구를 어떻게 추대했냐 하면 그때 화백 제도라는 게 있잖아요. 화백제도에서 귀족들이 만장일치로 왕을 뽑습니다. 이렇게 귀족들이 화백 회의에 모여서 閼川(알천)이라는 사람을 왕으로 추대합니다. 그런데 알천이라는 사람이 김유신의 눈치를 보니까 김유신이 별로 안좋아하거든요. 그러니까 자진사퇴하고 김춘추를 추대합니다. 김춘추는 곧 왕이 되고 그가 바로 태종무열왕입니다. 결국 김춘추는 김유신이 만든 왕인 셈이죠. 그렇다고 김유신이 김춘추에게 거만하게 행동했다든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660년 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칩니다. 당시 소정방은 13만 군대를 데리고 왔습니다. 소정방은 그 餘勢(여세)를 몰아서 신라까지 먹으려고 했어요. 이를 눈치채고 태종무열왕과 김유신, 신하들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이 회의를 하면서 어떻게 할 거냐 물어보니까 김유신이 이렇게 말했다고 삼국사기에 적혀있습니다.
  “개는 주인을 두려워 하지만 주인이 개의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반란을 당해서 자신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말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여기서 주인은 당나라고 개는 신라입니다. ‘당나라가 신라를 도와 백제를 친 것은 고마운데 우리까지 없애려고 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게 신라적인, 또는 대한민국적인 자주국방 정신 아닙니까. 그래서 딱 싸우려고 하니까 소정방이 눈치를 채고 그냥 갔습니다. 가서 당 고종에게 귀국 신고를 합니다. 당 고종이 수고는 했는데 왜 내친 김에 신라를 치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소정방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말도 삼국사기에 나와 있습니다. 


  ‘신라가 비록 나라는 작지만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는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아랫 사람은 윗 사람 모시기를 父兄과 같이 여기니 나라는 비록 작으나 함부로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을 한 소정방은 서역 평정도 하고 신강성 등에는 소정방 전적비도 많습니다. 소정방은 당시 당나라에서 가장 잘 싸우는 장수였습니다. 또 당시의 당나라는 지금의 미국처럼-아까 이 선생님의 말씀대로-가장 국제화된 나라였고 그 중에서도 고종 때가 가장 전성기였습니다. 그러니까 당나라의 가장 전성기 때 최고의 명장이 신라라는 나라를 어떻게 봤는가를 이 문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작지만 안으로 똘똘 뭉쳐있고 임금, 신하, 백성이 효도와 충성으로 무장돼있어 함부로 도모할 수 없다’고 한 말이 신라가 어땠는지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이 구절은 아마도 중국의 後唐書(후당서)에 쓰여 있던 말을 삼국사기를 쓸 때 인용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걸 보면 김유신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대충 알 수 있습니다.
  김유신은 대기만성형입니다. 그 이유는 660년 백제를 망하게 할 때 김유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갔습니다. 그때 김유신의 나이가 예순 여섯입니다. 


  그 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 당나라가 고립이 됐습니다. 그때 당나라 군대에 군수 보급을 위해서 갔을 때 나이가 일흔이었습니다. 
  그리고 668년에 평양을 함락시킬 때는 일흔 다섯의 老將(노장)이었습니다. 삼국지의 조자룡이 일흔 넘어서 선봉에 서고 한 것은 소설이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역사적인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초인적인 사람입니다. 
  김유신 장군이 돌아가신 것은 673년입니다. 676년에 당나라가 완전히 한반도를 포기하기 3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문무왕이 찾아와 마지막 문병을 할 때 김유신이 문무왕에게 부탁을 한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요점만 이야기하면 ‘創業(창업)보다 守成(수성)이 더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삼국통일을 이루는 것도 어려웠지만 이걸 지키려면 人和가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김유신 列傳(열전)을 읽어보면 인용할만한 문장이 참 많습니다. 예컨대 고구려를 치러 갈 때 김유신이 직접 출전을 못하니까 사령관이 와서 어떻게 할까 묻습니다. 김유신은 ‘백제도 오만해서 망했고 고구려도 지금 오만함으로 망해가고 있으니까 우리의 정직으로써 적의 굽은 곳을 치면 이긴다’고 말합니다. 정직을 뭐라고 표현할지 여러 가지 해석에 따라 틀리지만 하여튼 우리의 정직으로 적의 굽은 곳을 치면 이긴다고 말합니다.


  요새 연개소문과 고구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연개소문이 당나라와 싸운 것은 잘한 것이기는 합니다. 왜 강력했던 고구려가 신라에게 망했느냐 하는 것을 노태동 교수라고 신라 역사를 전공한 사람에게 물어보니 간단하게 대답을 합니다. ‘그건 태종무열왕과 연개소문의 인간을 비교해보면 안다.’ 즉 인간의 차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은 세계인이고 연개소문이란 사람은 영유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울 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사람입니다. 나중에 자기가 죽고 난 다음에는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당나라로 도망가기도 하고 신라에 붙기도 하는 등 제대로 관리를 못했습니다. 이것의 원인을 노태동 교수는 인격의 문제라고 보는 겁니다. 


  우리가 삼국통일의 원천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만 역사상의 지도자를 보면 태종무열왕, 김유신, 문무왕이라는 삼총사의 이런 콤비네이션이 없습니다. 세계 역사에서 굳이 유사한 사례를 고른다면 1860년에서 1870년 사이 독일이 통일할 때 비스마르크의 외교(김춘추에 해당), 몰트케의 군사(김유신에 해당), 빌헬름 1세의 정치력(문무왕) 정도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아까 이 선생님의 말씀하신 대로 복수심에서 출발했습니다. 이건 부여에서 말씀드려야 실감이 날 거 같습니다만 먼저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에 삼국사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의자왕에게는 扶餘隆(부여융)이라는 태자가 있었습니다. 문무왕은 붙잡힌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 때문에 우리 누나가 죽었다. 그것 때문에 몇 년 동안 내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슬퍼했다”라고 고백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것을 보면 삼국통일의 출발이 대야성 싸움에서 김유신의 사위와 딸을 죽이고 그 시체를 가져간 것에서 시작됐다는 겁니다. 이것은 옥천에서 백제 성왕을 죽이고 그의 시체를 모욕했다는 것에 대한 백제의 복수와 거기에 대한 신라의 복수. 이런 복수가 계속 이어진 결과였다고 생각됩니다. 이상입니다.
  
  이재호 향토사학자: 이제 묘 주변을 한 번 둘러보시겠습니다. 불교에서 보면 탑들이 그렇죠. 그 다음 묘의 둘레를 보면 어느 방향, 어떤 곳인지 나타나 있습니다. 처음에는 동서남북으로 하고 그 다음에는 시간별로 자, 축, 인, 묘 등 12地支(지지)를 둘러서 새겼습니다. 여기 제일 북쪽이 뭡니까. 쥐(子)입니다. 남쪽은 말(午)입니다. 그 다음에는 왼쪽에서부터 순서대로 12地支를 새깁니다. 항상 왼쪽으로 갑니다. 이런 형식이 삼국통일 前期(전기)에는 완벽하게 유지되다가 말기에는 형식만 남게 됩니다. 


  저는 2000년, 3000년 전의 무덤을 발굴현장에서 수없이 봅니다. 고분 발굴현장 에서 보면 지금이나 그 당시나 무덤을 만드는 큰 풍습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무덤을 만들때 자기 아버지가 했던 것을 특별한 계기로 완전히 새로 바꾸지 않는 이상 아버지가 예전에 무덤을 만들던 대로 만듭니다. 대개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또 그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했던 것을 비슷하게 합니다. 그런 식으로 무덤을 만드는 것이 이어지기 때문에 2000년 전이나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무덤에는 큰 변화가 없습니다.


  다만 신라와 고구려가 다릅니다. 신라는 圓形(원형)으로 돼 있고 고구려는 方形(방형ㆍ사각형)으로 돼 있습니다. 중국에 있는 광개토 대왕릉같은 것을 보면 딱 方形입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에 있는 丸都山城(환도산성)도 方形으로 돼 있습니다. 백제가 지배한 서울의 위례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제의 溫祚(온조)가 고구려 출신 아닙니까.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하다가 능산리 쪽으로, 부여쪽으로 가서는 이 원형 봉토분으로 바뀝니다. 처음에는 백제도 항상 고구려처럼 方形, 신라는 원형 봉토분이었습니다.


  신라에서는 예외적으로 방형 고분이 두 개가 있습니다. 뭐냐하면 하나는 경북 울산의 은현리 積石塚(적석총)이 있습니다. 이곳은 于尸山國(우시산국)이라는 소국가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누구의 것이냐. 제 생각에는 고구려 장수왕 때 신라에서 倭를 치기 위해 도움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고구려는 정병 5만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 어떤 장수가 病死(병사)해서 묻은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 하나는 불국사의 방형분이 있습니다. 그걸 보면 누구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설에 의하면 김대성의 것이 아니겠냐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12지신상을 둘렀지만 방형으로 만들어진 고구려 형식 무덤입니다.


  김유신 장군묘를 다 보셨으니 이제 황룡사지 9층 목탑터로 이동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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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19, 14:1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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