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3) 吉祥祠
"김유신 장군처럼 죽어서 왕으로 追贈(추증)된 신하는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다고 합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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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注: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하면서 조갑제 기자가 강연한 내용이다.
[3. 길상사]
  
  조갑제: 오늘 진천에서 볼 유적지와 역사를 소개해 주실 신운철 계장님이십니다. 
  
  신운철 진천군 문화관광과 계장: 안녕하세요. 生居鎭川(생거진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부터 보실 곳은 김유신 장군을 모신 吉祥祠(길상사)와 김유신 장군 생가터 등입니다. 
  저희는 진천을 화랑 정신이 발현된 곳이라고도 합니다. 맨 처음 보실 길상사는 충청북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호로 김유신 장군의 影幀(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 곳을 절(寺)로 착각하시기도 합니다. 지금도 종종 저희 문화체육과로 편지가 올 때 길상사 주지 앞 이렇게 적힌 편지가 옵니다. 
  
길상사와 김유신 장군 탄생지 설명을 해준 진천군청 신운철 계장

  우리 대한민국에 김유신 장군을 모신 주요 사당이 열두 군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진천에 있는 영정을 표준 영정이라고 해서 김유신 장군 영정을 그릴 때 여기 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린다고 합니다. 영정은 1972년 월전 장우성 화백께서 그리셨는데 1976년도에 사적 정리사업을 하면서 이쪽으로 모셨습니다. 당시 300만원 정도의 사업비를 들였다고 하는데 지금 가치로는 약 3억 원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길상사의 전경. 도당산성 터와 겹쳐 있다고 한다

  여기 사당의 위치는 네 번째 옮기면서 자리한 곳입니다. 당초에는 김유신 장군 탄생지인 상계리 뒷산인 길상산에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관리가 안돼 옮기고 옮기다가 이쪽으로 옮긴 것은 1926년입니다. 한 50년 후인 1976년, 사적지 정리사업을 함으로써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도담산성이라고 해서 삼국시대 당시의 산성입니다. 길상사가 이 산성 안에 있습니다. 올라가시다 보면 진천의 全景이 펼쳐지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길상사에 가셔서는 김유신 장군이 흥무대왕으로 追贈(추증)되셨기 때문에 祭禮(제례)를 지낼 때 절을 네 번 해야 합니다. 여기 길상사 올라가는 길은 봄에는 벚꽃이 화려하게 핍니다. 
  그 다음에 진천에 있는 화랑도 유적이나 김유신 장군 유적 중에 길상사를 첫 번째 코스로 잡는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 어떤 분께서 오셨길래 ‘먼저 길상사에 들러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십시오’ 부탁을 드렸는데 그 분께서 바쁘시다고 길상사에는 안 들르고 다른 곳을 보고 가시다가 사고를 당하셨어요. 그 일이 있은 다음에 저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진천에 오시면 먼저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고 다음 관광을 하시라는 의미에서 코스를 이렇게 잡은 겁니다. 
  김유신 장군께서 태어나신 곳은 사적으로 지적된 곳입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곳에서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하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왜 잘못 알려졌느냐 하면 지금 남아있는 고전 중에서 三國史記 列傳 제일 앞 부분에 써있는 글 때문입니다. 거기에 뭐라고 써 있느냐 하면 ‘김유신은 경주 사람이다’라고 기록돼 있기 때문에 잘못 알려지게 된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김유신 장군께서 경주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김유신 장군께서는 사후 160년 후 흥덕왕 10년(835년)에 흥무대왕으로 追贈(추증)되셨습니다. 김유신 장군처럼 죽어서 왕으로 追贈된 신하는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 왕은 神과 같은 존재로 백성하고 신은 분류됐기 때문에 추증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死後 160년 후에 追贈되신 겁니다.
  김유신 장군의 影幀(영정)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이 영정을 그릴 당시 김유신 장군의 원래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손들의 생긴 모습 중 특징 부분을 합성해서 그렸다고 합니다. 1972년에 그린 작품입니다.
  
길상사에 모셔져 있는 김유신 장군 영정. 1972년 월전 장우성 화백의 작품이다.

  김유신 장군 탄생지에 가보시면 위업비도 문무왕 위업비와 형태가 같고 경주에 가보시면 영정도 왕관을 쓰고 용포를 입으신 모습으로 나와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등 뒤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북두칠성은 으뜸별이 아니지 않습니까.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면서 하늘의 운행을 관리하는 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김유신 장군은 자신이 신하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셔서 본인의 운명에 순응했습니다. 당시 김유신 장군은 모든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 권력을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다 자신 또한 가야의 후손이라는 당위성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부분 때문에 인간적으로 높이 존경받고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 사적비

  최근에는 이 분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듯이 삼국통일이 외세를 끌어들여서 음험하게 이뤄졌다는 주장이나 음침하다는 주장들이 있는데 그것은 일제시대에 들어 왜곡된 평가들입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김유신 장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새로 이뤄져야 하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영웅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조갑제: 삼국사기에 보면 김유신에 대한 부분이 제일 깁니다. 왕에 대한 이야기들보다도 깁니다. 왜냐하면 김부식이라는 인물이 삼국시대 제일 인물로 꼽은 것이 김유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편집자로써의 평가죠. 
  
  신운철: 이 길상사 주변을 보시면 성 흔적이 보이구요, 외곽 부분은 흙에 묻혀 있습니다. 이 都堂山城(도당산성)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성곽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진천의 문화유적을 찾아보면 신라, 백제, 고구려의 유적이 混在(혼재)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의 진천 지역이 삼국 시대의 爭覇(쟁패) 지역이다 보니까 고구려 땅이었다가 백제 땅이었다가 신라 땅이었다가 했다는 겁니다. 삼국의 격전지역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신라가 진천을 쟁패하면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쪽에 팻말이 있는 부분을 보시면 우물이 있습니다. 여기 도당산성에는 우물이 두 군데가 있는데 우물이 있다는 말은 사람들이 여기서 물을 길러 먹었다는 이야기고 여기에 사람들이 살았었다는 말입니다. 즉, 生城(생성)이었다는 겁니다. 도당산성은 지금은 도읍 ‘都’에 집 ‘堂’을 쓰는데 그 부분이 잘못됐다, 이것은 누군가가 한문을 바꿨다 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제대로 쓰려면 무리 ‘徒(도)’자, 화랑도 할 때 이 ‘徒’를 씁니다. 그리고 깃발 ‘幢(당)’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론이 나오냐 하면 徒幢(도당)은 곧 郎幢(낭당)과 같은 개념이 됩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에는 ‘郎幢(낭당)’이라는 무적부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낭당부대가 주둔하던 곳이 이 곳이고 그 낭당부대의 주력은 화랑도들이었다는 겁니다. 
  
길상사 정면으로 보이는 17번 국도. 건설 당시 나온 유물들을 통해 도당산성에 주둔하던 화랑들의 무덤터로 추측되고 있다.

  저 앞에 17번 국도가 보이는데 이 국도 공사를 하면서 지표조사를 했습니다. 지표조사를 하면서 삼국시대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충북대 학술조사단에서 유물들을 조사했는데 당시 발견된 무덤들이 화랑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이게 도당산성하고 연계가 됐기 때문에 여기서 사람들이 머물면서 전투하다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들을 거기에 묻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도당산성도 상당히 중요한 유적인데 이 부분도 아까 말씀드린 연구하고 병행해서 복원시켜야 할 겁니다. 
  여기는 탄생지입니다. 만노군, 그러니까 지금의 진천군 태수였던 아버지 金舒玄(김서현) 공이 화성과 토성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고, 어머니인 萬明부인이 금갑옷을 입은 동자가 집으로 들어오는 신기한 꿈을 꾼 후 임신 20개월 만에 낳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곳은 사적지 제414호로 말을 훈련시켰던 馳馬臺(치마대), 식수로 사용하던 蓮寶井(연보정)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역사서들에는 김유신 장군의 유소년기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기록은 ‘진천에서 태어나셨다, 13세 때 경주로 가셨다, 그 다음에 15세 때 화랑이 됐고 17세 때 심신수련을 하고 18세 때는 화랑이다’ 이런 기록은 나오는데 진천에서의 성장 기록이 없습니다. 안타깝죠. 그래서 이렇게 제가 말씀을 드리면 많은 분들께서 오셔서 그럼 진천에서 뭐하셨냐 이렇게 물어보시면 기록이 없으니까 설명을 해드리지 못해 난감한 겁니다. 
  길상사에 있는 영정에 대한 기록을 다시 찾아보니까 이렇게 돼 있네요. 
  ‘김유신 장군은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 왕의 12세손으로 시조 할머니인 허황후가 인도 사람인 관계로 남방계 혈통으로 표현하였으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군의 얼굴표정을 참조하고 후손 삼십 인의 얼굴을 합성하여 표준얼굴을 최종확정하였다.’
  진천은 인구가 6만 2000명입니다. 세계에서도 우리나라가 작은 편인데 우리나라 안에서도 충청북도가 가장 작습니다. 그 충청북도에서 가장 작은 郡(군)이 진천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께서 진천을 한 번 돌아보고 가시면서 느끼시게 되는 것이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가 중심인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한반도를 인체에 비유할 때 진천을 丹田(단전)이라고 말하십니다.
  오늘 견학에서는 진천의 어떤 정신, 문화의 어떠한 근원 같은 것을 느끼고 가시면 될 거 같구요, 그 대표적인 부분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진천의 많은 유적들이 되겠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신라가 진천을 끌어안으면서 삼국통일의 기초를 만들었다는 것은 근거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천에 철제련시설, 지금으로 말하자면 포항제철과 같은 제련시설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이 제련시설 유적을 발굴하다 그대로 땅에다 묻어두고 포항제철과 산학협력으로 발굴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시설을 보면 아래에는 백제 유적이고 위에는 신라 유적입니다. 이 시설이 원래 백제 것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았다는 이야기입니다. 
  21세기인 지금도 철을 다루는 나라가 강국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500년 이전에 철이 얼마나 귀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라는 그 당시 철을 제련하는 시설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런 유적들이 진천에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다음 장소로 가시죠.<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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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2, 11:2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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