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戰死)한 일본 군인이다”라는 미얀마 소녀
前生을 기억한다는 아이들(16) - 물과 버스를 극도로 무서워한 스리랑카 아이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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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틴 아웅 묘는 1953년 12월 26일 미얀마 북부 나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다 아이 틴은 아이를 임신했을 때 다부진 체격의 일본 군인이 윗옷은 벗고 반바지만 입은 채 꿈에 나타난 일이 세 번 있었다고 했다. 이 군인은 꿈에서 이 여성과 함께 살기 위해 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 틴 아웅 묘는 서너 살쯤 됐을 때부터 전생을 기억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 위로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몸서리를 치며 울었는데 비행기에 대한 공포는 몇 년간 계속 지속됐다고 한다. 네 살쯤 됐을 무렵에는 혼자서 울고 있기도 했다고 한다. 부모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일본이 너무 그립다”고 하더란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툴 지역에 주둔하던 일본 군인이었다고 했다. 자신은 취사병이었고 연합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마 틴 아웅 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떠올려냈다. 자신이 일본 북부 지역에 살았고 결혼을 했었으며 자녀들이 있었다고 했다. 입대하기 전 일본에서 작은 가게 하나를 운영했었다고 말했다. 사망한 시점은 일본군이 미얀마에서 철수하기 시작했을 무렵이라고 했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1945년경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 틴 아웅 묘는 폭격이 있던 시점에 동료들이 어떤 옷을 입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설명했다. 사타구니 쪽에 피격을 당했고 즉사했다고도 했다.


마 틴 아웅 묘는 일본 군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또한 일본 어느 지역에서 자랐는지도 떠올려내지 못했다. 이언 스티븐슨 박사는 이로 인해 정확한 신원을 추적하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나툴 지역에 주둔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어머니 다 아이 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마을에 주둔하던 일본군 취사병을 한 명 알고 지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고 그가 당시 폭격으로 숨졌는지 여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마 틴 아웅 묘는 일본 군인과 같은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미얀마의 더운 날씨를 싫어한다고 했고 향신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이 싫다고 했다. 달달한 음식을 좋아하고 생선도 반만 구워 먹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일본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고, 갑자기 드러누워서는 고향에 대한 “향수병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인과 영국인이 싫다는 말도 하곤 했다.


마 틴 아웅 묘는 남자아이 같은 행동을 했다고 한다. 남자 옷만 입고 머리도 남자처럼 잘랐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여자학생 옷차림을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는데 아이는 고집을 부렸고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는 직업을 선택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언 스티븐슨 박사가 아이를 처음 만난 1974년 당시 그는 인근 기차역에서 음식을 파는 노점상 일을 했다.


아이는 어렸을 때 유난히 군대놀이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항상 장난감 총을 사달라고 했다. 마 틴 아웅 묘에게는 세 명의 여자형제와 한 명의 남자 형제가 있었는데 이들 모두 어렸을 때 군대놀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 틴 아웅 묘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축구 같은 운동을 하곤 했다고 한다.


마 틴 아웅 묘는 나이가 들면서도 계속 남성성을 유지했다. 계속 남자 옷을 입었고 남자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부인을 갖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여자로 비춰지는 것도 싫어했다. 이언 스티븐슨 박사의 동료인 우 윈 마웅은 그를 처음 찾아가 여성에게 쓰는 존칭어인 ‘마’를 썼다고 한다. 그러자 아이는 남성에 대한 존칭어인 ‘마웅’을 쓰라고 하더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면 아예 존칭어를 쓰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 틴 아웅 묘의 가족은 아이가 전생에 일본 군인이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전생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이언 스티븐슨 박사는 이 사례가 환생이라는 문제에 있어 해결되지 않은 사례를 보여주는 좋은 경우라고 했다. 해결되지 않은, 즉 검증이 되지 않은 이유는 아이가 일본 군인을 특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만 전생에 대한 기억이 현실성이 있어 보이고 군인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가 이런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모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고 했다.


샴리니 프레마라는 여자아이는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1962년 10월 16일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아이를 낳은 얼마 뒤 콜롬보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진 고나겔라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아이는 말을 하기 전부터 목욕을 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물에 들어가게 하려고만 하면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을 치더란 것이다. 또한 버스를 심하게 무서워했다고 한다. 부모가 아이와 함께 버스를 탈 때면 항상 울며 소리쳤다고 한다.


샴리니는 말을 하고 나서부터는 부모에게 전생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살던 고나겔라에서 약 2km 떨어진 갈투다와 마을에 살았고 당시 부모의 이름을 말했다. 아이는 전생의 어머니를 ‘갈투다와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했다. 여자형제가 있었고 학교를 같이 다니던 친구 두 명의 이야기도 했다. 당시 살던 집도 묘사했는데 현재 살고 있는 집과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고 한다.


샴리니는 자신이 어떻게 죽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학교에 가기 전 아침에 빵을 사러 집을 나섰는데 길거리가 홍수로 물이 넘쳤다고 했다. 그때 지나가던 버스로 인해 물폭탄을 맞았고 논밭에 빠지게 됐다고 했다. 손을 위로 뻗으며 ‘엄마’라고 소리쳤으나 얼마 뒤 잠에 들어버렸다고 했다.


실제로 갈투다와 지역에서는 1961년 5월 8일 헤마시리 구네라트네라는 소녀가 논밭에 빠져 익사한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지나가는 버스를 피하려다 물이 넘치는 논에 빠진 사고였다. 헤마시리는 숨진 당시 11세 소녀였다. 샴리니의 가족은 헤마시리의 가족과 먼 친척 관계였다. 하지만 교류는 없었다고 한다.


샴리니의 부모는 헤마시리가 이렇게 익사해 숨진 이야기는 전해들었지만 아이가 처음 자신이 전생에서 익사했다는 말을 했을 때는 이를 떠올려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샴리니가 세 살쯤 됐을 때 길거리에서 헤마시리의 사촌 한 명을 알아보는 일이 있고난 뒤 이를 떠올려내게 됐다는 것이다. 샴리니는 헤마시리의 다른 여자형제들도 알아봤다고 한다.


이 무렵 샴리니는 계속 자신이 과거에 살던 갈투다와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의 어머니가 그립다며 지금의 어머니보다 그때의 어머니가 훨씬 좋다고도 했다.


샴리니의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갈투다와에 갔다. 전생을 기억한다는 아이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긴장한 탓인지 샴리니가 알아본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다고 한다. 샴리니의 아버지는 아이가 헤마시리의 어머니를 알아봤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샴리니의 아버지는 아이가 하는 이야기와 헤마시리의 삶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두 가족은 이후 연락을 주고받곤 했는데 두 아이의 성격 중 겹치는 점도 많았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옷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이언 스티븐슨 박사는 이 사례를 1966년부터 조사했다고 했다. 때는 샴리니가 갈투다와에 방문한 얼마 뒤였다. 스티븐슨 박사는 당사자들의 기억이 생생할 때 인터뷰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몇 년에 걸쳐 두 가족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고 한다. 아이가 말하는 것이 일관적인지, 그리고 아이가 커가며 어떤 식으로 자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스티븐슨 박사는 이들의 주장이 사소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큰 맥락에서는 일치했다고 설명했다.


샴리니는 이후에도 몇 차례 과거의 가족을 만나러 가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횟수가 줄어들었는데 전생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대여섯 살 됐을 때부터는 아예 전생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11세 쯤 됐을 때부터는 아예 기억이 사라진 것 같다고 한다.


아이가 네 살이 됐을 때 물에 대한 공포심도 사라졌다고 한다. 여덟 살 정도 때부터 버스도 무서워하지 않게 됐다고 한다. 스티븐슨 박사는 아이가 11세가 된 1973년에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는데 평범한 스리랑카 소녀로 자라고 있었다고 했다.


스티븐슨 박사는 이 사례가 애매한 사례 중에 하나라고 했다. 두 가족이 거주하는 지역이 2km 거리밖에 되지 않으며 원래 알고 있는 가족이었기 때문에 아이가 외부로부터 정보를 얻게 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두 가족이 왕래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헤마시리의 삶이나 특이한 행동을 샴리니가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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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9, 01:2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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