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서(15): 경주 최 부자집의 숨은 이야기
"박상진 義士 일과 일본 당국의 도움을 받은 것만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80~90%는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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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注: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하면서 조갑제 기자가 강연한 내용이다.

[경주 최 부자집, 월정교 터]
 
  이재호 향토사학자: 원래는 여기 올 계획이 없었는데 여러분들께서 식사도 아주 우아하게 잘 하시고 그래서 보너스로 마침 이 근처에 있는 유적지라서 왔습니다. 인용사터도 가는 길에 살짝 둘러보고 목적지인 감은사터로 가겠습니다.

  여기는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경주 최 부자집입니다. 지금 보이는 여기가 바로 사랑채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한옥을 지을 때 이어진 공간으로 짓지만 옛날에는 철저히 분리가 돼 있었습니다. 저기는 안채입니다. 안채는 보통 ‘ㅁ’ 자로 돼 있습니다. 안채는 부인들의 공간, 사랑채는 바깥 분들의 공간입니다. 철저히 분리돼 있는 개념입니다. 부부가 合房(합방)을 한다든지 하는 특별한 경우에만 함께 있었지 완전히 떨어져 생활했습니다. 경주시에서는 관광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여기 불에 탔던 사랑채를 새로 짓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최씨 집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벼슬을 하되 進士(진사) 이상을 하지 마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며느리는 자기 집이 아무리 부유했더라도 시집와서 3년 동안은 비단옷을 입지 마라 등 이런 식으로 검소하게 살라는 말 등입니다.

  그래서인지 요 근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가문을 보고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모범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특히 조용원씨가 쓴 ‘종가집 이야기’라고 하는 책이 많이 팔렸습니다. 조용원씨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감정이 없지만 公的으로 보면 ‘종가집 이야기’라는 책에서 최씨 가문의 좋은 부분만 적어 놓은 게 좀 그렇기는 합니다.

  그 책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저 집안 사람들은 특별해서 처음부터 좋은 일만 했는가’ 생각하게 될 겁니다. 사람이란 것은 죽을 때까지 후회하는 존재고 조금 잘못한 게 있다 하더라도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최씨 가문 사람들은 완벽하게 잘난 사람들이라고 적어 놨습니다. 여기 책에 나온 최부자집에 대한 것은 서울 종가집에 가서 종손에게 말을 듣고 적은 것 아닙니까.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일반적으로 나라를 잃어버렸을 때는 독립운동을 하는 게 가장 큰 일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독립운동하는 것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안창호 선생처럼 실력을 키우자는 것도 있고 안중근 선생처럼 적을 암살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 당시 대한광복회에 박상진 義士(의사)라고 있었습니다. 원래 기득권을 갖지 않은 사람이 그랬을 때는 별볼일 없습니다. 그러나 잘난 사람이 그런 일을 할 때 그 사람이 정말 대단한 거에요. 박상진 義士는 원래 평양에서 판사를 했어요. 집안도 만석꾼 집안이었습니다. 박상진 義士는 나라를 잃게 되자 그 길로 ‘나는 독립운동 하겠다’며 판사를 그만두고는 군자금을 얻기 위해 조선의 돈 많은 사람들을 찾아 다닙니다. 만약 군자금을 안주면 죽이고. 그래서 경북 칠곡에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장택상씨의 아버지인 장성원씨도 죽입니다. 뭐 그런 식으로 해서 좀 급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대에 빨리 독립을 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그 사람이 서른 여덟 살에 대구에서 교수형으로 죽습니다. 박상진 義士가 죽고 난 뒤에 일어난 일이 이 집안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최준이라고 지금의 윗대 분인데 박상진 義士의 사촌 처남 됩니다. 당시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이 박상진 義士고 재무국장이 최준씨입니다. 그런데 박상진 義士는 그때 독립운동을 할 때니까 문제가 생길까봐 자신의 재산 소유권을 사촌 처남의 명의로 다 해놨습니다. 그런데 박상진 義士가 죽고 난 다음에 최준씨가 ‘이 재산은 내가 돈을 주고 다 산 거다’ 해가지고 박상진 가문이 완전히 몰락해버립니다. 또 지금으로 하면 워크아웃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일본 당국에서 보증을 서서 사업이 성공한 적도 한 번 있습니다. 물론 그 이외에는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대구에 대학도 설립하는 등 전반적으로 봤을 때 80~90%는 좋은 일을 했습니다.

  조용원씨 같은 경우에는 이겁니다. 두 가지죠. 이런 사실들을 아예 몰랐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이 책을 잘 팔리게 하기 위해 안 쓴거죠. 이 책이 10만 권 정도 팔렸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요새는 글도 많이 쓰고 합니다. 최씨 종가집에서도 이 책을 700권 정도 샀답니다. 자기네 자랑거리를 써놓은 거니까. 물론 책 팔기 위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우리들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이겁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80~90% 잘났으면 그건 잘난 겁니다. 그러나 조금 아쉬운 점, 이건 이해가 잘 안간다든지 하는 부분이 있어야 우리같은 보통 사람도 노력할 수 있게 용기를 주는 데 ‘이런 사람들은 완벽하게 잘났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요. 저는 그런 점이 좀 아쉽습니다.

  다른 이야기인데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난 궁이 이 근처이지 않은가 싶어요.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이 전부 신라 것입니다. 서울에서 오신 분들은 이해가 안될지 몰라도 여기 있는 건 전부 1000년이 지난 유적들입니다. 石塔(석탑)도 그렇고 石築(석축)도 그렇고. 특히 여기 집집마다 들어가보면 석탑이니 해서 좋은 게 많이 있습니다.

  불교는 다른 문화도 수용하면서 발전하는데 비해 유교는 다른 것은 철저히 파괴하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경주 박물관에 가보면 목잘린 부처상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일제 시대 때 일제가 저지른 일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아까 황룡사 갔다가 나오는 길에 분황사가 있죠. 분황사에 보면 완벽한 신라 우물이 있습니다. 거기에 다 처넣은 겁니다. 누가 했냐 하면 우리 선조들 중에서 글 좀 아는 사람들, 양반들이 불교 배척한다고 그런 겁니다. 그런 사례를 보면서 우리 선조들이 좋은 점도 있지만 조금 시야가 좁고 안좋은 점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겁니다.

  저기는 쌀을 저장하는 창고, 곳간입니다. 저기에 약 1000석의 곡식을 보관해서 주위 사람들이 힘들고 굶을 때 도와줬다고 합니다.
 
  여기가 유명한 月精橋(월정교)라고 하는 곳입니다. 여기가 원효대사가 물에 빠져 가지고 요석궁에 가서 요석공주와 사랑을 나눠서 설총을 낳게 됐다는 전설이 있는 터입니다. 자, 다들 편안하게 않으세요.

  물소리가 가장 아름다울 때가 언제냐 하면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할 때 방해가 되지 않는 정도일 때라고 합니다. 물소리가 도란도란하고 들리는 정도, 지금처럼 우리가 대화를 할 때 방해가 안되는 정도의 물소리가 가장 듣기 좋다고 합니다.

  자, 여기를 왜 왔느냐 하면 이 뒤쪽이 태종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가 있던 요석궁입니다.
  이 다리를 건너가다 원효대사가 물에 빠졌던 겁니다. 그래서 옷을 말리러 요석궁으로 들어가서 열흘 정도 있으면서 깊은 사랑-원래 짧은 사랑이 깊어요-을 나눈 끝에 설총을 낳게 됩니다.

  이건 있습니다. 원효 대사는 7세기 사람이고 이 다리는 8세기 것입니다. 왜 원효 대사와 이 다리가 있던 시대가 차이 나느냐 하면 원효 대사가 원래 건넜던 다리는 이 다리가 아니고 조금 더 작은 것이었고 이 다리는 경덕왕 때 만든 다리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다리가 月精橋(월정교)인데 日精橋(일정교)라고 또 다른 다리도 있습니다. 다리가 해와 달을 의미하죠. 이것 말고 박물관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똑같은 규모의 다리가 있습니다. 저 밑에는 칠성교라고 하는 다리가 있습니다. 어느 지역을 가든지 다리에 얽힌 사연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연들을 우리가 많이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께서 역사 유물을 보실 때, 탑을 보든지 왕릉을 보든지간에 여기에 이것을 왜 여기에 만들었는지, 왜 이 크기로 만들었는지 등 왜라는 질문을 계속 하며 감상하는 것이 가장 공부가 잘 되는 방법입니다.

  자, 그러면 왜 이 다리는 크게 지었을까. 지금은 하천에 물이 이 정도지만 1300년에는 이것보다 엄청 깊었죠. 지금 준설을 안한 상태가 이 정도라면 과거에는 배가 드나들었겠죠. 이 쪽이 바로 宮城(궁성)입니다. 半月城(반월성). 그리고 이게 南川(남천)입니다. 과거에는 배가 드나들 정도의 하천이었습니다. 당시에 남산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뿐이었습니다. 이 길이 아니면 저 산을 건너갈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보시는 다리의 길이와 폭이 신라 때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 앉아계신 돌들도 전부 이 다리를 만들 때 썼던 겁니다. 1300년 전에. 대단한 거죠. 토목기술도 완벽하죠. 돌을 가지고 이어서 만들었다는 것은 보통이 아닙니다. 저기 보면 다리 기둥에 부딪힌 물이 갈라지게 유선형으로 돼 있죠. 이 다리도 우리 시대에 복원하려고 해도 실력이 안되는 겁니다. 자, 저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이제 감은사지로 가시죠. 오늘은 감은사지까지만 보면 일정이 끝나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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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30, 10:2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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