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서(17): 대한민국은 제2의 신라
세계적으로 성공한 나라는 모두 文武 양쪽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쪽만 있으면 실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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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注: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하면서 조갑제 기자가 강연한 내용이다.

[감은사지 3층 석탑 下]
 
  조갑제: 우리가 지금 북쪽에서 남쪽으로 보는 거 맞죠. 우리나라에서는 방향을 정할 때 왼쪽, 오른쪽을 기준으로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왼쪽이 동쪽과 일치합니다. 그것은 북쪽에서 남쪽을 보는 기준에서 방위를 정하기 때문이죠.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남쪽에서 북쪽을 보지 않고, 북쪽에서 남쪽을 보면서 방향을 정했을까요. 그것은 우리 민족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계속 이동했기 때문에 우리 유전자 속의 방향 감각이 북에서 남을 기준으로 하게 돼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한국 사람들 머릿속에는 항상 남쪽 지향입니다.

  그걸 어디서도 볼 수 있느냐. 유행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남쪽과 관련된 유행가가 굉장히 많습니다. 남행열차, 남쪽 나라 십자성 등등. 제가 노래방에 가서 찾아보니까 10여 개 정도 되더라구요. 그런데 일본에 가면 북쪽 관련 노래가 많습니다. 일본은 남쪽과 관련된 노래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이 건국될 당시 우리 민족이 가야에서 건너가서 北上(북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민족마다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김일성이 남침을 했던 모양입니다.

  이건 여담인데 세계적으로 남쪽과 북쪽이 싸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북쪽이 이겼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에서 북군이 이겼고 베트남 전쟁에서는 월맹이 이겼죠. 독일에서도 북쪽에 있던 프러시아가 통일을 했고 이탈리아도 북쪽에 있던 사르디니아가 통일을 했습니다. 예맨도 남북 예맨이 붙었을 때 북 예맨이 통일을 했습니다. 중국 역사에서도 대부분 북쪽에서 내려온 국가가 통일했습니다. 그게 참 미스터리입니다. 남북이 싸우면 왜 북쪽이 승리하느냐. 유일한 예외가 신라입니다. 남쪽에서 일어난 나라가 통일한 건 유일한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역사는 남한이 중심이죠. 그러니까 대한민국 주도로 통일이 될 거 같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거쳐온 게 아까 황룡사에서 통일해 달라고 기원해서 통일을 이루고, 이 탑은 통일된 다음에 만든 탑이니까 일종의 완결편입니다. 이 탑을 완성시킨 사람은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입니다. 우리 고대사에서 신문왕이라는 사람의 위치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학자들이 말하길 신문왕 때 와서 우리나라 고대사가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그건 뭐냐. 그동안 통일 전쟁을 하면서 귀족의 힘도 빌리고 이랬지 않습니까. 신문왕이 집권한 다음에 그 귀족들을 곧 숙청합니다. 반란 모의가 있었던 것처럼 꾸며서 삼국통일 전쟁 당시 공이 있었던 사람들 상당수를 숙청합니다. 자기 장인도 죽이고 당시 국방장관도 모의에 대해 신고하지 않았다고 꾸며서 죽여버립니다. 그 결과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이 없도록 합니다. 절대 왕권을 만든 사람이죠. 신문왕릉이 저 쪽에 있는데 아주 크고 아주 잘 만들어진 능으로 왕권의 상징이 될 만하도록 만들어 놨습니다. 그 능이 하나의 표준형이죠. 
  문무왕의 마지막 유언이 정말 문학적이고 멋집니다. 그런데 문무왕의 실제 유언 속에는 倭를 상당히 두려워한다든지 그런 것은 없어요. 삼국유사 등에서 해석을 그렇게 한 거 같은데 나름대로 이유는 있습니다.

  통계를 내보니까 백제, 신라, 고구려 중에서 천재지변이 가장 많았던 나라, 전쟁 횟수가 가장 많은 나라가 신라입니다. 신라의 전쟁횟수가 왜 가장 많았냐 하면 가야하고 전쟁하고 백제하고도 전쟁하고 고구려하고도 전쟁하고 倭하고도 전쟁을 했습니다. 네 나라하고 전쟁을 하다보니까 전쟁 횟수가 많았다는 겁니다. 반면 백제는 倭하고 전쟁할 일이 없었고 가야하고는 친하게 지냈죠.

  삼국통일은 항상 말씀드리지만 국제전쟁이었습니다. 국제적인 환경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한 신라가 성장하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치고 왜를 무력화시켰습니다.
  백제가 망한 게 660년인데 백제는 생각보다 쉽게 망하지 않았습니다. 660년 사비성에서 항복을 했지만 곧 부흥 운동이 일어납니다. 지금 이라크 식으로 곳곳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나서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꽉 묶여 버렸습니다. 이 틈을 타서 일본이 援兵을 보냅니다. 기록에 의하면 배 400척을 건조해서 약 3만여 명을 보냅니다. 그래서 지금의 군산, 장항 근방인 금강 하구에서 663년에 ‘白村江 전투’라는 게 일어납니다. 이 전투에서 倭軍은 전멸합니다. 대신 돌아갈 때 백제 사람 5000여 명을 싣고 돌아갔다는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일본서기에 보면 이 전투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 나오는데 우리나라는 이겨서 그런지 삼국사기에 두 줄 정도만 간단하게 묘사됩니다. 이 백촌강 전투를 계기로 해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개입을 포기합니다.

  그 전에는 자기의 모국인 가야를 지키기 위해서 계속 군대를 보내고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해왔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대신 자기네끼리 일본에서 나라를 잘 만들자 해가지고 자기 나라를 발전시키는 쪽으로 邁進(매진)합니다. 그 결과 701년에 가면 나름대로의 헌법을 만듭니다. 大寶律令(대보율령)이라는 헌법을 공포합니다. 일본은 701년에 고대 국가를 완성합니다. 그 시기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전인 671년, 그러니까 신라가 對唐(대당) 결전을 한창 치르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정변이 일어납니다. ‘壬申의 亂’이라는 게 일어납니다. 그 결과 天武천황이라는 사람이 집권합니다. 그런데 이 천무천황이라는 사람에 대해 족보 등 여러 가지를 조사한 결과 신라 계통의 渡來人(도래인)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신라 계통 도래인들의 도움을 받았고 아마도 문무왕의 도움도 받았을 것이다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 사람이 집권한 다음에는 수백 년 동안 신라하고 숙적처럼 지내던 정책을 바꿔 처음으로 親신라 정책을 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신라가 당나라와 싸울 때인데 일본은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끊습니다. 당나라에는 사신을 안보내요. 신라에만 보냈습니다. 교류를 하면서 신라에서 많은 것을 배워갑니다. 먼저 통일을 했고 기틀을 잡았으니까 고대 국가를 어떻게 만드는가, 신라가 당나라를 물리칠 때 어떤 戰法을 썼느냐 하는 것 등을 배워갑니다. 일본은 신라를 모델로 해서 고대국가를 완성합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일본 사람들의 역사 해석이 그렇습니다. 물론 비교적 자기 역사를 바로 보는 일본의 左派학자들이 주장하는 겁니다.

  그렇게 돼가지고 670년대부터 690년대까지 30여 년 간 일본과 신라가 굉장히 친하게 지냅니다. 그 시기가 한일 관계가 가장 관계가 좋을 때입니다. 이 30년은 또 어떻게 되느냐. 신라는 당나라와의 외교관계가 단절됐습니다. 우리가 당나라를 쫓아내 버리니까 당나라는 화가 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외교관계가 단절되고 성덕왕 때까지 서로 사절을 교환하지 않습니다. 30년 동안 외교 단절 상태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신문왕 때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신문왕 때 唐 중종이 사신을 보내 ‘당신들이 왜 태종무열왕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느냐’면서 불평을 합니다. 자기네 唐 태종과 같은 이름이라고 태종무열왕의 이름을 바꿔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신문왕이 ‘아니, 당신네 당 태종도 우리를 도와준 홀륭한 분이지만 우리 태종 무열왕도 통일을 이룩한 분이기 때문에 그에 못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그 요청을 무시합니다. 아무튼 신문왕 때는 당나라와 외교관계가 없었습니다. 그 뒤에 성덕왕 때부터 외교관계가 복원됩니다.

  이때 일본도 참 재미있었습니다. 일본도 천무천황의 다음다음이 文武천황입니다. 문무천황도 죽은 후에 火葬을 합니다. 일본 천황 중에서 火葬을 한 게 네 사람인데 모두 문무 천황 다음으로 합니다. 제 이야기를 하면 너무 국수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어서 일본의 기록을 인용합니다. ‘아마도 신라 문무왕의 화장 풍습을 보고 일본의 문무천황도 화장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써놓은 것을 제가 봤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문무왕의 유언을 ‘왜를 두려워해서 자기의 뼈를 여기에 뿌리면 동해의 용이 돼 倭를 막겠다’고 해석하고 있는데 실제 그 시기는 신라와 倭의 관계가 매우 좋은 시기였다는 겁니다.

  일본 나라(奈良)에 가면 ‘도다이사(東大寺)’라는 게 있습니다. 가보신 분들 많으실 겁니다. 목조 건물로는 현재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곳입니다. 도다이사가 만들어진 게 8세기 초입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 축하 사절 비슷하게 약 700여 명이 갔습니다. 그건 요새로 말하면 좋은 것 만들어졌다고 하니까 관광차 갔다고 보면 됩니다. 그 정도로 교통이 편리했다는 겁니다.

  여기 감은사하면 신문왕과 문무왕이 동시에 관계된 곳입니다. 아까 문무왕의 유언을 인용하셨는데 제가 여기 하나 적어왔습니다. 한 번 읽어드릴께요. 저는 문무왕의 유언을 읽으면서 별 감동이 없었는데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일본 학자가 한 분 있습니다. 그 분이 제게 책을 한 권 보내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일본 사람으로써 문무왕의 유언을 읽어보니까 세계에서 왕 치고 이런 유언을 남긴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왕이 이렇게 겸손하게 자기 무덤을 크게 짓지 말고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할 수 있느냐 해서 그걸 가지고 논문을 쓴 걸 제가 봤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 중 일부입니다.

  「…山谷은 변하고 세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吳王(손권)의 북산 무덤에 금으로 채색한 새를 볼 수 없고 魏王(조조)의 서릉에는 오직 공작의 이름만 들을 뿐이라. 옛날 萬騎(만기)를 다스리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고 만다. 樵童牧竪(초동목수)는 그 위에서 노래하며 여우, 토끼는 그 곁을 구멍 뚫는다. 한갖 자재를 낭비하여 허사와 비방만을 책에 남기고 그때의 인력만을 수고롭게 할 뿐 사람의 영혼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고요히 생각하면 마음의 아픔을 금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내가 즐겨하는 바 아니므로 죽은 뒤 열흘이 되면 창고 문(庫門)의 바깥 뜰에서 인도식에 따라 화장하여 장사지내고 (喪)服의 경중은 규정이 있으나 (國)喪의 제도는 애써 검약하게 하라. 邊城(변성)의 鎭守(진수)와 州縣(주현)의 課稅(과세)도 꼭 필요치 아니하면 모두 헤아려서 폐하고 율령과 격식 중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고치도록 하라.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널리 알게 하고 소속관원은 곧 시행하라.…」

  이것이 이 사람의 유언입니다. 그러니까 문무왕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아주 담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문무왕이라는 이름을 참 잘 지은 겁니다. 문무왕이라는 이름은 文武統一대왕, 즉, 통일이라는 것은 文과 武의 합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요새 우리나라처럼 군사적인 것을 폄하하는 식으로는 통일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文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시 주류 세력들이 모두 文이니까요. 그 당시에 文이라고 해서 따로 지식인 세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니까 아마도 불교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원광법사라든지 원효대사라든지 하는 분들로 대변되는 호국불교로 생각됩니다. 이런 게 합쳐야 통일의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다 하는 통일의 비결을 문무왕이라는 이름 안에 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중에서 불교와 통일 간의 관계를 봅시다. 우리가 흔히 호국불교라고 그러는데 원광법사라는 사람이 ‘世俗五戒(세속오계)’를 만들어서 그것을 화랑도의 신념으로 삼도록 했다 이렇게 전해 내려옵니다.
  진평왕 때 원광법사라는 사람이 당나라에 보내는 상소문을 쓰는데 그 내용이 전쟁을 하려는데 우리를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이 상소문을 쓰라고 하자 원광법사는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승려는 남을 해치거나 전쟁에 개입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민을 하다가 원광법사가 한 말이 있습니다. 일단 상소문을 쓰기로 합니다. 쓰면서 ‘나는 승려이기 이전에 신라 사람이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은 종교와 국가 간의 관계를 잘 정리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불교의 자비정신을 가지고 신라에서 그대로 밀고 나갔다면 통일이 됐겠습니까. 통일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반대로 연개소문처럼 사람만 죽인다고 통일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래서 원광법사가 만든 세속 오계에서 살생유택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살생유택이라는 말의 의미를 요새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동물을 죽일 때 언제언제 죽이라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걸 다르게 해석하면 일단 통일 전쟁을 하면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지만 학살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건 피할 수 없어도 양민은 죽이지 말라, 쓸데없는 살인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불교가 최선을 다해서 국가를 뒷받침하지만 또한 불교가 가지고 있는 자비 정신을 통해서 살인은 최소한으로 그치도록 하라는, 그런 균형 감각을 가지라는 뜻으로 봅니다.

  저는 신라라는 나라를 이렇게 봅니다. 신라라는 나라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아까 김유신 묘의 12支神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생략의 미를 살리는 기가 막힌 디자인 감각을 가졌습니다. 아름다운 것도 있습니다. 또 문화가 굉장히 너그럽죠. 남녀 관계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굉장히 너그럽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할 때는 무섭습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신라라는 나라는 하나로 쥘 수 없는, 유연하기도 하고 강직하기도 한 양쪽을 다 가지고 있는 나라. 그것을 文武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나라는 모두 文武 양쪽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쪽만 있으면 실패합니다. 고구려는 너무 武斷(무단)쪽으로 가서 실패했고 조선은 너무 文弱(문약)으로 가서 실패했다고 봅니다. 신라가 우리 민족사에서 문무를 동시에 같이 가졌었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제2의 신라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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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05, 17:09 ] 조회수 : 307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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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유의메아리     2018-11-07 오후 12:37
조사장님의 칼럼에 토를 달 생각은 전혀없읍니다 다만 고대사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는 사기적 수법으로 고구려가 처 내려올것이라고 겁주고 백제와 동맹을맺고 백제가 아무 방비도없는 틈을타서 백제를 공격 황산벌 싸움에서 백제의계백장군과 3000의 용사를 일거에 죽이고 백제를 손에넣고 또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종국에는 당나라에 의하여 고구려는 멸망하고 이후 당나라는 신라마져 삼키려고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를 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렸으나 후백제의 견훤 고구려의 후예인 고려에 의하여 당나라의 신라 합병은 성공못하고 고려는 한반도의 북부지방인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너른 강토가 신라의 전쟁없이 고려에 투항하므로써 한반도에는 고려라는 통일국가가 건국되였고 그러다 500년이 미쳐 못채우고 이성계에게 고려는 멸망하고 이성계에 의하여 이씨 조선이 성립되였고 앞록강 두만강까지의 국토를 확장했다 그리고 고구려는 비록 멸망했으나 대조영등의 고구려 후예들이 당나라와 싸우며 고구려 옜 강토를 많이 회복하고 발해국을 세웠다는것이 현재까지 우리가 배워온 고대사가 아닌가요 조사장님께서는 이제 역사를 다시 쓰시는것입니까 조사장님 부탁컨데 비록 완전치는 못하나 현재의 역사를 그냥 두는게 좋겠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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